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나
십자가와 나(9)/행복에의 길
히12:1-2,빌2:6-11
오늘 아침 ”십자가와 나”란 주제로 아홉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행복에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과 우주에서 가장 보배롭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은혜로운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장 진하게 가장 아름답게 가장 비극적으로 나타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는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죽음이 나타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수치와 저주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런데 십자가는 고통과 저주로 그치지 않고 즐거움과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십자가는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이오 신비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2:8,9). 오늘 아침 십자가의 의미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십자가는 떠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켜 사망이란 말을 쓰지 않고 별세란 말을 썼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쌔”(눅9:31). 별세란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다는 뜻입니다. 죽어서 없어지거나 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간다는 것입니다. 이 별세란 말을 가장 강조하는 사람이 한신교회의 이중표 목사님입니다. 별세란 말의 원어는 엑소더스 즉 출애굽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른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하늘 집으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 요13:1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라고 했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영광의 나라로 아버지의 품으로 행복의 나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십자가를 지는 십자가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늘의 세계로 아버지의 품으로 행복의 나라로 옮겨 가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죄악 세상에 대한 애착에서 떠나 거룩한 하늘의 세계로 옮겨 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십자가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떠난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아비 친척 집을 떠나라”고 분부했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떠나라고 분부했습니다. ”내 백성을 떠나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출10:3). 이 명령이 출3장부터 10장까지 9번이나 나옵니다. 결국 바로는 손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출12:31). 하나님께서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 떠나라고 분부했습니다. ”너희는 떠날찌어다 떠날찌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찌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찌어다”(사52:11). 떠남이 힘든 일이지만 떠남은 행복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떠남의 클라이막스 즉 엑소더스의 틀라이막스가 십자가의 죽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떠남의 종결이오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 즉 하늘 집으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종착이 아니고 하나의 통로요 관문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아버지 집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아버지 품에 이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상의 죄와 정욕에서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중표 목사는 자기 자신의 유전적인 기질과의 갈등으로 너무나 심각한 고뇌를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고뇌를 경험하는 가운데 발견한 진리가 바로 자기의 죄성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분노의 기질에서 떠나고 소위 성자들이 물려준 위선적인 기질에서 떠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별세의 신앙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귀한 발견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떠남이고 돌아감입니다. 세상과 죄성에서의 떠남이고 하늘과 행복에로의 돌아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일찍부터 터득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자기의 죽음을 가리키며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딤후4:6) 라고 표현했습니다.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고후5:8)을 소원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궁극적인 행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적으로는 날마다 죽는 삶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정과 욕심에서 떠나는 것이 그래서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십자가는 떠남이고 돌아감입니다. 정과 욕심에서의 떠남이고 거룩함과 행복에로의 돌아감입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도 세상의 복잡한 일들에서 떠나 주님 품으로 십자가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행복해 졌습니다. 떠나는 연습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행복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2 십자가는 버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켜 생명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이사야는 메시야의 죽음을 가리켜 영혼을 버리는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사53:12).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켜 자기를 비우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빌2:6,7).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자기를 버린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존귀와 영광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부요함도 능력도 지위도 체면도 평안도 살과 피와 물도 생명도 영혼도 모두 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버림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을 얻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2:9).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버림으로 모든 것을 얻으셨습니다. 자신의 영광은 물론 하늘 아버지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지옥에 떨어져야 했던 수많은 인간들의 영혼들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시므로 가장 행복한 분이 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모두 이루어 드렸습니다. 아버지에게 모든 영광과 기쁨을 돌려 드렸습니다.
수 많은 죄인들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가져 다 주셨습니다. ”나의 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리라”(사53:11). 이사야의 예언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5). 예수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버리시므로 많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복해 지셨습니다. 수 많은 인류의 감사와 존경과 찬양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너무 행복해 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버리는 버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버림은 버림으로 그치지 않고 얻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행복해 지는 비결도 십자가의 삶 즉 자신을 버리는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18:29). 여기서도 버림은 버림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받음으로 이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버림으로 금세에서도 행복해지고 내세에서도 행복해 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지고 버리는 삶을 행복하게 기쁘게 살았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허비하고[버리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버리리니]”(고후12:15). ”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버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니”(빌2:17). 바울은 한 평생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십자가의 삶 즉 버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금세와 내세에서 행복해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재물에 대한 욕심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합니다. 버리지 못하면 롯의 처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나 데마처럼 불행해 집니다. 버리는 연습을 한 성 프랜시스나 테레사 수녀나 장기려 박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금세에서는 물론 내세에서도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버리는 연습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행복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3 십자가는 낮아짐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낮추 사 죽기가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십자가의 죽음은 낮아짐의 죽음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 죽은 수치와 굴욕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낮아짐은 낮아짐으로 그치지 않고 높아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2:9). 십자는 낮아짐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높아짐을 의미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높임을 받을 때 우리는 행복해 집니다. 세례 요한이 낮아졌을 때 주님이 그를 높이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행복해졌습니다.
사실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불행해 집니다. 아담이 높아지려고 하다가 불행해졌고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높아지려고 하다고 불행해졌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14:12-15).
십자가의 삶은 낮아짐의 삶이고 십자가의 정신은 낮아짐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그 낮아짐은 낮아짐으로 그치지 않고 높여짐으로 그래서 행복해짐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이 높여 주실 때 우리는 행복해 집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는 큰 자니라”(마18:4). 그때 주님이 안아주시고 제자들 앞에 세워주신 그 어린 아이는 가장 행복해 졌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주 안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5). 낮아지는 연습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행복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십자가의 정신 세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십자가는 떠남인데 사실은 주님 품으로 돌아감이고 십자가는 버림인데 사실은 모든 것을 얻음이고 십자가는 낮아짐인데 사실은 높임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과 세상의 모든 정욕에서 떠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리기를 힘쓰시기 바립니다. 낮아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금세에서는 물론 내세에서도 모두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