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앞에 나아가 새롭게 결단할

십자가 앞에 나아가 새롭게 결단하라
수8:30-35





[30]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31]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 [32]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 함이라 [34]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갈등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었는데 종종 죄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화를 강조하는 말씀을 따라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 보면 구원은 은혜로 받은 것 같은데 성화는 내 힘으로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분명히 은혜로 구원을 얻고 은혜로 살아야 마땅한 것 같은데 왠지 성화의 과정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내 행동이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또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떤 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죄를 자백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을 풀어보려고 어떤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용서되었으므로 더 이상 회개할 것도 없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율법 폐기론이라고 합니다. 모든 율법이 이제는 다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에 반하여 인간의 행위를 너무 강조하다가 십자가의 은혜를 약화시키는 행위 구원론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함을 받는 칭의와 내 삶이 거룩해져 가는 성화를 균형있게 가르치는데 도무지 그 균형을 이해하기가 어렵고 삶으로 이 둘을 구분하기는 더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다가 삶 속에서 죄를 짓고는 또 다시 절망에 빠지는 일을 반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에게 귀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점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한 가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노획물을 탐내어 물건을 훔쳤다가 결국 그 숨은 죄의 결과로 작은 성, 아이성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아이성에서 패배한 후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고 하나님은 그 불순종의 죄를 뿌리 뽑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아간을 색출하여 벌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여 아이성을 점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아이성을 점령한 직후에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 3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30]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이 말씀에 보면 여호수아가 에발산에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성경을 읽으면서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대한 말씀을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요단강의 왼 쪽에서 북서쪽으로 32km지점에 있습니다. 에발산이 그리심산 보다 더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산 사이에는 세겜성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세겜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유서깊은 도시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곳에서 첫 제단을 쌓았고 야곱은 세겜근처에 우물을 팠습니다. 요셉은 세겜에서 형들을 찾다가 도단으로 갔고, 형들은 그를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산 정상에서 보면 약 2.4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산 아래에서는 45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해발높이는 그리심산이 약 880m, 에발산이 약 940m입니다. 중간에 위치해 있는 계곡을 기준으로 보면 그리심산은 약 240m, 에발산은 약 300m 정도 솟아 있습니다. 그리심과 에발은 둘 다 \"황무지\"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심과 에발에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두 산의 거리가 상당히 되는데도 불구하고 산의 모양이 원형극장과 같이 되어서 상대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 쪽 산에 서서 다른 쪽 산에 있는 사람에게 확성기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말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학자들은 이 사실을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실험에 의해서 이것은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오늘날도 양쪽 산에 사람을 세워놓고 대화를 하면 그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말이 잘 울려서 전달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연음향 장치를 갖고 있는 산이었습니다. 바로 그 산에서 지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롭게 언약을 갱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산이 중요한 것은 이런 천연음향이 아니라 신학적인 중요성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세겜은 언약의 장소였습니다. 에발산에서는 율법가운데 저주부분을 낭독했고 그리심산에서는 축복부분을 낭독했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명령이었습니다. 이 축복과 저주의 말씀은 신명기 27-30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넌 후 에발산에 제단을 쌓고 그 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낭독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그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제단을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이 아니라, 저주의 산인 에발산에 쌓았느냐는 점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기왕이면 축복의 산에 쌓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훗날 사마리아 사람들은 에발산이 아닌 그리심산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배할 곳이 이 산에 있다고 했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더이다\" 할 때, 이 산이 바로 그리심산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 임의로 축복의 산을 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라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제단은 근본적으로 죄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단은 죄 지은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의 말씀을 다 지키지 못해서 정죄를 당하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단을 에발산에 쌓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고하는 말씀과 함께 죄지었을 때 해야 할 일까지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제단에 나아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주의 산인 에발산에 하나님의 제단을 세운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 힘에 겨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율법의 요구대로라면 우리는 축복보다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자들입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그 제단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31절을 읽겠습니다.


[31]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


이 말씀에 보면 그 제단은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적인 것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요소를 완전히 부정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인간의 노력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제단을 통해서만 가야 합니다. 그 제단이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과연 그 제단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 구원의 길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에발산이 아닌 그리심산에 제단을 세웠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내세운 것입니다.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의를 내세우기를 좋아합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죄목이 다 드러나도 끝까지 거부합니다. 할 수 있는데 까지 숨깁니다. 그것이 세상의 속성이고 사람들의 속성입니다. 이 세상은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을 그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나 자신도 역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자기 의를 앞세워서 그리심산에 제단을 세워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 자기 의를 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적인 종교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철저히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죄인이 가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그리심산에 제단을 쌓는 자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철저히 죄인임을 고백하고 에발산에 놓인 제단으로 가야 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전혀 다듬지 않은 돌로 세워진 제단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인 그리스도에게로 가십시오. 유대인들은 이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10:1-4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서 그것은 오히려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자신의 의를 앞세우는 분이 계십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에발산으로 가는 것이 싫어서 임의로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으로 가고 싶어하는 분이 계십니까? 죄인이라는 고백이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까? 누가 나를 향해서 죄인이라고 하면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냐고 반문하고 싶은 분들이 혹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있습니까? 그런 분들은 조용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십시오. 나를 위해 죽으셨는데 정작 나 자신은 그 분이 왜 죽었는지 모르는 이 기가 막힌 현실을 아십니까? 죄 가운데 가장 큰 죄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하는 죄가 아닙니까? 그것은 도덕적인 잘못보다 훨씬 더 큰 잘못입니다.


여러분의 자녀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가장 가슴이 아프셨습니까? 자식이 공부를 잘 못할 때였습니까? 아니면 내 자식이 어디 가서 크게 인정받지 못할 때였습니까? 내 자녀가 훌륭하게 잘 크지 못하면 물론 가슴이 아픕니다. 안타깝습니다. 공부의 문제도 그렇게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온 정성을 다 쏟아 키운 내 자녀가 내 사랑을 거부하고 내가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때의 우리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때 내가 느낄 참담함이 내 자녀가 공부를 못하는 것에 비유하겠습니까? 성공적인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에 비유하겠습니까? 내 사랑을 몰라주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 것보다 나를 더 가슴아프게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심정을 아십니까?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의 친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었는데 그 사랑을 모르고 무시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그 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무엇이 가장 큰 죄입니까? 도덕적인 잘못이 큰 죄입니까? 나는 도덕적으로 크게 흠이 없는 삶을 살았으므로 심각한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 계십니까?


주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죄는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도덕적인 죄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를 따라 세운 그리심산이 아니라 에발산으로 가셔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제단 앞으로 가십시오. 그 제단은 곧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인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그 분만이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분만이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새 힘을 줄 수 있는 분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습니까? 자기 의를 따라 살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죄를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면 그 분께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모든 인간적인 의를 다 버리고 그 분 앞에 나아가면 그 분께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결코 소멸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에발산에 세워진 제단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발산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과연 무엇을 했습니까? 먼저 여호수아는 모세의 율법을 돌에 새겼습니다. 3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32]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여호수아는 제단으로 세웠던 그 돌에 율법을 새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돌에 율법을 기록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이 율법을 각인 시키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모든 백성에게 다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다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이 율법은 어느 누구도 결코 변경시킬 수도 없고 변경시켜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돌에 율법을 새겼습니다. 이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이미 에발산에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매맺는 삶을 위해서입니다.

오늘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새로운 성령의 법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결코 율법 폐기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구약시대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새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돌에 새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넣어야 합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그 율법을 낭독합니다.


본문 33-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33]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 함이라 [34]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이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절반은 그리심산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에발산에 섭니다. 이것은 신명기 27장에 있는 모세의 명령을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의 모든 말씀을 낭독합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과 저주에 관한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아간 사건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죽임을 당한 아간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으며 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동시에 들어야 합니다. 축복의 말씀만 들어서는 안됩니다. 저주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재앙이 아닙니까? 저는 제가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경고하시고 사랑의 매를 들어 저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버린 자식이 아닌 다음에야 잘못을 경계하고 지적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각성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로 삼아서 비추어보지 않으면 우리는 늘 교만과 방종에 빠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아간으로 인하여 깨어진 계약을 회복하시면서 하나님은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그 백성에게 동시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의도를 따라서 여호수아는 빠짐없이 율법을 낭독합니다. 우리는 늘 자신을 말씀 앞에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확인하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고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하여 말씀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혹은 정죄를 피하기 위해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값없이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그분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약한 자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시오. 우리의 그런 부족한 모습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에발산에 제단을 세워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일 날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고 교회를 나섰는데 다시 한 주간 살면서 실패한 분이 계십니까? 자주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이 실망스러워서 오히려 주님을 더 멀리하는 분이 혹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까?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식은 채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에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경험하십시오. 나를 살리기 위해 죽임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 내가 주님을 떠나 방황할 때도 결코 나를 버리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1987년 8월 16일 주일날 밤, 노스웨스트 225 항공기가 디트로이트 공항을 이륙한 직후 추락했습니다. 155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단 한 명, 네 살 짜리 여자아이인 세실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구조대원들이 세실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그 아이가 비행기의 승객이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충돌했던 자동차에 타고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탑승자 명단에서 세실의 이름이 발견되었습니다.

여러 정황을 보고 구조대원들은 아주 특별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세실의 기적적인 생존은, 비행기가 추락하는 도중에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고 세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팔과 몸으로 딸을 감쌌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 사랑하는 딸을 지켜 낸 것입니다. 충돌에 의한 심한 충격도 그녀를 딸로부터 떼어놓지는 못했습니다.


그 무엇도 자식을 부모의 진실한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비극이나 재앙, 추락이나 화재, 높음이나 깊음, 생명이나 죽음.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떠하셨습니까? 그 분은 하늘을 떠나 우리 앞에 자신을 낮추셨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우리를 감싸 안으셨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겪을 수밖에 없는 어떤 절망과 고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8-39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가슴 벅찬 확신가운데 전율하곤 합니다. 이 확신이 여러분 가운데도 동일하게 있기를 참으로 소원합니다.


영국의 목사 아우구스투스 톱레이디 (Augustus Toplady) 가 작시한 \"만세반석 열리니\"의 3절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 손에 가진 것 없이 나아가,


그저 당신의 십자가만 붙듭니다.


벌거벗은 자, 옷을 바라고 당신께 나옵니다.


도와줄 이 없는 자, 당신의 은혜만을 바랍니다.


더러운 자, 당신의 샘으로 왔나이다.


나를 씻어 주소서 구주여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죽나이다


만세반석 나를 위하여 여소서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피하여 숨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이 시간 십자가 앞에 나아와 다시 한번 그 사랑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새롭게 결단하십시오. 은혜의 보좌 앞에서 회복의 은총을 경험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결단하십시오.


\"사랑하는 주님! 저는 약한 자입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어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저를 회복시켜 주시고 말씀의 능력을 회복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치유하시고 우리 안에 새 영을 부어주셔서 새로운 능력 가운데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