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수3:1-6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하니, 그들이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물을 건너는 것은 중생한 성도(홍해애서 물세례)들이 성결의 체험을 얻는 모형인 것을 이미 말씀을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레위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은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모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싯팀에서 떠나 요단 강가에서 3일 유숙한 것은 십자가 지신 주님이 3일 후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모형을 가리킨다.

또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열 둘을 선택한 것은 주님이 열 두 제자를 부르신 모형이다. 특히 수 3장에서 언약궤란 말이 7회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3, 6, 8, 9, 11, 17,)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일곱 말씀을남기신 것을 상기케 한다. 어쨌던 요단 물을 건너는데 중심은 하나님의 언약궤입니다. 언약궤가 없다고 하면, 여단 강물을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사같은 방언도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도 어떤 조직이나 기구도 모두 소용이 없다. 이스라엘 지파 중, 열 두 사람을 선택한 목적이 요단을 건너는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것처럼 주님이 열 두 제자를 부르신 목적도 예수님의 구속사업을 이 땅에 영원히 기념하기 위함이요, 일반 백성들이법궤만 쳐다보고 법궤를 멘 제사장들의 뒤를 따라 진행한 것 처럼 우리 성도들의 신앙목표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멘 것과 같이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야 한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 강물에 들어 서니, 강물이 좌우로 갈라지고 마른 땅을 밟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위에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완전히 못 박고 옛 사람을 완전히 요단 물에 장사 지내야 한다.
= 82 =
거룩하다는 것은 내 몸에서 ‘죄의 쓴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리고’ 깨끗한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요단 강물에 들어서자 흘러가는 강물이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16). 나와 여러분의 죄들이 완전히 끊어져야 한다. 이것만이 위대한 믿음의 능력이다. 제사장들의 발이 강물에 잠기게 되자. 강물이 갈라지듯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진행할 때, 이런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인 것이다.

ⅰ. 십자가는 세상과 분리를 뜻한다.
‘그때에 너희는 너희 자리에서 이동하여 그것을 따라가라.’(3절)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그들의 장막을 떠나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 앞서 가서.’(14절)

십자가는 세상과 죄에 대한 분리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주의와 타협하고, 대제사장의 교권과 타협하고, 헤롯의 정권과 타협을 했다고 하면 십자가에 죽으시지 아니 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율법주의와 교권주의와 정권에 타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세상의 죄와 불의에 대해서 언제나 타협을 거절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본토 친척이 아비집을 떠났다. 본토는 물질주의를 뜻하고, 친척은 인본주의를 뜻하고, 아비집은 세속주의를 뜻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들의 법궤를 따르기 위해서 세 곳을 떠났습니다.

1. 싯팀에서 이동하여,떠났다는 것이다.(1).
① 싯팀은 역청 구덩이가 많은 곳이다. (창 14:8~12)
아브라함은 당시에 엘람왕이 이 골짜기에서 소돔왕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사로 잡아간 곳인데, 이곳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았으며, 군사들이 그 역청 구덩이에 빠져서 패전한 곳이다.(창 14:10). 참으로 이 세상은 싯팀의 역청 구덩이 같이 육적으로 빠져들어 갈 함정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곳을 속히 떠나야 승리의 강을 건널수가 있는 것입니다.
= 83 =
②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간음한 장소가 싯팀이다.(민 25:1). ‘이스라엘이 싯팀에 거하였는데, 그 백성이 모압의 딸들과 더불어 음행하기 시작하였더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왕 발락의 계교에 바져 싯팀에서 모압의 딸들하고 간음을 행하고 또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우상 앞에 절하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로 염병에 걸려서 하루에 2만4천 명이 죽었다. 민 25:9에 ‘그 재앙으로 죽은 자들이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고 했다. 나와 여러분이 세상을 사랑하고 사는 것은 바로 간음하는 행위와 같다고 (약 4:4절) 했다.

③ 이스라엘의 최후의 진지가 싯팀이었다.(수 2:1)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두 정탐군을 파송하였다.

2. 너희는 너희 자리에서 이동하여.(떠나라). (3절)
이것은 거처의 분리를 뜻한다. 하나님의 법궤를 따라가려면 자신들의 거처에서 일어나 따라가야 한다.
사 52:11절 ‘너희는 떠나라, 너희는 떠나라, 너희는 거기서 나가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너희는 그녀 가운데서 나가라. 주의 기명들을 메는 너희는 정결케 되라.’

3. 자기들의 장막을 떠나라.(1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났습니다. 이 장막은 임시거처이다. 영원한 처소가 못 된다. 그러므로 안정된 카나안의 정착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그들의 장막을 떠나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려고 할 때, 자기 집안 식구들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장막(집)을 떠나야 한다. 집 안에 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마 24:17=?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 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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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十字架는 信仰의 焦點(초점)이다.
그것을 따라가라. 너희와 언약궤 사이에 약 이천 큐빗을 재어 간격을 두고, 그것에 가까이 오지 말라.(4절)
이천 큐빗(한 큐빗 45cm)의 간격을 두게 한 것은 멀리서 법궤만 바라보겠끔 하기 위해서이다. 너무 가까이 접근해도 안되고, 이천 큐빗에서 멀어져도 안된다.

이천 큐빗의 거리를 옳바로 유지하면서 전진하도록 한 것이다. 우리 신앙의 표준은 예수님의 십자가 뿐이다. 어떤 신학자나, 부흥사나, 목사가 우리 신앙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 12:2=? ‘그리고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오늘편에 앉으셨느니라.’ 고 했습니다.오직 우리는 예수님만 바라 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한 곳만 바라보는 눈이 있을 뿐, 두 곳에 마음을 둘수 없다. 세상을 바라보면 탐심이 오고, 자신보다 앞선 사람을 바라보면 질투가 생기고, 그리고 나보다 뒤진 자를 바라보면 스스로 자만해 지고, 자신을 바라보면 엉망이라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음찬송)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이 세상 사람 날 몰라 줘도
주님 한 분만 바라 봅니다.
뒤 돌아 서지 않겠네.}
(찬송 135장)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 일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아 멘

우리는 예수님의 지신 그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생전 처음 가는 길에 만일 법궤를 잃어버리면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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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교회가 만일 십자가를 잃어버렸다면, 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요, 진리를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나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거룩한 은사를 체험하고 천사같은 방언을 하고,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다해도 십자가를 잃어버린 신자는 아무 쓸데가 없다. 내 몸을 불 사르는데 내어 준다 해도,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중심하고 매일 십가만 쳐다보고 우리의 진로와 방향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의 현대 교인들 가운데 특히 은혜 받았다는신앙인들 가운데 방황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이 있음을 봅니다. 그 이유는단 한가지, 자기 자신이 신앙의 유일의 목표인 십자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ⅲ. 十字架는 지고 가야 한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백성 앞서 가서.’(14절).
여호수아 3장에서만 언약궤를 멘다는 말씀이 9회(3, 6, 8, 13, 14, 15, 15, 17,)나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기만 하는 것도 아니요, 들고 가는 것도 아니요, 반드시 제사장들의 양 어깨에 메고 가도록 의무화 된 것이다. 우마차에 싣고 가도 안되고, 내려나 봐도 안되고, 임의로 내게로 가져와도 안된다. 반드시 메야 되는데, 백성들은 법궤의 방향의 진행을 따라 법궤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 많았던 다윗도 이 원리를 무시하다가 큰 환난을 만났던 것이다. 실로에 안치되어 있는 이 법궤를 자기 임의로 전쟁터에 가져갔다가 불레셋에게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적이 있었다(삼상4:1-,) 그리고 나중에는 새 수레를 만들어서 소에게 싣고 오다가 큰 재앙을 만난 적이 있었다.(삼하 6:1~16).

여기서 새 수레는 신 신학의 모형이다. 아무리 새 수레를 만들어 정성껏법궤를 모신다 해도 그것은 우마차에 운반하는 결과밖에 안된다. 지식이없는 열심은 미신에 빠지기 쉽다. 법궤는 반드시 제사장이 메야 하듯이 십자가는 바라보고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각자가 져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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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 희생을 의미한다.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살리는 것이 십자가의 정신이다. 자기를 희생하고남을 살리는 일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아니다.

2. 용서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그 어려운 고통가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원수들을 향하여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을 용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구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자가 아닙니다.

3. 十字架를 진다는 것은 화목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원수된 담을 헐으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엡 2:14~17절 참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니, 둘을 하나로 만드셨고,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중간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으며, 원수된 것, 곧 법령 안에 속한 계명들의 율법까지도 그의 육신 안에서 페기하셨으니, 이는 그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창조하사 화평케 하시고, 그가 십자가를 통하여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함이여, 그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죽이려 함이니라. 또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와 가까이 있던 그들에게 화평을 전파하셨느니라.’

만일 우리가 서로 불평하고 쟁투하며 서로 분리하면서 화해를 해친다고 하면 십자가를 지는 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희생이되어 주셨다. 그러므로 화목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슴합니다.(마 5:9,‘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울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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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복종을 의미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었다. (빌 2:8‘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까지라.’)

자기의 모든 생각과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일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우리 가운데 누가 주님의 뜻을 거역하고 제 마음대로 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전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5.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내를 의미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내를 뜻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6시간이나 그 쓰리고 아픈 고통을 다 참으셨다. 갖은 모욕과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셨으나, 예수님은 도살장에서 털 깎인 양과 같이 아무 불평 원망하지않고 다 참으셨다. 만일 우리 가운데 조그마한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원망이나 불평을 한다고 하면 십자가를 지는 자가 아닙니다.

6.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랑의 극치를 의미한다.
십자가는 사랑의 최고의 극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놀라운 사랑은 그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사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음심으로 그 사랑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우선적인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요일 4:9-1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를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사랑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의 아들을 우리 죄들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롬 5:8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셨다.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고도 아직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십자가를 지는 자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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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본래 로마의 사형틀이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상에서 완전히 죽으신 것이다. 내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가 완전히 죽는 것을 의미한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나의 혈과 육의 사람이 줒지 아니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교회 안에는 세가지의 신자가 모여 있다고 한다.
① 자기의 십자가도 못지고 항상 남에게 짐이 되는 자.
② 자기의 십자가를 겨우 지는 자.
③ 자기의 십자가를 능히 지고 남의 십자가도 져 주는 자.

첫째와 둘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무 상급이 없다. 부끄러운 구원이다. 자랑스러운 면류관의 상급은 세 번째류의 사람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내 몫에 메인 십자가를 잘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왜 앞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십자가를지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 강물을 밟으니 물이 끊어지고, 좌우로 갈라지듯,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믿음으로 행할 때, 앞길이 열리고 갈라지는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십자가를 도피하면 더 큰 십자가가 오고, 십자가를 지면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갑니다. 아-멘. 할렐루야.

ⅳ.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다.
‘온 땅의 주이신 주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 속에 내려서면, 곧 요단 물은 위에서 내려오는 물부터 끊어지고, 그 물은 물 무더기를 이루어 서리라.’하더라.(수 3:13).

1. 십자가는 카나안 일곱 족을 멸하게 되었다.
카나안 일곱 족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옛 사람의 모형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모독이 나온다.(마 15:19)고 했다. 이 일곱가지 옛 사람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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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진 할 때, 카나안 옛 일곱 족이 완전히 물러 가듯,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나의 옛 사람을 완전히 못박아 죽여버려야 한다. 나를 쳐 복종시켜 자기를 이기는 비결은 오직 십자가 뿐이다. 홍해를 건널 때 완전히 죽지 않는 죄의 잔존 세력이 이 요단 강을 건널 때, 완전히 말살 되어 지는 것이다. 이 요단 물에서 죄악의 옛 사람이 완전히 멸망되지 않고는 카나안 땅에 입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요네다(米田) 주석에는 “요단 강물이 물러간 일은 주님의 능력이 죽음의 능력을 정복하시는 일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신앙 생활이 어떠한 곤란에 직면한 때에도 주께서 우리의 전진을 위해 길을 열어 주심을 보여 주신다.”라고 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와 사망, 의와 생명의 양면을 보여 준다.

잠시 동안 죄와 사망의 법이 의와 생명의 법을 삼키는 듯 하였으나, 예수님의 3일 후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은 의와 생명의 법에 완전히 정복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 악에 대한 선의 승리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2. 물이 완전히 그쳐서 끊어졌다. (16).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에 잠기자 물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십자가는 완전한 죄의 종식이다. 온 땅의 주이신 주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요단 물 속에 내려서면, 곧 요단 물은 위에서 내려오는 물부터 끊어지고, 그 물은 물 무더기를 이루어서리라,는 말씀과 같이(13).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상에 돌아가실 때, 아담으로부터 대대로 내려 오던 모든 죄들은 종식된 것이다.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강물을 밟기만 하면 하나님의 기적으로 우리를 성화시킨다.

이스라엘의 모맥 거두는 시기는 언제나 요단 강물이 범람하여 언덕에까지 넘친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유월절은 인류의 죄악의 절정이었다. 그날 물줄기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인 것과 같이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실 때부터 생명이 지배하는 신기원의 조류를 이루어 가난은 부요함으로 절망은 소망으로, 저주는 축복으로 정죄는 사유로 지옥은 천국으로 방향이 완전히 전환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 90 =
3.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았다.(17절)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서니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향하여 요단을 무사히 건넌 것이다.(17절)=> 주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한 가운데 있는 마른 땅에 굳게 섰는데,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건너서 모든 백성이 요단을 완전히 건널 때까지 서 있더라. 고 했습니다.

사십년 전 홍해를 건널 때에는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 먼저 길이 열였는데 이번에는 강물을 먼저 밟을 때, 길이 열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우리의 신앙이 아직 어릴 때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능력을 보여 주시고 신앙을 고무 격려하시나, 신앙이 성장한 후에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할지라도 다만 약속만 믿고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나타내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제사장들에게 어려운 장애물을 허용하신 것은 그들의 신앙과 절조의 승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뜻이었다”라고 하였다. 강물이 갈라지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다밑을 육지같이 마르게 하시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어려운 죄 문제를 해결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앞길에 마른 땅을 밟도록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 마른 땅을 믿음으로 밟고 걸어 가기만 하면 카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