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고통을 넘어서는 기쁨 (요16:16-24) (483장)
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제자들은 큰 슬픔과 근심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그들에게 기쁨이 더욱 클 것이라는 소망을 주십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무엇이든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떠남의 슬픔, 재회의 환희 (16:16~22)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제자들은 큰 감정적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사실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면 보지 못하겠으나 다시 잠시 후에는 볼 수 있으리라’(16절)는 말씀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일을 도모한 세상에는 기쁨이 되겠지만 제자들에게는 애통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애통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말할 수 없는 환희로 바뀔 것입니다. 산모가 새 생명을 보는 순간의 큰 기쁨으로 해산의 고통을 말끔히 잊어버리듯,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22절)라는 말씀은 부활의 사건을 넘어 성령의 강림까지 염두에 둔 이중적 암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슬픔은 큰 기쁨을 전제합니다.
고장 난 장난감을 가지고 아이가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이젠 필요 없어, 다른 것 사줘\"하고 집어 던졌을 때 이때 엄마가 금방 새것으로 사준다면 그 아이의 잠재의식 속에는 모든 문제를 안 되면 쉽게 포기하고 다른 것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반면 엄마가 그것을 고쳐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했다면 그 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놀면서 \'내가 슬퍼하던 문제가 엄마의 손에서 다시 기쁨으로 바꿔질 수 있구나\' 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근심의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서 기쁨의 문제로 바꿔 주시는 분이십니다. 근심의 사람을 기쁨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시고 육신의 사람을 \'너 쓸모 없어\'하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쳐서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제자들과 같이 여러 종류의 근심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부간의 불화로 가족모두의 근심이 되기도 하고, 직장을 그만둬야하는 위기에 근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근심과 염려와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어떤 것이 여러분에게 근심을 가져다주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여러분의 맘을 흔들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근심의 문제가 도리어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그들의 근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요한복음 16:5-6절에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굴색이 변하고 맘에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도대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는 말씀이 무엇이뇨,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은 무엇이뇨\" 하고 서로 문의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왠지 불안해했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근심\'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의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전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그것은 육신적으로 큰 고통의 문제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그 고통의 정도가 곡하고 애통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애통해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같이 옷 벗기시고 수치와 조롱을 다 당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위에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곡하고 애통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들은 십자가의 고통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맘이 무디어 졌습니다. 하나의 지나간 사건으로만 기억하고 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은 애통할 것인데 \"세상은 기뻐하리라\"는 것입니다. 요15:18-19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지실 때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곡하고 애통해 했으나 마귀는 자기세상이 온줄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마귀의 권세인 죄와 사망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이라면 십자가는 또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결정적인 승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은 조롱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더니 꼴 좋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하고 패배한 것 같으나 궁극적인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요16:33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도리어 기쁨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 곁을 떠나셔야만 했을까요? 왜 우리들에게 삶에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걸까요? 오늘본문에는 21절에 보니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통해 비유로써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그 첫 번째 이유는, 잠간의 근심과 고통이 위리에게 기쁨을 더해주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새 생명을 낳기 위한 예수님의 영적진통이었습니다. 이 고통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 모릅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애 낳아봐야 그 고통 말할 수 있다고-\' 아내들이 큰소리 칠 때가 이때인 것 같아요.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가 누릴 부활의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마귀의 핍박 속에서 살아가지만 십자가 뒤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주님처럼 십자가지고 영적해산의 고통을 능히 감당케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가셔야만 했던 이유는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6:7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보혜사가 오시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시려고 떠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우리 속에 영원토록 거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면 그는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 연약할 때 우릴 도우십니다.
세 번째 이유는,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22절 말씀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너희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세상의 기쁨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기뻐하고, 남의 기쁨을 빼앗아서 기뻐하고, 속여야하고, 쾌락을 날마다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 기쁨은 잠깐입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마침표는 죽음이요 심판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릴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도, 알 수도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우리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의 근심을 세상의 것들로 대체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오신 성령을 통하여 신령한 기쁨으로 변화 시켜 주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주님은 \"조금 있으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어떤 근심이 문제가 있습니까? 삶에 어떤 아픔이 있습니까?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조금 있으면\"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줄 믿습니다.
요 16:23a :우리는 심장이 뛸까 말까, 우리 머리카락이 자랄까 말까를 묻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육체의 생명의 법칙이 그 모든 것을 행하게 하는 까닭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그 참 생명 속에 거하는 사람에게도 더 이상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 없어집니다. 주님의 그 영원하신 생명, 그 온전한 생명의 힘과 법칙이 우리를 친히 교정하고 바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게 있는 슬픔과 근심에 어떤 기쁨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까?
6.다가오는 핍박 드러날 영광(요 16:1-15) 417장
예수님이 사람들의 핍박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후에 오실 보혜사 성령님은 죄와 의, 심판에 대해 모든 것을 밝혀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성령 가운데 모성적인 일을 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모성적인 성령이 보혜사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뜻은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인데, 본문에 이러한 보혜사의 하는 일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번역을 달리 번역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눈을 떠서 새로운 것을 보게 합니다. 그 새로운 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실 시간을 얼마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사와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제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해서, 예수께서 하셨던 일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되어야 하겠기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중요한 내용은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과 그 보혜사가 오셔서 할 일에 대한 것입니다. 보혜사가 할 일로 죄·의·심판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의미한 사건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교회가 굳게 서 갈 수 있고, 복음이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고 능력 있는 복음으로 선포될 수 있습니다.
보혜사가 하는 일이 눈을 뜨게 하는 일이라고 할 때 여기서 뜨게 한다는 것은 태어남·자람·깨어남·갱신의 뜻이 포함됩니다.
먼저 보혜사는 존재의 새로 태어남을 통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과 우리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하며, 우리의 내적 실체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씨앗을 주며, 우리 안에 새로운 나를 세우며,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삶의 현실을 갱신시킵니다.
보혜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다시 태어남은 하나님의 미래의 희망 속에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초인적 인간, 현세의 인간의 경험들을 초월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고난의 면제도 아닙니다. 그리고 아울러 희망과 함께 인간으로서 사랑과 고통, 삶과 죽음을 다르게 경험해 가게 됩니다.
보혜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다시 태어남은 자연 속의 봄을 연상케 합니다. 즉 모든 나무들과 식물들의 푸르름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이 다시 태어남은 영원히 사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과 시간의 만남입니다. 그 다음으로 보혜사는 다시 태어나게 함과 함께 자라게 합니다. 다시 태어남은 자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에서 도덕적 완성을 그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됩니다.
믿음에 있어서 성장은 인간의 삶에서 생의 계절에 상응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연령층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의 하나님 인식, 청년의 하나님 인식, 부모와 직업인의 하나님 인식, 노인층의 하나님 인식은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인식은 인생의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유아 시절의 하나님 인식은 신화나 동화에 등장하는 신비스러운 할아버지와 같은 분인데 그러한 하나님 인식은 교회에서 주일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많은 동화를 통해 형성된 하나님 상이었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의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 이야기,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저에게 신비스러운 세계에 대한 많은 상상을 갖게 했습니다. 한편 그 이야기는 어린 시절 저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훌륭한 인물에 대한 동경 가운데서 기독교 성인들의 전기를 통해서 제가 만나게 된 하나님은, 유년기 때와는 달리 거룩한 성인의 상으로 저의 마음에 간직되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상은 청소년기의 유혹을 극복해 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정신적 방황과 고뇌 가운데서 하나님 인식은 고뇌하는 인간 실존에 개입하셔서 거듭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시는 도덕적인 하나님이었습니다. 생의 각 계절에서 달리 이해한 하나님은 각기 다른 분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의 삶에 현존해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단지 다른 생의 계절에서 부분적으로 경험한 하나님 인식의 파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생의 계절이 바뀜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새롭게 눈을 떠가도록 인도한 분이 보혜사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 없이 저는 저의 생의 변화와 함께 찾아오는 많은 생의 문제를 극복해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혜사는 생의 변화 과정 가운데서 진리의 뜻을 새롭게 조명하고, 재 구성시켜 믿음이 보존되게 합니다. 역시 보혜사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세워 가고 보존해 가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보혜사는 우상의 허구에서 깨어나게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그의 내면에 미개인이 있습니다. 옛날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인간의 직관만이 사용되었던 시기에는 이 미개인에 의해 인간의 삶 전체가 지배되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변은 전부 어떤 신비스러운 힘을 가진 신들의 조작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빌기도 하고, 산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큰 바위나 나무에게 안전을 기원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인간의 운명이 그 어떤 변덕이 많은 신적 존재의 수중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종족의 안전을 위해 알 수 없는 변덕자를 달래고 무마시키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바쳤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연현상의 변화나 천재지변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미개인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인격 깊은 곳에 숨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미개인은 그 무엇인가 의지하고 붙잡는 것이 없으면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과학의 시대에 합리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도 불안하기 때문에 생의 깊은 소외감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신뢰의 대상으로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우상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재물을 가진 자나, 지식인이나 배우지 못한 자나 모두 우상이라는 허구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우상들은 이데올로기·돈·명예·성공·성·권력·인기 등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이러한 우상의 허구를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은 매우 지성적인 사람으로 합리적 사고를 한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실존적 불안이 더 크고 생의 소외감을 더 깊게 느끼게 됩니다. 특히 생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불안은 더 커집니다. 오히려 우매한 사람은 하늘을 믿던가 별이나 해, 달 같은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지적인 사람만큼 실존의 불안을 덜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은 인간을 우매하게 만듭니다. 우상은 눈을 어둡게 해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상은 허구의 유토피아를 지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보혜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미개인의 눈을 뜨게 해서 진정 의지하고 신뢰하고 섬겨야 할 대상을 바로 보게 하고, 인간의 인격에서 분리되어 있는 합리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을 통합시킵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 오랜 옛날인데도 그들은 우주 삼라만상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것을 통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보혜사는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향락과 쾌락의 우상에 사로잡혀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현실을 넘어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본다는 것은 보혜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참된 비젼은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을 넘어서 볼 수 있게 하고 현실에서 그것을 위해 창조적 활동을 하게 합니다. 그 비젼은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젼은 보혜사를 통해 갖는 새로운 안목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은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의 세계밖에는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으로 가득 찬 그 시대에서 소아시아 각 지방을 다니면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우상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보혜사는 인간이 우상의 허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보혜사는 본래의 뜻이 인간을 어두움에서 빛이 있는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말에 일치합니다.
끝으로 보혜사는 우리를 갱신시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배터리가 다 소진되면 더 이상 목적한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때는 배터리를 재충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우리의 삶을 계속 고갈시키고 소진시키기 때문에 영적 충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갈 때 창조적 삶은 불가능합니다. 영적 고갈은 허세·과장·수다스러움·절망·비관을 느끼게 합니다. 생을 어둡게 단정 지어 가게 합니다.
보혜사는 우리에게 참된 힘을 공급해 줍니다. 그 힘은 창조력· 어두움을 이길 수 있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믿음·희망·사랑입니다.
보혜사는 우리를 갱신시키기 위하여 매개체를 사용합니다. 어떤 때는 조용한 장소, 어떤 때는 좋은 신앙 서적, 깊은 기도, 영적인 교제, 선포되는 말씀, 예배, 성만찬 같은 매개체를 이용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갖고 다시 세상에 나아가서 힘 있게 살아가게 됩니다. 보혜사 자신이 신비스러운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혜사는 우리를 그러한 길로 인도해 갑니다.
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에게 조그마한 격려와 위로를 주어 생을 다시 시작하게 한 사람이 있어도 평생에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시작이 있게 했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고, 우리를 깨어나게 하고, 우리를 갱신시켜 가는 분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보혜사가 바로 우리에게 그러한 분입니다. 그는 우리를 영원한 곳으로까지 인도할 것입니다.
보혜사는 하나님의 희망의 계획 가운데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창조적 일을 수행해 갈 것입니다. 그 창조적 일이란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 자라게 하는 일, 깨어나게 하는 일, 갱신입니다. 우리 역시 보혜사와 함께 매일 매일 그 일에 동참해 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새 창조에 동참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절묵상: (요 16: 7) 우리가 소망을 걸고 있는 분이 우리를 떠나실 때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우리가 그분을 더 깊이, 더 풍성하게 알 수 있도록 다시 영으로 돌아오실 계획이 없었다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크리스 티그린/ 복음주의 작가
나는 늘 깨어 기도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하나님을 향한 그릇된 열심 때문에 믿는 자들을 어렵게 만든 경우는 없습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불순종의 삶이 순종의 삶으로 변화됨을 믿습니까? 내 영혼은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5. 잔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요2:1-12) (찬송가: 96장)
예수님의 손은 전능한 손
옛날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은 우습게만 느껴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은 과거 신문에 실렸던 내용들입니다. “시속 30마일로 여행하면 누구나 질식하고 말 것이다”(1840년). “인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기계 조립은 불가능하다”(1901년). “달에 가겠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1926년).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이 모든 일들이 지금은 다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생각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기적은 우리 안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기적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필립 얀시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심지어 우리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안에 계신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고 있습니까?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얼마나 크고 능력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십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모두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가리켜「표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표적」이라는 말은『요한복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용어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적이라고 소개하거나 그냥 능력 혹은 권능이라고 했는데,『요한복음』에서는「표적(標蹟)」이라는 좀 생소한 말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사건을『요한복음』에서만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표적이란 말의 뜻은, 사건은 사건대로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의미보다는 그 사건 속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건 자체가 뜻을 전달하는 하나의 언어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본문의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인가?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듯이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목적, 즉 주제(主題)가 있는 것이다. 그 해답은 본문 11절에서 밝힌 대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신가를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표적을 행하셨다. 이 표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나아가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해 가나 혼인 잔치집에 가신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그들로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공식적인 자리에 취임하여 처음에 하는 일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앞으로 그 사람이 할 일과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처음으로 보여주신 사건은 가나 혼인잔치에 참석하셔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비난한 것처럼 술을 즐기고 포도주를 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데리고 먹고 마시는 잔칫집부터 가신 것이었겠는가?
성경에 보면 포도주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술 취해서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경고를 하고 있지만, 포도주는 늘 기쁨과 환희에 대해서 상징적인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 시편 104편 15절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전도서 10장 19절에서는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성경에 나오는 술이나 포도주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첫 번째 이적을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가? 거기에는 기쁨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잔치집은 모든 것이 풍성하다. 거기에는 음식도 많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웃음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잔치 집의 풍성함과 기쁨이었다.
기독교는 잔치 집과 같은 종교이다. 흔히들 교회라고 하면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예배 중에는 몸이 굳어지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경건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가르치는 종교요, 그러기에 감사와 축제가 있고, 내일의 소망을 노래하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참회의 눈물이 있고, 엄격한 계율이나 절제의 생활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이적을 행하신 것이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을 가지시고 포도주를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혼인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사건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잔치를 회복시키시고, 기쁨을 회복시키시며, 기다릴 것이 있고 소망할 것이 있는 자로 우리를 고치시겠다는, 보다 깊은 뜻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비난하는 말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친히 당신을 혼인집 신랑으로 표현하시며,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라고 말씀하심으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즉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요 환희와 축제의 종교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즐거워야 할 잔치 집에 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포도주가 모자랐다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잔치하는 날,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의 주식이 양고기였는데, 이 양고기를 먹을 때는 반드시 포도주를 곁들여 먹었다. 그런데 잔치 집에서 주 음료인 포도주가 도중에 모자랐으니 주인 측에서는 얼마나 당황했을까가 상상된다. 어쨌든 잔치 집에 포도주가 부족한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께 의논하였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모자라면 주인에게 가서 이야기하던가, 연회장에게 이야기해야 옳은데도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보고를 한다. 신랑도 아니고 잔치 집 주인도 아니고 연회장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한 것은 전후 문맥으로 보나 마리아의 믿음으로 미루어볼 때 그것은 예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혹 이런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문제까지도 마리아는 지난 30년간을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경험한 바에 의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었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예수님께 이야기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의 문제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부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예수님께 아뢰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하실 수 있는 해결자요 능력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포도주 사건은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의논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어떤 일이든지 상식적으로 스스로 판단해서 포기하지 말고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예수님께 의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지극히 작은 문제까지도 관심을 가지시고 귀를 기울이시며 듣기를 원하신다. 상담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의논하며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오늘도 부족함이 없다. 비록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비록 건강이 부족하고, 비록 재물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할지라도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고 간증할 수 있다. 아쉬울 것이 없노라고 노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마리아가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말을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하셨는가? 4절 말씀을 읽어보자(요 2:4∼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우리들이 얼른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를 가리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말씀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씀은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는 말씀이다. 본래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여자여\'라는 이 말의 의미는 왕이 왕후를 부를 때 쓰는 용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 말은 여자에 대한 최고의 높임말로 쓰여진 것이었는데,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다보니 이런 문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훨씬 이해하기가 쉬운 줄 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리아의 태도이다. 5절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일단 순종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먼저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데서 문제의 해결이 있다. 이적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직선적이고도 특별한 은혜로써 사람들에게 은사로 주시는 것이지만, 이 은사를 받는 그릇은 나에게 있어야 한다. 그 그릇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순종이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졌다. 예수님의 표적은 아주 간단하게 나타났다. 오늘 본문 6절 이하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마침 그 집에 커다란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셨다. 하인들이 물을 떠다가 아구까지 물을 채웠더니 이제는 떠서 갖다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물을 떠다 부으면서부터 불평을 했을 것이다. \"아니 포도주가 없다는데 물은 왜 갖다 부으라고 하지?\", \"그것도 어느 정도 갖다 부었으면 되었지 무얼 하려고 이렇게 아구까지 채우라고 하실까?\" 하면서 수군거리며 투덜댔을 것이다.
그러나 하인들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항아리마다 물을 아구까지 갖다 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물을 떠온 하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그것도 보통 포도주가 아니라 아주 맛있는 고급 포도주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란다(요 2:9∼10). 이 사실은 처음부터 과학적인 사고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모르는 연회장이나 손님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연회장도 모르고 신랑도 모르는 그 사건을 누가 알았다고 했는가? 예, 물 떠 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다. 기적이란 이와 같이 순종할 때 나타나며, 믿을 때 나타나고, 말없이 봉사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수많은 이적 기사가 있지만, 거기에는 항상 그 기적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었고, 그 말씀을 받는 사람이 거기 또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였다. 오늘 우리들도 마리아의 이 말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는 말씀처럼 순종하여 기적을 체험하고, 능력을 받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풍성한가? 포도주가 넉넉한가? 아니면 문제가 있는가?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없나? 걱정하며 고민하는 일이 있는가? 예수님께로 나아오라. 그리고 \"주여, 나의 포도주가 떨어졌나이다\" 기도하시기 바란다. 신앙생활에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고, 오히려 힘이 드는가? 성령의 신령한 포도주가 없기 때문이다.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힘 있게 하는 성령의 포도주가 떨어진 증거이다.
예수님께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문제를 제기한 마리아와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한 하인들, 그리고 또 그 항아리에 부은 물을 다시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준 사람들, 모두가 기적을 가져오게 한 사람들이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잔치집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초청해서 함께 그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마리아의 믿음의 고백도 들을 수 있었고, 하인들의 순종도, 연회장의 기쁨도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곳에 안 계시고, 마리아가 아무리 믿음이 좋고 지혜롭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순종 잘하는 하인들이 부지기수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이런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무미건조하던 인생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발견하고, 맛없고 가치 없는 생애가 비로소 아름다운 빛깔을 나타내는 포도주와 같은 인생으로 변하는 줄 믿습니다. 진정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의 왕좌에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진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날마다 풍성한 삶을 살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은혜와 기쁨이 더하고 축복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가나 혼인 잔치집의 기적이요 축복이다.
예수 없는 사람들에겐 진정한 미래가 없다. 소망이 없다. 해가 갈수록 실망이 더하고 슬픔이 더하고 허무가 더하다.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초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모신 심령과 가정은, 주님께서 계시기에 처음보다 나중이 점점 더 좋아질 뿐 아니라, 날마다 주시는 은혜와 각양 은사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을 살고, 훗날 우리 주님과 함께 햇빛보다 더 밝은 저 천국에서 살게 될 줄 믿는다. 나의 삶에서 가장 깊은 갈증을 느끼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삶의 필수 요소가 바닥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나의 삶은 예수님께서 만들어 내신 맛있는 포도주의 활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혹시 빈 항아리처럼 고갈된 상태는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진리 안에서 제 생을 새롭게 빚어 주시길 원합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진 제 삶이 가정과 일터, 사회를 새롭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4. 복음의 릴레이가 시작됩니다(요1:35-42) (391장)
오늘의 말씀 요약: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들은 그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좇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가서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시몬에서 게바라 고쳐 주십니다.
게바라 하리라(42절)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사명을 주심을 의미한다.
두 제자를 보내는 세례 요한 (1:35-39)
본문에서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특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제자가 다른 지도자에게 가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기보다 큰 분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냅니다.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또 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으면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소개하는 요한복음의 기록자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고, 또 다른 한 제자는 요한복음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이 두 제자를 움켜쥐고 예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요한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람’이라는 칭찬은 이 일에도 적절한 것 같습니다(눅 7:28).
시작되는 그리스도 증거의 고리 (1:40-42)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을 소개받은 안드레는 바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았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형 시몬에게 이 귀중한 발견을 전하고 그를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초대 교회의 핵심 지도자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게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십니다. 게바는 ‘바위’ 또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이름의 뜻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베드로”(페트로스)입니다. 메시아는 이처럼 계속 이어지는 증거의 고리를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랍비, 메시아, 게바’ 등의 아람어와 히브리어가 계속 헬라어로 번역되어 표현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이는 본서의 주 독자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히브리권에서 헬라권으로 번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희생의 믿음
장애가 있는 사람을 상점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5킬로미터 정도를 운행하거나, 고통을 겪는 부부를 야외로 데리고 나가 식사하기 위해 한가한 주일 오후를 희생하는 것 같은 사소한 일들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희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당신의 기쁨을 방해할 수도 있고 믿음을 깊게 할 수도 있다. 만약 자기 포기와 희생정신을 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회나 상실감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다. 존 칼빈은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무거운 짐, 아니 ‘죽음과 연관된’ 짐처럼 여겨졌던 진리들이, 실상은 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는 결코 ‘평범한 위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동참하도록 초청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기 때문에 그 신앙 안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제일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할 때까지 그리고 우선순위를 올바로 설정할 때까지,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가끔 하나님께 괴로움을 느끼거나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희생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우리가 여기 있다는 마음 자세만 가진다면, 다른 모든 것은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상 주시는 믿음」/ 게리 토마스
한절묵상: 요1:38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은 주님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교회를 다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떡을 위해 예수님을 찾다가 나중에는 전부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좇는 사람은 결국 떠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예수를 좇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의 사심(私心)을 넘어서는 큰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혹시 내 속이 좁아 대의(大義)를 놓치는 경우는 없습니까? 이 증거의 고리를 이어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나는 이 증거의 바통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두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라고 물어 셨습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고전 1:22절 이하의 말씀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의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자 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 기적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반드시 기적이 있어야 하고 기적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실 때는 두 가지 기적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하나는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이었고 하나는 모세의 손에 문둥병이 발했다가 깨끗하게 낫는 기적이었습니다. 그 모세는 애굽에 가서도 하나님 살아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리게 한 사실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걸어갈 때도 순간순간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 걸어갔습니다. 저들은 늘 기적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생수, 만나, 메추라기, 단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을 추구하는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엔 반드시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뒤따라 다녔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고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고 풍랑이 잔잔해 지고 문둥병이 주님을 통해서 회복되는 엄청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 기적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굉장히 좋아 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지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기적을 찾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장애물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나무위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하였는데 십자가에 죽은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인류의 메시아가 될 수 있습니까?
유대 사람들의 율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가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일까요? 헬라의 철학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세계는 악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는 선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우리 몸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선하고 육신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은 육신의 감옥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을 괴롭히며 죽여야 영혼이 육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영의 세계를 동경하고 찾아 간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보이는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올 수 가 있겠습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더럽고 죄 많은 육신을 뒤집어 쓸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있습니까?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에겐 실로 어리석은 이야기였습니다. \" 유대인들은 표적(기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 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자 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렇습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또한 그것은 헬라의 모든 지혜를 뛰어넘는 구속의 지혜였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유대인중의 유대인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였으며 사울왕가의 후손이었으며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율법적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랍비였습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는 어릴 적부터 전통적으로 헬라철학을 공부하면서 자라온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기적도 지혜도 마다하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사도 바울은 그 예수그리스도가 너무 너무 귀했습니다. 너무 너무 좋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섬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인생을 걸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만을 따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그리스도만을 따르겠다고 외쳤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찾았는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찾습니까? 돈과 인기와 권력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추구하면 할수록 저들 가슴속에 공허한 여백을 메꿀 수 없어 갈증과 공허를 안고 지치고 쓰러져 갑니다.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시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현대인들은 가슴에 공허한 여백을 메우고자 저마다 샘을 팝니다. 그러나 그샘이 어쩌다가 돈의 샘이 됩니다. 권력의 샘이 됩니다. 인기의 샘이 됩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려 하나 가지면 가질수록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그 물을 마셔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돈과 인기와 권력은 참된 만족과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라고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여러분은 유대인들처럼 기적을 추구할 것입니까? 헬라인들처럼 지혜를 추구 할 것입니까? 현대인들처럼 돈과 인기와 권력을 추구할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나도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지혜를 추구하며 고상하게 살고 싶습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해서 큰소리치며 살고도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기를 받고도 싶습니다. 권력을 휘두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죽음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요1:29-34) 찬송가: 99장
오늘의 말씀 요약: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합니다. 또한 그분 위에 성령이 임함을 보고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 이를 증거하기 위해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난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1:29-30)
사람들이 보기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원칙으로 본다면 사실 예수님이 요한의 대선배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보다 먼저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입니다(8:58). 그래서 요한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 갇혀 들어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는 대속적 어린양입니다(사 53:6~7). 동시에 예수님은 출애굽의 구원을 상징하는 유월절 어린양입니다(19:31~37). 최고의 존재이신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주는 이 (1:31-34)
세례 요한은 자기보다 먼저 존재했던 성육신하신 예수님께 세례를 줍니다. 그때 요한의 눈에는 하늘에서 비둘기가 내려앉듯이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이 보였습니다. 요한에게는 일찍이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성령이 머무는 그 사람이 앞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받는 세례는 죄를 씻기 위한 회개의 표징이었으나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바로 직전에 언급된 어린양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를 갖습니다. 후에 바울이 해석한 것처럼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인류를 대표하는 죽음의 예식을 가지신 것입니다(롬 6:3~4).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며 죄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을 향한 삶을 구현시키십니다.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헌신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목표로 살아갑니까? 혹 나의 지위와 권리를 주장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날마다 내 안에 머무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 저의 죄를 대속하시고 새 생명 주심에 감사합니다. 제게 주신 새 생명으로 이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밀알이 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소개한 세례요한의 증거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로 유대 광야와 요단강을 무대로 하여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한편 땅에 떨어진 사회 정의, 도덕을 재건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한 선지자였습니다. 특히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그 분이라야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보다 먼저 출생했고 유대 민중들 앞에도 먼저 데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예수님을 앞세우고 증거했습니다. 30절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내 뒤에 오는 사람이란 나보다 늦게 출생했다는 뜻입니다. 즉, 나이가 손아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분이 나보다 앞섰다고 했고 나보다 먼저 계셨다고 했습니다. 마3:11절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막1:7-8절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증거 속에서 참 선지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주의 종은 예수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아비종은 예수님을 이용하거나 예수님을 팔아서 자기를 높이기 마련입니다.
세례 요한이야말로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인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 예수님보다 경험이 많다는 것, 예수님보다 추종자가 많다는 것,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 등 얼마든지 교만하고 거들먹거리고 예수님을 낮추고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조건들이 많았습니다만 요한은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어떤 분이 41일 금식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보다 하루라도 더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부흥사는 자신이 일생동안 동원한 집회 인원의 수가 예수님보다 많다고 떠들고 자랑합니다. 통일교 교주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실패자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을 낮추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간에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며 참된 주의 종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씀은 구약에 그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규례 가운데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 어린양이어야 하고 둘째, 흠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리다는 것은 물들지 않았다. 깨끗하다.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속죄를 위한 제물이 어린양이어야 하고 흠이 없어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흠도 없는 순결한 어린양이시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요한의 증거 속에서 몇 가지 뜻을 찾아봅시다.
1. 세상에는 죄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죄의 오염은 대기오염이나 환경오염과는 비길 수가 없습니다. 대기나 환경오염은 인간의 육체를 병들게 하고 환경을 파괴하지만 영혼과 인격과 환경과 세상과 가정 등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어디든지 죄가 있습니다.
2. 이런 세상을 위해 오신 예수님은 세상에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빌2장에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동등한 신분을 포기하고 자신을 낮춰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과 마주 앉아 구원얘기 영생얘기를 주고 받으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 그 예수님은 오늘도 세상의 예수로 살아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33년 동안 살다가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예수님이라면, 그래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예수님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역사의 현장과 사건의 현장에 직접 가셔서 직접 문제를 풀어 주셨고 사건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오늘도 세상의 예수로 나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인간은 짧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이 우리 삶에 있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윈 사람들의 고통, 남편과 아내 먼저 세상 떠나 보내는 슬픔, 자식들을 먼저 가슴에 묻어야하는 아픔, 시댁과의 관계, 친정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사이의 복잡 미묘한 관계들로 인한 어려움들, 사건, 사고 순간들 사업의 어려움, 직장의 갈등, 진학의 고민, 결혼의 위기 앞날에 대한 두려움들 머리가 쭈뼛한 순간들, 시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 속에 살아갑니다. 이러한 인간의 잡다한 삶 속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세상을 살아 계시고 있습니다. 문제 속에 함께 하시고, 아픔 속에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요한이 증거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곧 내 죄의 짐을 지고 가시는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내 슬픔, 고통, 절망, 좌절, 아픔, 질병, 죄, 내 죽음까지를 온통 걸머메인 예수님, 그분께서 순간순간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에게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세상의 예수 그분이 나와 여러분의 주님이심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2.좋은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렘29:11-20)
사람은 누구나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무수한 만남의 기회를 가지게 되고 우리의 삶은 이 만남을 통해서 결정되고 형성되어 나가게 됩니다. 물론 사람마다 타고난 고유한 본질이 있지만 그것은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개발되고 함양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도 좋고 재능도 뛰어난데 시대를 잘못 만나서 빛을 보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품이 고상하고 외모도 곱고 아름다운데 사람을 잘못 만나서 한평생 고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자기 자식이 친구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범죄와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되었노라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좋은 사람 만나서 인생길이 활짝 열리고 평안과 풍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모든 만남은 서로에게 풍요로움과 기쁨을 안겨줄 수 있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쁜 영향을 주는 만남은 멀리해야 합니다.
사람은 한 평생 동안에 네 번의 중요한 만남을 갖는다고 하는데 그 것은 부모님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네 가지 단계의 만남을 꼭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모든 인간들이 꼭 가져야 할 중요한 만남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만남이요. 가장 영광스럽고도 위대한 만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자기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끝내는 철저한 자기 한계의식을 깨닫게 되고. 아울러서 무분별한 욕망 추구에서 나타난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불안과 두려움과 허무감 속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무한하시고 절대적이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비로써 한계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 속에 들어가게 되며. 절제하지 못했던 자신의 욕망을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며. 지나간 날의 모든 죄악을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의 삶이 놀라운 변화를 얻게 되며. 새로운 차원의 삶의 단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완전 성결하시며. 영원무궁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며. 우리 인간들을 무한히 사랑하셔서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만남 자체가 은혜와 영광이요. 큰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나주신다
본문 말씀에도 보면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전심으로 찾고 찾는다는 말은 열심히 찾는다, 부지런히 찾는다,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찾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당신을 전심으로 찾고 찾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도 우리를 만나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써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며. 우리의 삶이 참으로 복된 삶이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아서 꼭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아 29장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편지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11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이 표현은 본문에서 자주 나오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니 순종하고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 그러므로 내 말을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12-14절까지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이제 바벨론의 포로에서 다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이방 문화에 젖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7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열방 중에서 저주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이유가 19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러한 환난은 누가 생각하던지, 재앙이었습니다.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는 그것이 재앙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렘29:11-14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전혀 다른 시각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이요 심판이라고 하는데 선지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재앙이라고 보는데 오히려 평안이요 장래에 더 큰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내일의 소망이다.
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말씀은 \"미래와 소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의 비슷한 말을 겹쳐 씀으로 하여 내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개정된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정확히 번역하였습니다.
11절 이하 14절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대하시는 하나님이시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복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희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밝은 앞날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재앙이라고 생각하면 재앙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망으로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시42:5에 \"내 영혼아 !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때리시는 중에도 결코 때리시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때리시는 것은 사랑하시기에 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렘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좋은 일을 준비하는 하나님은 기도를 원하고 있다.
12절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미래와 희망이 되십니다. 우리 성도들을 위하여 좋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에게 와서 기도하라고 하시고 그러면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허락 받은 은총의 선물이고, 내일을 준비하는 계획서요, 감추어진 비밀병기인 동시에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여는 만능키이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비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좋은 계획을 세우시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 없이 잘 되어지면 자기가 잘나서 된 줄 알고 교만해지는 것을 보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거룩한 소원을 두고 행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힘
기도는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는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입니다. 기도는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며 일방적이지 않고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 속에는 소망과 감사가 동시에 있습니다. 또 기도는 나만이 아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월남 전쟁이 치열할 때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전투 중에 일개 분대가 고지에서 고립되었습니다. 산 속에는 거의가 길도 없고 가시덤불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래서 작전 할 때면 헬기로 고지에다 렌딩시켜 주고는 합니다. 일개 분대 14명이 고지에 고립되어 식량과 물이 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거의가 탈진되어 자칫하면 모두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참고로 사람은 사십 일간 음식을 먹지 못하면 살 수 없고 물은 삼일 간 마시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호흡은 8분을 버틸 수 없습니다. 그 때 마침 대원들 중에 군목(군인목사)도 함께 있었습니다. 군목이 자기의 수통을 열어보니 물이 약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물로는 대원들의 목을 축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군목은 잠시 눈을 감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린 다음 자신부터 물을 마시고 돌려 줄 터이니 모두 나누어 마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부터 꿀꺽 꿀꺽 마시고는 돌렸습니다. 대원들도 모두 소리 내어 꿀꺽 꿀꺽 마시고는 돌려졌습니다.
이윽고 그 수통은 군목에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군목이 수통을 들여다보니 이상하게 물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사실은 군목이 먼저 물을 마시는 척 하면서 목구멍으로 소리만 꿀꺽 꿀꺽 낸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대원들도 모두 물은 마시지 않고 소리만 꿀꺽 꿀꺽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이후부터 모두가 목이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들은 그렇게 거의 이틀을 버티고 있다 마침내 구출되어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힘은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만일 기도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기도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항상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믿음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고달픈 십자가를 무겁게 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십자가가 마치 그분의 선물인 양 감사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래서 행복합니다.
돈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요 건강하다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감사할 줄 알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축복은 감사의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병들어도 은혜로우며 가난해도 감사드리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분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감사할 것이 없다고 해도 감사하다고 외쳐 보십시오. 믿음의 축복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꿈을 꾸면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여 부르짖으면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들으신다고 하셨고, 호소를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은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인 헨리 드러몬드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서 보낸 10분은 전 일과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루를 보람 있고 훌륭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까? 하루를 시작하면서 10분간 엎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헌신하라고 하신다.
렘29:13-14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좋은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 주시지 아니하시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간절함을 원하고 있습니다. 간절할 때에 무엇인가 이루어지지, 뜨뜻미지근하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만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만다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만나주신다는 신뢰심도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 좋은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내일의 소망이십니다.
두 번째 좋은 일을 준비하는 하나님은 기도를 원하고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 좋은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헌신하라고 하십니다.
간절히 찾아 만나라고 하십니다. 바른 신앙으로 회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참 좋으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하고 있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속에 뛰어 드시고, 그 뜻을 이루어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절에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 찌어다” 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기간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벨론에서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죄악의 자리에서 떠나고, 세상의 자리에서, 정욕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또한 안일한 자리, 나태한 자리에서 떠나 본향을 향한 순례의 길을 계속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본향을 향한 순례자의 삶입니다. 바벨론의 정착화의 위기에 빠져 안주하지 말고 나아가야 할 것이며 특별히 십자가의 순례의 길에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순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교인이 사순절을 맞이하여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좋은 일을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깊이있게 만나시고 작정한 기도의 헌신과 함께 응답을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귀한 글을 소개합니다.
3월 (이젠 다시 사랑으로) -이해인
아직은 빈손을 쳐들고 있는 3월의 나무들을 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경건한 기도를 바치며/
내가 나를 타이르고 싶습니다.
죄도 없이 십자나무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억하며/
가슴 한 켠에 슬픔의 가시가 박히는 계절
너무 죄가 많아 부끄러운 나를 매운바람 속에 맡기고/
모든 것을 향해 황해와 용서를 청하고 싶은 은총의 사순절입니다
호두껍질처럼 단단한 집 속에 자신을 숨겼던 죄인이지만/
회심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슬퍼하지 않으렵니다.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말하지 않으렵니다.
우리 모두 나무처럼 고요히 서서 많은 말을 줄이고/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해주십시오.
나무처럼 깊숙이 믿음의 땅에 뿌리를 박고/
세상을 끌어안되 속된 것을 멀리하는/ 맑은 지혜를 지니게 하십시오.
매일의 삶 속에 일어나는 자신의 근심과 아픔은 잊어버리고/
숨은 그림 찾듯이 이웃의 근심과 아픔을 찾아내어/
도움의 손길을 펴는 넓은 사랑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현란한 불꽃과 같은 죄의 유혹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아온 날들, 기도를 게을리 하고도 정당화하며/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서 절제가 부족했던 시간들, /
이웃에게 쉽게 화를 내며 참을성 없이 행동했던/
지난날의 잘못에서 마음을 돌이키지도 않고/
주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진정한 뉘우침도 없이 적당히 새날을 맞으려고 했던/
나쁜 버릇을 용서하십시오.
이젠 다시 사랑으로 회심할 때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교만에서 겸손으로
불목에서 화해로 증오에서 용서로/
새로운 길을 가야 하지만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항상 멀기만 한 길입니다
이젠 다시 사랑으로 마음을 넓히며/
사랑의 길을 걷게 해주십시오.
오직 사랑 때문에 피 흘리신 예수와 함께/
오늘을 마지막인 듯이 깨어 사는 봉헌의 기쁨으로/
부활을 향한 사랑의 길을 끝까지 피 흘리며 가게 해주십시오.
아직은 꽃이 피지 않은 3월의 나무들을 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도하며/ 보랏빛 참회의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3월은 \'희망\'입니다./
3월은 \'사랑\'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날마다의 삶이 \'감동적이며 환희의 날\'이 되게 하소서!
1.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조건(요 15:11-17)
하나님은 인생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축복스러운 이름들을 주셨는데 그것은 가정의 경우 아버지, 어머니, 아들과 딸, 형과 동생, 누나, 오빠 같은 이름들입니다. 이런 이름들이 가정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선생님, 제자, 선배, 후배, 교수, 학자나 박사, 사장, 회장 등등의 이름인데 그 중에는 ‘친구’라고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친구라는 말은 사회적 피조물로서의 인간 상호관계를 성립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이름입니다.
런던 타임즈가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현상 모집을 한일이 있는데 이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1, 2, 3등 세 대답입니다. 3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친구란 기쁨을 더해주고 슬픔을 나누는 자이다” 기쁠 때 만나면 기쁨이 더 커지고, 슬플 때 만나면 슬픔이 반으로 감해지는 자, 기쁠 때에 만나면 내 기쁨을 함께하고 기쁨을 극대화 해주는 사람 그가 친구입니다. 또 2등으로 당선된 것은 “친구란... 한 보따리의 동전이다” 그저 내 모든 사정을 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바로 그가 친구입니다. 그리고 1등으로 당선된 대답. “친구란 온 세상이 나에게서 떠날 때 다 나를 버릴 때 내게로 오는 자가 진정한 친구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웹 박사는 이 친구의 정을 지속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내가 남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면서 내 먼저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때만이 또 다른 사람도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실인데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비밀이 있지만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또 비밀이 없어야만 친구입니다. 이 사이만은 완전한 진실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거짓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만이 친구의 정을 지속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되며, 세 번째는 평등의식입니다. 봉건주의적 행복관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친구가 없습니다. 너와 나는 똑같다. 지위가 높든 낮든, 학벌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건 적건, 심지어는 남녀 어른 상관없고, 문제는 나와 너는 똑같다는 평등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친구가 있습니다.
스티븐 존슨 박사는 이렇게 친구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 금방 부를 수 있는 친구, 당장 달려올 친구가 있는가? 없다면 당신은 친구가 없는 사람입니다. 또 내가 함께 기뻐할 사람이 있는가?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내가 기쁜 일이 있을 때 찾아 가서 붙들고 이야기하면 그래 그래 그거 참 좋겠다. 아무 시기나 질투가 없이 내 기쁨에 동참해 줄 사람이 있는가? 그래야 그가 친구입니다. 그러나 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는 친구가 아닙니다. 또한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선뜻 내게 돈을 빌려주고 만일에 저가 없으면 믿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돈을 꾸어서라도 빚을 갚아주고 내 어려운 사정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친구가 없는 사람이요, 당신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하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을 지금 최고로 최고의 지위로 우대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했는데 친구란 누군가가 먼저 주도적으로 출발을 해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내게 친구 되어 주기만을 바라고 기다리면 죽을 때까지 친구 못 만납니다. 내가 좋은 친구가 먼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주도적으로 내가 너를 사랑했다. 택했다. 먼저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친구에 관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첫째는 음식과 같은 친구로 매일 빠져서는 안 되고, 둘째는 약과 같은 친구로 이따금 있어야만 하고, 셋째는 병(病)과 같은 친구로서 이를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자기 선언을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15). 여기 ‘친구’라는 말은 ‘필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육적인 우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저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였습니다(요 11:11). 이때에도 필로스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사로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낼 때는 ‘필레인(filein)’도 사용하고(요 11:3) ‘아가판(ajgapa\'n)’도 사용하였습니다(요 11:5). 이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우정의 친구인 동시에 또 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대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친구 예수’의 참된 우정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찾아주신 친구 예수
구약성경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친구, 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였고. 이사야 41장 8절에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하였고, 역대하 20장 7절에 “주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아브라함 편에서는 상상을 불허하는 하나님 편에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아브라함을 자기의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어찌 아브라함 편에서 ‘하나님은 나의 친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편에서 나사로를 가리켜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먼저 불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 편에서 우리를 자기의 친구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편에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자신의 친구로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요?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의 친구 예수
누가복음 7장 34절에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15장 2절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일 뿐 아니라 죄인을 영접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죄인의 친구 되신 예수는 죄인과 함께 먹을 뿐 아니라 죄인의 집에 유하기 위해 들어가셨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막 2:17). 바로 여기에 예수의 매력이 있고, 특이성이 있고, 유일성이 있고, 독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죄인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목숨을 버린 친구 예수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친구, 영원한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 죄 값인 사망을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우리가 그와 함께 하거나 가까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친구로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막 10:45).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친구로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실로 값비싼 예수의 목숨이 지불된 결과, 우리는 그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친구가 되는 데는 예수의 목숨이 지불되었습니다. 그 값은 은이나 금이 아니고,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친구가 되는 조건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4절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였고, 15절에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주님과 우리 성도들과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 우리는 \"그의 양\"이라고 했고,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예수님은 \"남편\" 우리는 \"그의 아내\"라고 했으며 예수님이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불러주실 때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아무나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였는데 즉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는 사람만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천국 시민처럼 살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5,6,7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천국 시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본문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의 명령입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을 순종할 때 주님의 친구로 삼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로 불러주신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친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줍니다. 친구는 친구가 외로울 때 위로해 줍니다. 친구는 친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여 줍니다. 친구는 자기의 하는 일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친구라고 불러주신 아브라함에게 비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8:17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친구인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택하여 주신 이유
본문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택하여 주신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게 하려는 이유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옥토에 뿌려진 씨앗처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태3:8에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은 계속적으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추수하면 추수한 알곡을 다 먹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종자를 남겨 둡니다. 아무리 어려운 때에라도 종자 씨는 먹지 않아야 봄에 다시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한 번 맺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성령의 열매가 항상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도 한 번 전도하여 열매를 맺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계속적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교회가 계속하여 성장하고 성숙해가야 합니다.
기도응답을 받게 하기 위함
우리를 친구로 선택하여 주신 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이루어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친구가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14:13-14에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줄곧 같은 학교를 다녔던 죽마고우였습니다. 군대에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월남전이 터졌습니다. 둘은 같은 부대원이 되어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숱한 전투를 치루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던 중 종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그 와중에 두 친구 중 한 명이 돌격 중에 적탄에 가슴을 맞고 한참 격전 중인 한 가운데 지점에서 쓰러졌습니다. 부상을 입고 헐떡이는 것을 본 다른 친구가 뛰어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소대장이 팔을 붙잡았습니다. \"김 일병, 저 애는 살려봤자 전투불능 상태야. 그리고 우리가 진격이나 퇴각할 때도 그는 짐만 될 뿐이야. 게다가 너까지도 위험해? 어줍잖은 감상은 집어치워.\"
그러나 그 친구는 신음하는 친구를 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소대장의 팔을 뿌리치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정점을 향해 뛰어나갔습니다. 얼마 후 그는 피범벅이 된 친구를 등에 업고 참호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등에 업혔던 친구는 이미 죽어 있었고, 업고 온 친구 역시 여러 곳에 총탄을 맞아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소대장이 소리쳤습니다. \"내가 뭐랬어? 네 친구는 죽었어. 너 역시 큰 부상을 입지 않았나. 우리 소대의 전투력 손실도 마찬가지야! 그런 무모한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이득을 줄 수 있어?\" 소대장의 다그침에 친구는 희미한 미소로 대신했습니다. 그리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큰 이득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말하더군요. `네가 올 줄 알았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친구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친구로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의 오심입니다. 그가 보혜사로 오셔서 조금도 비밀이 없이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요 16:12, 13).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16:14).
친구 예수! 그는 먼저 나를 찾아주신 친구입니다. 그는 의인의 친구가 아니라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죄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 우리를 죄 없는 친구로 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영원한 친구가 되는 비결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친구 종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구, 예수님과의 친구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친구 종교입니다. 말하자면 멀리 떨어져 있는 종교가 아니고, 가까이 있는 종교입니다. 함께 생각하고, 함께 말하고, 함께 행동하는 친구 종교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친구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30배, 60배, 100배로 확대되고 확산되는 우주적 종교가 된 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의 모든 백성을 친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친구 예수, 영원한 친구 예수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