| 축복을 잃어버린 백성들 민14:20-35 한 인간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면 보통 자신의 생일이겠지만 그보다 더 극적인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날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나라에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적적인 날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쌍십절이라고 하는 10월 10일, 미국은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유대민족에게는 유월절인 1월 14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적의 날은 8월 15일, 광복절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히틀러 나치정권 하에서 학살당한 600만 유대인을 기억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 기념관의 이름이 \'야드바심\'인데 그 뜻은 \'기억\'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념관에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혹시 유대인이 잊었을까봐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야드바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려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야드바심\'에 들렸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 기념관을 돌아본 어느 유대 어린이의 눈에 눈물이 흥건히 고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어린 철부지가 무엇을 안다고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어린아이에게 잔인한 복수심을 일깨우는 빗나간 교육방법이라고 비난할지 모르나 살다 보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항목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망각이라는 말이 있으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까지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은 잘 잊어버리는 민족입니다. 일제 36년을 겪은 사람들은 일본의 그 잔학성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낚시꾼이 미끼로 고기를 낚을 때에 같은 미끼로 유혹을 하지만 물고기는 여러 번 입질을 하다가 끝내 물게 되며 동료가 낚시에 물리는 것을 보고도 역시 다른 물고기가 걸려든다는 것입니다. 어느 과학자가 말하기를, 물고기의 지능은 0.4이고 기억력도 3초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은 물고기의 지능밖에 되지 못하는 민족인지도 모릅니다. 이 땅의 50대 이상이면 누구든지 겪었을 일제시대의 그 엄청난 피해를 뼛속 깊이 체험했으면서도 다시 그와 같은 과정을 반복할 수 있겠습니까? 지능이 100 이상이고 기억력이 몇 십 년간 지속되는 인간이 바보가 아닌 바에야 그와 같은 오욕의 세월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의 작태를 보니 물고기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강남의 어느 여성 전용 사우나는 우유로 목욕을 하는 특실이 있고, 고급 외제 향수가 뿌려진 인공 온천수가 솟구치고 있다고 합니다. 계속 같은 미끼를 무는 물고기와 향락만을 일삼는 인간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거지가 우굴거리는 나라에서 참새 눈물 만한 수입으로 저축을 하여 오늘의 경제대국을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울릉도 앞 바다에서 \"자장면 시키신 분?\" 하니까 마라도에 있는 사람이 \"미안하지만 마라도로 옮겼어\"라고 응수합니다. 어디서나 잘 통한다는 어느 휴대폰 회사의 광고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상어 뱃속에서 \"나 여기 있어\"라고 통화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언제 어디서나 잘 통하는 아주 편리한 핸드폰을 사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더 잘 통하는 휴대폰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상호간에 통해야 어울려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잘 통하면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고, 부모와 자녀가 잘 통하면 자녀가 바르게 자랄 수 있으며, 직장 동료간에 잘 통하면 업무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잘 통하면 이상적인 교육의 장이 형성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궁극적으로 통해야 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잘 통해야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과 잘 통할 때만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많은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공하여야 할 사람이 성공을 하지 못하고, 누가 보아도 벌받아 마땅한 사람이 뜻밖에도 잘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때때로 원망스러운 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은 왜 나를 돌아보지 않으실까 하고 의심까지 갖게 됩니다. 구약을 보면 선악과 사건이라든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일들을 보면 의심이 됩니 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가나안으로 다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느냐 하는 것 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실 때에 그들은 그리 선하고 진실하고 착한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지가 어언 430년입니다. 노예 중에 살았고 노예 중에 태어났습니다. 노예체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철저하게 노예로 사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셨습니다. 큰 권능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끝까지 다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셨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회전(回轉)시키십니다. 지금 저들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강 하나만 건너가면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광야 길로 돌려보내십니다. 광야로 회전시키시어 40년을 그 뜨거운 사막에서 고생하도록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은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를 누누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와 모처럼 해방을 경험한 저들이 곧장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 사건은 어찌되었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만으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해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출애굽만으로는 자유가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축복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저들은 출애굽으로 인하여 자유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자유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 25절과 신명기 1장 21,22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경륜적 심판\'이었다고 말입니다. 자유와 자유인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소극적으로 얻은 자유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입니다. 자유로운 정치, 자유로운 경제, 자유로운 여건, 자유로운 환경, 이 모든 것이 자유일 수 있으나 그가 자유인 되지 못한다면 그 좋은 환경도, 자유로운 환경도 그에게는 복도, 선도, 이로운 것도 될 수 없습니다. 돈은 확실히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지고 싶은 것은 가지게 합니다. 돈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자유의 상징이라고까지 일컬어집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유인이 되지 못한 채, 돈의 가치를 모르고 바로 쓸 줄 모르고 제대로 관리할 줄 모르는 채 이 경제적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는 그 돈으로 말미암아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 돈으로 말미암아 더 큰 불행을 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광야 길로 되돌려보내십니다. 어렵게 가나안 접경까지 왔는데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하고 되돌려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40년을 머물게 하십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가나안 땅을 탐지한 불신앙적인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4절이나 신명기 1장 22절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정탐꾼 열두 사람을 보내서 약속의 그 땅을 정탐하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강하게 요구하기에 모세가 그만 그대로 끌려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그래서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크게 책망하시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분명 불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언제 저들이 일정표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습니까? 저들이 계획한대로 스스로 길을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기다렸다가 구름기둥이 움직이거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쓸데없이 정탐꾼을 보내느냐는 말입니다. 그 자체가 엄청난 불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크게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신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보고에 문제가 생깁니다. 정탐꾼 열두 사람 가운데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하고 본 대로 이르며 저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 사람의 정탐꾼들은 이와 반대로 아주 절망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렇듯 절망적 인 소식을 전하자 온 백성이 울고 불고 통곡을 합니다. 다 망했다고 울부짖습니다. 이 울음 소리 속에는 전혀 신앙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말렸지만 저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인 세계관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불신앙적으로 거역하고 반항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돌로 치려 했습니다.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는 뜻을 품은 무리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집단화하면서 큰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반항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안되겠다. 너희는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 자유를 얻었으나 아직 너희는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생활을 좀더 해야겠다\'하시고 저들을 광야로 되돌려보내십니다. 그렇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광야로 되돌려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머물게 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여러분, 이 원망처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원망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아도 원망한다는 것은 내 주체의식을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시간은 내 정체감을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모든 일의 책임을 내가 져야 하는데, 내가 주인인데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내 가난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내 실패의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 순간 나라는 존재는 없어집니다. 이미 정신적으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주인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하는 그 순간 그는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자유를 찾아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집을 나간 순간 그는 어두움의 종이 되었고, 타락의 종이 되었고, 죄악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자유입니까? 자유인인 것 같으나 실로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22절)\"- 하나님을 시험하다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이적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고, 이미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권능으로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많은 능력과 이적을 보고도, 그 커다란 이적 가운데 살면서도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우리의 불신앙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23절)\"- 하나님의 능력도, 권능도, 심판도 없는 것처럼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 우리 가운데 얼마나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죄값은 사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데도 없는 것처럼, 죄를 짓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부정하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또한 저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원망죄가 가장 큰 죄가 됩니다. 철저한 불신앙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27절)\" 저들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에 대하여 불평이 많습니다. 마땅히 우리는 조금 불편한 광야의 길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요,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시는 시련의 길이 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거늘 저들은 계속 원망을 합니다. 약속의 땅도 믿지 않습니다. 원망을 할 따름입니다. 확실히 저들은 불신앙적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했느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Who am I?\'보다는 \'Whose I am?\'이 중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하고 하나님께 속할 때에 비로소 나의 정체와 나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저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떠했습니까? 조금만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라고 불평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55년 전 우리는 정치적 해방을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본에게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온 국민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가치를 몰랐고, 자유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몰랐고, 방종과 자유를 혼동하고 있었기에 힘겹게 얻은 그 소중한 자유를 다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농예가 되고, 물질의 노예가 되고, 혼란과 무질서의 노예가 되어 마침내 6.25라고 하는 엄청난 전쟁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혁명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면서 자유인이 되는 길을 배운 것처럼 우리도 그 많은 고난과 긴 시간 동안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길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시간 동안 우리로 자유가 무엇인지, 자유인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에게 빼앗긴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사상, 교육, 언어, 이름----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도덕 의식을 빼앗겼습니다. 법질서의식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도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지배할 때에 우민정책으로 이 땅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습니다. 동네마다 술집을 만들고 유곽을 만들어서 타락시켯습니다. 결국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 풍진 세상 공부해서 뭐하냐\'하며 놀고 먹고 마시는데에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이 타락성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술도 음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술을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십니다. 이것이 망국풍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망국윤리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 청년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그 잘못된 풍속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극단적 이기주의와 이러한 무책임이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전부가 식민지 문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일본어 강습이 성행하고 일본의 기생관광단이 이 땅을 뒤덮고 일본 상품에 이 땅의 여인들이 군침을 흘려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해방과 조국분단이 동시에 이루어졌던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우리의 선배들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 한마디가 어쩌면 그렇게도 예언처럼 적중하고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소련놈에게 속지 말고, 미국놈 믿지 말라. 일본놈 일어선다. 조선사람 조심해라.\"는 명언입니다. 특히 일본놈 일어선다는 말은 오늘의 모습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우리 선배들의 역사적 통찰이었습니다. 경제적 초부유국에서 정치, 군사적 초강대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저 일본을 우리는 선배들의 역사의식으로 다시 한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현해탄에서 먹구름이 일고 있습니다. 제 2의 침략이 경제력이란 이름아래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말하기를, \"쓰는 도중에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세익스피어를 못 읽고 괴테를 몰라도 이 역사는 알아야 한다. 8.15 해방은 도적같이 불시에 왔으며 그러기 때문에 하늘에서 온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8.15 해방은 어느 누구의 공로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선물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누릴 줄 아는 자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은 독립 대신 다만 해방되었을 따름이라는 말은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우리가 독립전쟁을 통해서 쟁취한 것도 아니요, 2차 대전에서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일도 없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한 결과 다만 어부지리로 해방되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일본귀신 쫓아내었더니 더 악한 공산당귀신이 들어와 나라 형편이 전보다 더 어려워졌고 비록 오막살이 움막일망정 내 문패를 붙이고 보니 하루아침에 서울시내에 정당 간판이 94개나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러고도 나라꼴이 되겠습니까. 뱀에게서 풀려 나와 호랑이에게 쫓기고, 호랑이를 피하니 이제는 곰이 덤빈다는 격으로 우리가 모처럼 쟁취한 이 자유는 또 뭔가에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서고 있습니다. 해방된 것 같으나 아직도 구석구석 우리는 식민지 문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 축복을 잃어버린 그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노예상태에 대한 각성이 없는 이 구제불능한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더 이 광야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디서 자유를 빼앗겼으며, 어디서 자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제 2의 침략행위가 먹구름처럼 몰려오고 있는데 제2의 광복이 필요합니다. 제 2의 광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는 나라가 부강해지는 길이요, 또 하나는 그 부강을 누릴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합니다. 돈을 쓰는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면 망합니다. 자유와 해방은 돈과 인간 이 두 가지가 안팎으로 맞아야만 누려지는 선물입니다. 진정한 해방은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언제쯤 언 제쯤 이런 해방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