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축복 기도

구약의 축복기도
민6:22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이 『문 닫고 나가』라는 말과 실컨 싸우고 『잘 먹고 잘살아라』고 복을 빌어주는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자원도 없고, 땅도 작은 이 나라가 유구한 역사동안 찬란한 문화를 유지해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큰 나라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貴티와 貧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자연히 궁색한 모양이 되어집니다. 요즈음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면 왜 그렇게 꾀째재하게 보이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불과 3, 40십년 전에 그들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요즈음 아이들은 코를 흘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난에 찌들었던 그 시절에는 코가 어떻게나 흘렀든지 코밑이 헐 정도였습니다. 국민학교 입학하면 으레 큰 손수건을 가슴에 달아 줍니다. 그런 시절에 우리네 어머님이나 할머니는 치마가 곧 수건이었습니다. 어머님이나 할머님의 치마는 추울 때는 이불도 됐다가 급하면 보자기 역할도 했다가, 손자나 아이들을 만나면 코 푸는 걸레가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다목적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치마를 갖다대고 『흥해라』 고 합니다. 선교사들이 깨달은 바는 바로 『흥』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코를 풀리면서도 『흥』하라고 복을 빌어주는 민족이기에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왔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 해석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민족은 성격상 모진 민족이 아닙니다. 정 에 살고 정에 죽는 민족이 우리 민족입니다. 귀성전쟁을 치르면서도 고향을 다녀와야 일이 손에 잡히는 민족이 우리 민족입니다.

어느 민족보다도 우리는 福을 좋아합니다. 봄이 오면 대문간에 笑門萬福來를 크게 써 붙이고, 대보름에는 복조리를 만들어 집안에 걸어 둡니다. 한복, 이불, 숟가락, 심지어는 기왓장에까지 福자를 새깁니다.

신약의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신약의 축도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구약의 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祝禱』란 『복을 빌어주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신약의 축도는 잘 알고 있지만 구약의 축도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목사님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도 잘 안 하실뿐만이 아니라 축도 하실때에도 신약의 축도문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길이는 다르고 형식은 달라도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일일이 비교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빈다는 것은 차이가 없다는 것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사장의 특권으로 빌어 주는 정말 귀한 축복기도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 보십시다.

첫째-축복은 제사장의 특권이었습니다. 22절에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복은 아무나 비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자가 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을 빌어줄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직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그의 신분이 존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성부의 복, 복 주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고 착각합니다. 복 주시는 분이 누구인줄을 모르기에 우상에게 복을 달라하고 자연물에게 복 달라하고, 조상에게 복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복을 주시고 지킬수 있는 분은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 당시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이 불분명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서툴러서이지 사실은 복을 주시고 지키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 분은 능력이 있고 힘이 있으며 능히 우리를 지키실수 있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지켜 주심을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의 압제에서, 홍해 앞에서, 광야에서, 풀무불 속에서, 사자굴 속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 받았던 체험이 있었기에 그들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121:4』라고 고백하며,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눈동자와 같이 지키셨도다 신 32:10』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셋째-성자의 복, 은혜의 복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성자의 복은 값 없이 주시는 『은혜의 복』입니다. 은혜란 『카리스, χ?ρι?』 『값없이 준다』는 뜻입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그의 영광, 그의 존귀, 그의 자존심, 그의 육체, 마지막 남은 옷 한 벌까지 다 주셨습니다. 은혜 받은 자는 받으려 하지 않고 주려고 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몸 바칩니다. 은혜를 깨닫는 자, 은혜를 아는 자는 절대적으로 주는 자들입니다. 은혜를 알고 은혜를 깨닫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었으면 그 즉시 잊어버리고, 받았으면 죽을 때까지 잊지말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의가 그 반대입니다. 준 것은 안 잊고 받은 것은 즉시 잊어버립니다.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소유 개념이 없어집니다. 은혜를 받으면 바보가 됩니다. 삭개오, 향유 부은 여인, 변화산의 베드로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은혜 받으면 계산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은혜 받으면 문제될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 떨어지고 나면 문제 안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봇물처럼 쏟아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를 알고 은혜를 깨달읍시다.

셋째-성령의 복, 평강의 복입니다. 모든 복중에 최대의 복은 『평안의 복』입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도 위장병으로 먹지 못한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요? 반대로 꽁보리밥에 날된장, 풋고추가 반찬의 전부라고 하더라도 밥 한 그릇 뚝딱하는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까?

평화를 깨는 최대의 적은 욕심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교통』에 있습니다. 교통은 오고가는 것입니다. 막힌 것을 교통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마음이 막히지 않고, 말이 막히지 않고, 영이 막히지 않고 탁 트여집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 한 사람을 만나면 시원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흐르는 물과 같이 정체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교통은 상대가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깁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강은 힘에 압도되어 숨을 죽이고 있는 고요함이 아니라 폭풍우 치는 절벽 뒤에 곤히 잠들 수 있는 아기 새의 평화입니다. 환경이 빼앗을 수 없는 평강 주안에서 누리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가 이 시간 여러분들 위에 임하기를 원합니다.

네로는 로마의 이름난 폭군이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죽입니다. 산채로 불에 태워 죽이기도 하고,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게도 하고, 십자가에 매달아도 죽였습니다. 폭력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폭력은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초월해 버린 자에게 폭력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폭군 네로가 두려워한 것은 그들은 죽으면서도 웃는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죽일 수 있어도 그들의 마음속에 평화는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평화를 가진 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입니다.

결론입니다. 이 시간 성부의 지키시는 복, 성자의 은혜의 복, 성령의 평강의 복이 저와 여러분들 위에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