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십자가 마10:34-39,눅14:26-27
사순절 둘째 주일을 위해서 선택된 본문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될 수가 없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기대와 소원은 각각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에게 실망하고, 그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도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렇게 아주 밀도 높은, 강박적인 말씀이 어떻게 그를 따라 다니는 많은 민중들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마침내 한 제자가 여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누가 구원을 얻겠으며 그 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 그 수의 \\\"많고 적음\\\"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몇 퍼센트일 것이고, 몇 사람이라고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좁은 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정서, 우리의 노력하지 않고도 그냥 되어지는 우리의 마음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우리의 소욕, 우리의 욕심을 거슬려 가는 그런 \\\'좁은 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주여! 주여! 부르는 사람은 많지만, 구원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공의 최대의 적(敵)은 \\\'안일주의\\\'입니다. 구원의 적(敵)은 \\\'타성\\\'입니다. 행복의 적(敵)은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입니다. 신앙의 적(敵)은 \\\'기적이나 바라는 마음\\\'입니다. 진실의 적(敵)은 \\\'위선\\\'입니다. 민중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로마 군대들을 다 무찌르고, 자기 조국에게 평화를 가져오기를 무척이나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이 영원한 평화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누구나 \\\'십자가\\\'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끔찍한 십자가를 말씀하시면서 \\\'십자가의 길이 아니고는 화평에 이르는 길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그 말을 들은 갈릴리 사람들은 큰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로마 제국에 반대해서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이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마리우스라고 하는 로마 장군이 군사를 몰고 와서 갈릴리 반란의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 이천 명을 십자가에 못 박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천 명이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는 그 신음 소리, 그 시체에서 나는 썩은 냄새, 그리고 그 가족들이 모두 다 멀리서 바라다보고 울부짖는 그 울음소리... 갈릴리 사람들은 그 때 누구나 다 십자가를 보았고 십자가, 곧 끔직한 사형의 형틀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십자가를 잘 아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하신 말씀은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요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는 비중이 다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의인의 십자가, 대속의 십자가, 속죄의 제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십자가는 그만큼을 못하고 우리 개인의 고통, 희생, 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고통, 희생, 수난이라고 해서 모두 다 \\\'자기의 십자가\\\'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정치적인 야욕에 사로 잡혀서 정치 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것을, 예수님이 의미하신 \\\'자기 십자가\\\'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노름하다가 거지가 된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라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의 실수로 비난을 받고, 자기의 실수로 욕을 먹게 되었을 때, \\\"야! 나는 지금 십자가를 진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신을 거스른다.\\\"는 말씀이 로마서 8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다가 받는 고난은 절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온갖 범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들의 손가락을 끊은 아비가 있는가 하면, 본인의 손가락 네 개를 절단한 사건도 있었고, 그 다음에 또 한 번 엄지까지 마저 베는 그런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자기의 두 발목을 철길에 누워서 잘려나가게 하고 보험금을 타려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탈로가 나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서 \\\"나는 나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혹시 우리 국민 가운데, 보험회사를 속이고 보험금을 몰래 탄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보험금도 못 받고 감옥에 간 사람을 향해서 어리석다고 말하며 자기 자신에게는 \\\'나는 참 운이 좋다\\\' 혹은 \\\'나는 머리가 좋아서 완전 범죄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남을 속여서 보험금을 받아낸 사람은 그 사람 당대(當代)만 망(亡)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본 그 자식들, 자손 만대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도 그 다음부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인스턴트 대처방법으로 그 위기를 건너가려고 하는 정신병 환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자기의 십자가\\\'를 진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성령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 그런 것을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노름 중독으로 가산을 탕진한 자, 이것은 육의 소욕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육의 십자가\\\'를 제대로 지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상대방을 위한 사랑이 아닌, 자기를 위한 사랑, 인간의 이기적인 사랑, \\\'자기 중심의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애의 변장\\\'에 불과한 것이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위하여 내 것을 희생하고, 내가 많은 것을 잃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은 내 욕심에 예수님의 능력을 가져와서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을 위하여 내 것을 포기하고, 내 것을 손해보고, 잃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내가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누가복음에는 더 나아가서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오래 전에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전도사로 일하면서 그 교회 예쁜 처녀와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후에는 여인의 마음이 바뀌어서 전도사인 남편에게 목회를 하지 말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목회자가 되면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이런 일이 불편하고, 당신뿐만 아니라 나도, 가족도, 우리 아이들도, 다 불편하고 부자유하다\\\"고, \\\"당신은 재주도 있고, 능력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고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같이 목회 생활의 어려움을 말하더니, 아예 나중에는 아내가 \\\"당신이 결국 목회자가 된다면, 나는 이혼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남자 중에 자기 아내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그도 목회의 길을 버렸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신학교 졸업한 것을 알고, 또 교회의 전도사였던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서 나설 수가 없으니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 그저 여기서 전문직을 가진 사람이나, 또 비전문직을 가진 사람이나 모두 다 일반 직업을 갖게 됩니다. 이 사람도 그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자녀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목사가 되지 않으면 이 두 사람의 부부애는 더욱 깊어지고, 가정이 화목하고, 두 사람의 행복이 아주 증진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생활이 그저 열심히 벌어서 기계처럼 일하고, 입에 풀칠하고, 아이들 교육시키기에 바쁜 그런 의미 없는 생활에 불과했습니다. 목회를 하지 않으면 그렇게 행복할 것 같았지만 그 어떤 죄책감이 그를 괴롭혀 왔습니다. 미국 간 지 16년이 되던 해, 부인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몸이 이곳 저곳 부서졌는데, 수술을 이차, 삼차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아주 눈에 띄게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그때에야 회개하고 남편보고 목사가 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 사람은 한국에 있는 목사인 친구들, 자기의 신학교 동기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이제 이렇게 다 늙어서 어떻게 다시 목회를 시작하라는 말이냐?\\\" 그 다음 말이 걸작입니다. \\\"나는 장가 한 번 잘못 가서 내 인생 조졌다.(망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주님께서 \\\"너의 처자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를 능히 따를 수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의 뜻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술을 밥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떡을 보면 밥을 안 먹고 떡으로 배를 채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자네는 술과 떡과 밥 세 가지가 있으면 어느 것을 먹겠느냐?\\\" 그런데 이 친구의 대답이 또 엉뚱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나? 나는 술에 밥 말아서, 떡을 안주 삼아 먹겠네.\\\" 욕심도 많지요. 물론 세 가지를 다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일의 경우 하나를 위해서 둘을 버리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실로 위대하고 막대한 하나를 위해서 다른 적은 것을 모두 다 버리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버린 것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했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지난주간에 마음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봄방학을 이용하여 우리 교회 중고등부 부흥 사경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강사를 어렵사리 모셔왔는데, 그런데 문제는 우리교회 중고등학생들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과 20~30명. 주일날 출석하는 숫자보다도 훨씬 더 적었습니다. 기대하기는 주일에 출석하는 숫자의 두 배, 세 배가 되리라고 했었고, 또 그 강사에게 미안하니까 우리 교회 부목사님 중에 한 분이 \\\"내일은 배가하겠고, 모레는 그것에 또한 배가 되게 학생들이 오도록 하겠다\\\"고 말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더 적어졌습니다. 그런데 섭섭한 것은 우리 교회 제직의 자녀가 오지 않더란 말입니다. 모르긴 해도 공부시킨다고 교회에 안 보냈을 것입니다. 신앙 교육의 중요성을 우리 교회 학부모들이 모른다고 해서야, 어떻게 우리 나라 교회 교육을 앞날이 희망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학원 공부, 과외 공부만 대견하다고 보는 그런 눈에 어떻게 그리스도가 보이겠습니까?
우리가 사순절을 당하여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하십시다.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잃은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포기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위해서 희생한 것이 있습니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어느 목사님을 내가 알고 있는데, 그 분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셨고 고난도 많이 당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신사참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굴복하고 신사참배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일생동안 양심의 가책과 큰 괴로움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래도 양심적인 목사님이십니다. 교계의 지도자 가운데는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 성경에는 \\\"우상에 절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구약은 성경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조선인 교단\\\'을 만들고, 주동자가 되어 일본 사람들에게 아부하였고 심사참배에 대해서도 제일 앞장서서 신사참배를 주창하더니, 해방 후에는 자유당 시대에도 또 출세하고, 민주당 시대에도 또 출세하고, 군사 정권 시대에도 또 출세하고, 문민정부 시대에도, 또 출세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목사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말씀드린 목사님,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을 하시던 목사님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나 한 몸이라면 신사참배를 끝가지 거절할 수도 있겠는데, 늘 처자식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결국은 처자식 때문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못했다.\\\"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죽어야 할 시간에 죽지 못하고, 미워해야 할 시간에 미워하지 못한 탓에 그는 괴로움을 평생 가지고 지냈습니다. 나는 예수께서 본문에 \\\"원수가 남이 아니라 네 집안 식구이다.\\\"하고 하신 말씀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은 전도하는 현장에까지 예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들은 형님을 찾아서 집에 앉혀 놓고, 옛날처럼 대패질을 하고, 망치질을 하고, 목수 노릇해서 자기들을 먹여 살리는 \\\'청년 가장\\\'이 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예수가 미쳤다\\\"고 하는 말에 걱정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연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만이 내 부모요, 내 형제니라.\\\" 가족들은 왜 그렇게 노기 띤 말씀을 하게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님은 나사렛 한 동네의 인물이기 이전에 한 우주의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동생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식 지내고 오겠다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버지께 돌아가서 그냥 작별 인사만 하고 오는 자도 내겐 합당치 않다.\\\" 우상이 뭡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가시적인 것이든, 불가시적인 것이든 모두 다 우상입니다. 어떤 젊은 부부에게는 아기가 우상인 경우가 있습니다. 아기 때문에 예배를 아주 소홀히 드리는 그런 젊은 부부도 있습니다. 또는 아기 때문에 예배를 빼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아기는 우상입니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 때 어느 목사님이 밤에 심방 다녀오다가 공비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폭도들은 목사를 꽁꽁 묶어 가지고 창고에 쳐 넣었습니다. 창고에 들어가 보니, 소위 그들이 말하는 지성인, 부르조아, 불순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다 사형시키려고 대기시켜 놓은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더 밤이 깊어 새벽녘에 모두 다 꺼내다가 죽일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겁에 질려 있을 때에 한 폭도가 들어와서 소리를 쳤습니다. \\\"이 가운데 예수 믿는 동무 없소?\\\" 목사님은 죽을까 두려워서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아무도 예수 믿는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소리치던 사람은 다시 나갔습니다. 공비는 나갔지만 그때부터 목사님의 가슴에는 큰 고통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살아봐야... 결국은... 새벽녘에는 죽을 것인데... 몇 시간 더 살걸 가지고... 내가 비겁했구나!\\\' 목사님의 마음속에는 \\\'내가 비겁자다... 내가 가룟 유다와 뭐가 다른가?...\\\' 죄책으로 아주 무섭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금 지나자 그 공비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이 가운데 예수쟁이가 있소?\\\" 또 물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했었고 후회도 했었지만, 다시 그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여전히 목사님은 \\\"나요!\\\" 하고 나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공비는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세우면서 \\\"너 예수 믿지?\\\", \\\"너 예수 믿지?\\\" 하고 물었습니다. 모두 다 고개를 가로젓거나, 말로써 \\\"나는 아니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가슴은 막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곧 나에게 순번이 돌아올텐데 내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렇게 걱정하고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는데, \\\"너 예수 믿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순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겁나고 두려워했던 입술이 어떻게 된 일인지 \\\"예.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나는 목사입니다.\\\"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아마도 성령께서 그의 비겁을 물리치고 용기 있게 도와주신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순간 그 공비의 입에서는 쌍욕이 터져 나왔고 \\\"이런 반동은 먼저 처단해야 돼. 나와! 이 새끼야!\\\" 하면서 목사님을 끌고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끌려가는 목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끌려가면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돌아다보는 목사님의 얼굴에는 무엇인가 시원하고, 후련해 보이는 어떤 자유를 던져 주었습니다. \\\"내가 가룟 유다같이 비겁하게 살지 않았는데, 나도 이제 당당하게 순교자가 될 수가 있구나.\\\"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고, 시원한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공비는 목사를 끌고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자꾸 가더라는 것입니다. 가더니 그만 그의 손과 몸을 묶은 것을 다 풀어주더니 \\\"사실은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지만, 옛날에 나는 신자였습니다. 내가 사무실에서 들으니까 목사 한 사람이 잡혀 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구해주려고 내가 간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 속에 있던 신앙이 많은 것으로 쌓여 있고, 맑스-레닌의 이론으로 덮여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싹이 죽지 않고 있다가 목사님을 살려 주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비겁하게 살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죽기를 각오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하신 설교 제목은 \\\"일사각오\\\", 즉 \\\'한 번 죽기를 각오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설교를 하시고 그는 다시 감옥에 들어가서 결국은 나오시지 못하고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순간의 용기를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무서운 칼과 총 앞에서 순교를 결행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은 평생을 죽지 않고 살아가면서 순교자의 정신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더 어렵고 더 힘든 고난의 길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부활케 해 주실 것입니다. 정말 큰 일을 할 사람은 소시민적인 행복을 다 끊어야 합니다. 인류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놀고 싶을 때 마음껏 놀고,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육체의 소욕대로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가 버릴 것은 없는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포기해야 할 것은 없는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미워해야 할 것은 없는가?\\\' 한 번 생각하면서 오늘 사순절 둘째 주일을 지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카톨릭이 국교인 남미에 가면 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특히 금요일에는 고기를 절대고 입에 대지 않고, 사순절 기간 동안 기름진 음식은 먹지 않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기간을 더욱더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 많은 바늘을 자기 몸에 꽂는 사람도 있고, 또는 많은 유리 조각으로 자기 몸을 상처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못박히는 고통을 자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오늘, 내가 포기할 것, 잃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원수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 그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내가 명예욕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는 일은, 우리의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365장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늘 지고 가리다. 그 면류관을 쓰려고 저 천국 가겠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 이용자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라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이용해서 우리가 복 받고, 잘 살고, 안일하게 되려고 하는 그런 욕심꾸러기였습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6장에 있는 말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는 말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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