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죽음, 그리고 축복 계14:13 금주에 세미나를 갔다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의 논리보다 생명들이 죽어 가 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시 대통령의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제 개인적으 로 보면 전쟁은 합법화 될 수 없습니다. 성경도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시가 반전 여론에 불구하고 성경 구절을 사용하면서 신앙적인 합법성을 표현 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저 지구 건너편에 있는 중동 땅을 위해 기도하시겠습니다. 1)전쟁이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2)무고한 생명이 죽지 않게 해달라고 3) 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보다 짧게 하나님께 가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어떤 방식이던지 죽게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이번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나 대부분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죽음은 우리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죽으러 사는 것 이예요. 그래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도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한끼 밥을 먹으면 더욱 더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로 예전부터 죽음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 죽음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는 퀴불로스입니다. 그는 말기 암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다섯 단계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 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부정입니다. \"아니야 그럴 수 없어 잘못된 것 일거야\" 두 번째 는 분노하는 단계입니다.\"왜 하필 하나님 저입니까! 저 텔레비전에 나와 있는 사람 은 왜 웃는 거야\"라고 화를 내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타협입니다. \"하나님 그래요 죽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살려 주신다면 재산의 반 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믿음이 좋아집니다. 그러다 네 번째 우울로 빠지게 됩니다.\"내가 하나님 앞에 한 것이 없는데 애들은 누가 돌봐 주지?\"라고 걱정합니다. 다섯째 순응하는 단계로 죽음을 받아들이며 죽을 준비를 끝낸 단계입니다. 모든 단계까지 거치면 괜찮으나 중간에 죽음을 당하게 된다면 낭패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쟁을 대하면서 죽음이 참 가까이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이 북한과 전쟁을 한다고 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죽는 거지요. 우리 성도들이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죽는 것은 죽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 죽음에 대한 분명한 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죽음을 설교하기도 어렵고 교인들끼리 이야기하기도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인조차 죽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도사 시절이었는데 한 어른께서 임종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종예배를 드리러 가면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6번 살아나셨어요, 그러니 상주되는 분이 말씀하셨습니다.\"전도사님 제발 하나님 곁에 가시라고 기도해 주십시 오, 하나님 앞에 가니 좋은 것 아닙니까?\" 목회 신참병이라 고민돼서 선배 목사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절대로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 는 겁니다. 나중에 유족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으로 말하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닙니까? 만일 옆에 분에게 \"빨리 천국에 가시죠!\" 라고 인사하며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 미래를 보며 하늘나라를 대망 하는 종교인데 왜 죽는 것이 두렵고 부정적일까요? 먼저 죽음에 대해서는 샤머니즘이나 불교, 유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의 죽음의 요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중에서 49재를 하는 분도 계십니다. 49재가 뭔 줄 아십니까? 불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죽음 뒤의 상태를 중유 또는 중음신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사용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사자는 제 길을 찾아 돌아다니게 되는데 갈 길을 돌보아 주는 게 소위 말하는 49재입니다. 그런데 49재 예배를 드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도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 무서운 것으로 봅니다. 왜 사망을 주께서 이기셨는데 죽는 것이 그렇게 두려울까요? 이것은 샤머니즘의 영향입니다. 샤머니즘은 죽음을 한이 있다는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죽게 되면 죽음의 살이 끼어 다른 사람까지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는다는 것이 이승의 해방이나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는 죄의 대가라는 부정적 이 미지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문화가 기독교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우리도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한국은 정으로 맺어진 사회인데 죽음은 더 이상 고인을 볼 수 없다는 너무나 큰 고통을 주게 됩니다. 이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부중 한 분이 돌아가시면 1년 안에 다른 분이 돌아갈 확률이 60%가 넘습니 다. 그것은 심리적인 애틋함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말기 암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편지글을 보았는데 죽은 남편에 대한 애틋함이 배어 있는 글입니다. 몇 구절을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어느 날 속절없이 떠나 당신을 찾아갑니다. 산허리 돌아 돌아 당신을 찾아갑니다. 두 평 남짓 좁은 곳에 당신 둥지 틀어 내 자리 옆에 놓고 앉아봅니다. 잔디 푸릇푸릇 당신 앞에 마주앉아 눈물로 푸념 늘어놓고 맥없이 잔디만 쥐어뜯고 웁니다. 직장간 은영이가 돌아옵니다. 문 열면서 아빠가 보고 싶다고 울음 쏟으면서 들어옵니다. 보고 싶다는 말로도 안 되는 엄마는 어쩌랴 같이 붙잡고 울음 웁니다. 골목길 올라오면서 내내 아빠 부르며 왔나봅니다. 아무 것도 원망 할 수 없는 내 일상에서 외로움에 무뎌져야 하는 내 가슴은 어제도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갑니다. 잘했어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거야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속의 거짓말이었습니다. 무뎌질 수도 영글 수도 없는 나의 지금의 일상입니다. 금방이라도 오토바이소리 들릴 것 같아 이 밤에 가만히 문 열고 길게 목빼서 담장 너머 내 다봅니다. 싱긋 웃어주던 당신은 없습니다. 그냥 문닫고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천장만 바라봅니다. 누르는 그리움에 침도 삼킬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두눈 감고 당신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내 운명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딸아이 결혼식 때 큰맘먹고 해 입은 양복 안주머니 속엔 당신이름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끌어안아 코끝을 대면 아직도 당신의 체취가 묻어 나오는데 당신은 정말 떠난건가요. 당신은 아직 잊혀진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물어도 당신 이름을 대야 압니다. 전화를 해도 당신의 이름을 대야 압니다. 우리 집 문패도 당신이름 그대롭니다. 나는 당신이 잊혀질 때까지 살아야 합니까? 당신이나를 잊어버리는 것이 빠르겠지요,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테니까!\" 그래요! 이분이 믿음 없으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였겠습니까? 아니오! 믿는 자들도 슬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관예배를 드리는데 우니까 운다고 혼내는 분이 계셔요! 그냥 나두세요, 그것은 슬픔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그리움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의 고통을 본문 시편 6장 5절을 보면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 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죽는데 감사할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없겠습니까? 아닙니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 없는 분들은 그냥 죽습니다. 그러니 한이 남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즐겁게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가려고 대기표 받은 즐거운 사람들입니다. 14:13절을 보면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죽음이 두려운 존재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첫째 죽음 후에 더 좋은 곳이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헨리나우엔이 쓴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대화하는 이란성 쌍둥이 이야기입니다. \"나 말이지 태어난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어\" 동생이 말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여긴 어두워도 따뜻하지, 또 우리를 먹여주고 살려 주는 탯줄만 잘 붙들고 있어\" 그러나 여동생은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캄캄한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거야. 환한 빛이 있는 곳이 반드시 있을 거야\" 그러나 오빠를 설득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르자 여동생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답니다. \"말해줄게 있어 오빠는 안 믿겠지만 난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자 쌍둥이 오빠는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쳤습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난 엄마를 한번도 본적이 없 는데 이곳이 전부라니까\" 우리는 압니다. 더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천당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런 신나는 곳이 있다는 것을 믿고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입니다. 히9\"27절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우리는 누구나 죽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용서와 사랑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혼자 죽지 않고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처럼 지겨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죽는데 자기 혼자 죽지 않는다고 기뻐하는 것이 참 기쁨이겠습니까? 우리의 대부분의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고 내가 좀 잘났다라는 기쁨입니다. 저는 아직 초보 테니스 실력입니다만 배운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게임을 이겨서 기뻐했습니다만 요사이는 확실히 내가 테니스를 치고 즐기고 있다 는 것이 기쁩니다. 4명이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가니 기쁜 것입니다. 누가 먼저 가고 늦게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옆 사람 앞사람 뒤 사람 다 함께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죽음이 정직합니까? 옛날에 땅 따먹기 놀이가 있었습니다. 마당 앞 땅을 네모 칸을 그어서 세 번 튕겨 들어오면 자기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이하면서 목숨을 놓고 싸울 때 도 있었죠, 그러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면 어머니가 부릅니다. 그러면 땅 때문에 죽겠다가 싸우다가 돌멩이를 버리고 서로 자기 집을 향해 저녁밥 먹으로 뛰어 들어가던 일이 기억 납니다. 우리는 결국 늙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죽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함께 가야 할 죽음!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하십시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짧게 사는 인생!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함께 인생을 걸어가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는 죽음후에 남길것이 무엇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이 시간 유언장을 쓰신다면 무엇이라고 쓰시겠습니까? 숨겨놓은 적금을 찾으라고? 이 세상에서 잘 살라고? 공부 잘 하라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하신 유언의 말씀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죽음의 목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요16:5 이하를 보면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지 않을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 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죽음과는 상관없는 말씀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맞이하신 방식은 우리에게 희망적인 본보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것은 성령이 오신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유익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고 나서 살게 되었을 때 이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요11장 42절을 보면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 그랬다고 하는 거예요. 사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 후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에 대해선 예수님도 실패입니다. 겨우 3년만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그 때부터 교회는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 후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선 후에 베드로의 발을 씻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13: 7 \"나의 하는일 것을 네가 이제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온전한 의미는 죽음 이후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 앞에서 던지는 참된 질문은 \"내가 여전히 얼마만큼 성취할 수 있는가?\" \"혹은 여전히 얼마 만큼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가족과 친구를 떠난 뒤에도 계속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돈 많이 남겼다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셔요\"아! 그 집사님 살아 계실 때 이랬는데..\"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잠깐 왔다가 없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나니 더욱 멋있게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이번 세미나를 갔다와서 작심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을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키워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교회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죽어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11:25-26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두려워 할 것은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은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느냐?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 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