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벧전2:22-25
2008-06-11 15:21:55 read : 46
친히 나무에 달려 죽으심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셨으니(24).”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한 벌로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인 중의 죄인 취급을 받고 가장 극악한 십자가형으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형은 인류에게 있었던 사형법 중에 가장 잔인 것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유대인을 학살하려고 음모를 꾸민 하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25미터에 달하는 나무를 준비했는데, 자신의 음모가 발각되면서 운명이 바뀌어 자신이 그 나무에 달려 죽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의미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렸다는 것은 자발성과 적극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능동적으로 감당하셨습니다. 마지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운명적으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절할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할 길이 이것 밖에 없음을 알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감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짐승을 제물로 드렸는데, 짐승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짐승을 제물로 가지고 나온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짐승은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심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그가 우리를 대신합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일본의 어느 일류대 졸업생이 한 회사에 이력서를 냈습니다. 사장님과 면접을 하는 자리에서 의외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을 목욕시켜 드리거나 몸을 닦아드린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초등학교 때 등을 긁어드리고 용돈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목욕을 시켜드린 적은 없었습니다. 내일 다시 면접을 할 것인데, 부모님의 몸을 한번 닦아 드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일하러 가신 어머니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가시고 홀어머니가 품을 팔아서 학비를 댔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발을 닦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셨습니다. 회사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어머니 발을 닦아드리는 것이 과제라고 하자 그제야 발을 내미셨습니다.
어머니의 앙상한 발등은 나무껍질처럼 보였습니다. 발바닥은 시멘트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하얀 발과는 달리 사람이 피부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발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저 때문에 고생한 것을 이제 알겠습니다.
다음날 회사를 찾아간 아들은 사장님에게 말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은 웃으시면서 인사부로 가서 수속을 밟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은혜를 깨닫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은혜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모른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1:2-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배은망덕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세에 당신의 독생자를 보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거절한다면 달리 희망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의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미안한 마음, 감사한 마음,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할 마음이 함께 해야 합니다.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 부대가 숲 속에서 적군을 만나 격전을 벌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두 병사가 낙오됐습니다. 그들은 부대를 찾기 위해 함께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마을 출신이었습니다. 10여일이 지났는데 여전히 부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걷는 것보다 참기 어려운 것이 배고픔이었습니다. 비상식량이 떨어진지 오래였습니다. 나무뿌리로 연명하다가 사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고기덕분에 며칠은 견딜 수 있었지만 사슴 고기도 이제 조금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젊은 병사가 고기를 배낭에 넣고 짊어졌습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적군과 마주쳤습니다. 겨우 적군을 따돌리고 안심하는데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앞에 가던 병사가 총에 맞았습니다. 다행히 총알은 어깨를 스치는 가벼운 부상이었습니다. 밤이 찾아왔습니다. 부당당하지 않은 병사가 어머니를 부르며 구슬프게 울었고, 총에 맞은 젊은 병사는 망연히 먼 곳만 바라보았습니다. 낙심과 배고픔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사슴고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다행히 아군에게 발견되어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50년이 지나서 총에 맞았던 젊은 병사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는 누가 나를 쏘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함께 가던 전우였습니다. 그가 나를 안았을 때 그의 총구에서 화약 냄새가 났습니다. 그 당시 그가 왜 나를 쏘았는데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병든 어머니를 위해 꼭 살아남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함께 묘지를 찾았을 때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나는 그 때 진심으로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 후로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혼자 살겠다고 뒤에서 총을 쏜 친구보다 더 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노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나도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고,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 안에 거합니다. 주님과 나는 연합했습니다. 누가 이 사랑을 해칠 것입니까? 아무도 방해할 수 없도록 주님과 한 몸을 이룹시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5).”
예수를 영접하기 전과 영접한 후의 생활이 다릅니다. 이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는데 지금은 목자의 품 안에 있습니다. 길을 잃은 양은 생존의 위협을 당하지만, 목자의 품 안에 있는 양은 복락을 누립니다. 양은 길을 잘 잃습니다. 그리 똑똑한 짐승이 되지 못합니다. 양은 목자의 품을 떠나서 스스로 잘 살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맹수가 아니라 순한 짐승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길을 잃은 양과 같았습니다. 습관적으로 길을 잃고 방황했습니다. 때로는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목자의 품 안에 있습니다.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됩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나는 길 잃은 나그네였네 죄 중에 헤매이는데 사랑의 왕 내 목자 예수 나를 집으로 인도하네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 날마다 함께 하시리라.
아버지 유산을 상속해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객지에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남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서 돼지쥐엄 열매를 먹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직시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가기를 결심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로 받아주지 않으면 종이라도 좋다. 그러나 아들의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동구 밖까지 나와서 아들을 영접했습니다. 집에서는 송아지를 잡아서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의 지위를 회복해주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배고프고 비참한 종이었는데, 예수 믿은 후에는 잔치집의 주인공과 아들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깨닫고 아버지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객지에서 고생하지 말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시다.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율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천국은 스스로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굳게 닫히고,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고 손드는 자에게는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 어떤 선행보다도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영혼의 복락을 얻는 참된 비결입니다.
어거스틴은 독실한 기독교인인 어머니 모니카와 이교도이고 로마 관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기 때문에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배웠고 키케로와 같은 라틴어 학자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진리가 인생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학문을 통해 확신케 된 그는 기독교를 버렸습니다. 기독교가 무식한 사람들의 종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십대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사생아를 낳았다. 회고록에서 그 때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카르타고에 들어서자 불결한 정욕의 가마솥이 내 주위에서 부글부글 끓어대고 있었다.”
마음의 안식을 찾지 못한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찾았습니다. 마니교는 세상을 빛과 어두움, 육체와 영이 싸우는 전쟁터라고 가르쳤다. 마니교에서 영적 만족을 찾지 못한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밀라노로 다니면서 수사학을 가르치다가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만났습니다.
그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무식쟁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387년 밀라노의 한 정원에 앉아 있을 때입니다. “취하여 읽으라. 취하여 읽으라.” 어린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취하여 읽었더니 로마서 13:13-14절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회심했습니다. “신앙의 빛이 내 마음에 홍수처럼 밀려 들어와 모든 의심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 같았다.” 어거스틴은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진정한 안식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무엇으로 죽음에 이르는 죄를 대신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만이 죽을죄를 대신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혈통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양자됩니다. 놀라운 신분 상승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인생역전은 없습니다. 영혼의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흙으로 빚어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고, 영혼의 생명으로 영생에 이릅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알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헌신합니다. 삶이 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생활을 합니다. 지옥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천국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힘씁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목자되신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복락을 누리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21).”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릅시다.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서 목격한 바를 진실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 예수님의 모습은 이러하셨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판단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22-23).” 이것은 고난의 종을 노래하는 이사야의 기록과 유사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세상에는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악마처럼 행사하고도 천사처럼 가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양 같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고 선으로 이겨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는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의와 불의가 뒤섞여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와 불의가 뒤바뀔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순결하게 그리고 인내하며 견고하고 감당합시다. 죄 짓지 말고, 예수님처럼 죄를 이깁시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살게 합시다. 예수님과 하나되는 영적 연합을 경험합시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성숙이고 성화입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입니다.
“결혼 전에는 사랑에 밥 말아 먹고 살 것 같지? 한번 살아봐.” 그렇습니다. 결혼은 때로는 쓰디쓴 현실입니다. 사람은 이슬을 먹고 살지 않습니다. 세끼 식사를 먹고 삽니다. 결혼생활을 잘하려면 드라마 같은 환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스트레스 받고 머리 아프면 하루에 열두 번이라도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만만치 않습니다. 시간과 경비를 생각하면 주저앉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정들어서 살고,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위해서 삽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여기는 천국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만만치 않은 현실을 직시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읍시다. 십자가 바라보고 묵묵히 나아갑시다. 주님의 뜻이라면 죽도록 순종합시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미움을 받아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한번은 굴속에서 사울을 만났습니다. 단칼에 그를 죽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내 손으로 칠 수 없다고 다시 칼을 내려놓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칼로 쳤습니다. 베드로야 칼을 내려놓으라. 이것까지 참아라.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시간에 이룹시다. 온유하게 행동하고, 절제하여 말합시다. 한 랍비가 제자들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소나 양의 혀로 만든 맛있는 요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딱딱한 것도 있고 부드러운 것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부드러운 혀만 골라 먹으려 했습니다. 랍비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자신의 혀를 언제나 부드럽게 간직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딱딱한 혀를 가진 자는 언젠가는 상대방을 화내게 하거나 불화의 씨앗을 뿌리게 됩니다.” 원망이나 시비나 저주 같은 말을 입에 내지도 맙시다. 혈기와 분노 같은 것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