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죽으신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막15:21-47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막15:21-47





갈보리 십자가(十字架)

갈보리 십자가가 서 있는 골고다 언덕이 보인다.
중앙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양쪽에는 강도들의 십자가가 있으며, 저 한 쪽 모퉁이에는 일단의 여인들이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서 흐느끼고 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숨을 죽이고서 골고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으며, 한 쪽에서는 \'모욕\', \'희롱\', \'욕\'(29,31,32)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때 나는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무엇 하려고 갈보리 언덕을 큰 무리와 함께 올랐을까.

나는 무엇을 보고, 또 어떤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나. 나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겠지. 그러나 정말 그런가. 아니 갈보리 언덕에서만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면 다 되는 것인가. 오늘은 어떻고? 이제는 이미 일상의 습관이 되어버린 주님을 배반하는 행위는 무엇으로 설명하지. 세상과, 그때 그 무리들만의 죄악을 폭로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기에는 너무 위선적이다. 내 죄가 사해지는 것을 위해 오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한 언제나 나는 갈보리 사람들과 같은 공범(共犯)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25-26,33-34,37-38)

\"그 위에 있는 죄패(罪牌)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예수를 모욕하여 … 희롱하며 … 욕하더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께서 큰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주님은 이 땅이 지워준 모든 군상들을 홀로 온 몸으로 감당하시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떠한 방식(방법, 길)도 불필요 할 뿐이다. 그것은 \"이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38)에서부터 그 막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주변인들의 언행심사는 완전한 가짜라는 것을 상징한다. 주님만이 승리하셨음을 의미한다. 이제 유대교와 유대 성전시대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대할 것과 소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19-20)

한 시대가 가고, 동시에 전혀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성벽처럼 둘러 있는 \'휘장\'과도 같은 모든 세력을 우리 주님은 단 번에 다 그의 피로 가르셨다. 이것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빌2:8b)심으로써 주님이 성취하신 것이다. 이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선두로 해서 그 어떤 세력이 방해를 해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놓여졌다. 이 일에 주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셨기 때문이다(요12:24).



갈보리의 증인들(21-24,27-32,35-36,39-41)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1,31) 예수님을 죽이는 배역을 맡은 자들, 그리고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15)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준 빌라도의 행적, 못을 만들었던 대장장이, 십자가를 만든 목수, 가시관을 만든 로마 군인, 십자가를 언덕에 세운 사람들, 주님의 옷을 제비뽑던 병정들, 옆구리를 찌른 병정, 양손과 발에 못을 박은 사람들, 그 외에 호위하던 로마 병정들, 이스라엘 백성들, 도망친 제자들, 주님을 만났던 무리들, 구경꾼들, 여인들, 양편 강도들, 또한 \'나\'도 거기에 있었다. 참으로 얼마나 악한가.

이처럼 갈보리 언덕에 주의 십자가가 선 것을 모두가 보았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모두에게 다르게 보였다. 모두에게 동일한 분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는 거룩한 일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정작 이 은총의 수혜자인 사람들이 이를 모르고 있다. 동시에 전혀 엉뚱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게 문제다. 그래서 답답하다. 무엇을 말하는가는 그에게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척도다. 여러 유형의 증인들의 언행에서 이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본다.

①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36)

어떤 이들은 비아냥거렸다(35-36). 주제 파악이 안된 것이다. 웃어야 할 때 울고, 울어야 할 때 웃는 그런 정신나간 사람들이다. 이처럼 약간 핀트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십자가 주위에 있었으니,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을 리가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은혜, 구원, 하나님의 사랑)는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다. 지금도 십자가 앞에서 엘리야를 구경 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말씀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정작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죄악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적 무지야말로 가장 큰 신앙의 AIDS이다. 죄가 하나님과 그 사이를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참 빛 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요1:9-10)한다. 이렇듯 하나님을 보지 못한 영적 어두움이 근본적인 문제다.

② \"백부장이 …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39)

이처럼 고백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방인\'인 백부장이다. 메아리 치며 울려 퍼지는 백부장의 고백이 들리는 듯하다. 백부장의 솔로(solo)가 십자가 앞에서 온누리에 울려 퍼진다. 주님의 [가상칠언](架上七言)에 대한 화답이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을 때 외마디의 독주(solo)가 시작된다. 나는 어떤 화답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리고 있는지 …. 사실 이 외침은 제자들을 향한 고발이자, 그들의 불신앙을 깨우는 복음이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14:50-52)에 대한 마가의 일침이다. 정작 백부장의 자리에 있어야 할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③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 많이 있었더라.\"(40-41)

적게는 12명에서 많게는 5천명에 이르기까지 주님 곁에 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구속사를 목격하면서 그 비밀을 보는 자는 몇 무리의 여자들 외에는 없다. 여자들은 주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재정적인 후원자들이었다(눅8:2-3). 적게는 예수님을 포함하여 13명이, 많게는 수 십 명이 3년 이상을 살아가려면 만만찮은 비용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이들은 지금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곳까지,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맞는 순간까지 주님 곁에 있기를 원했다(16:1).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나 역시 배워야 하고 채워야 할 소중한 삶이다.

④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15,29, 눅23:48)

그 시대에도 복음과 십자가의 구경꾼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은 철저히 닫혀 있었으며, 하나님의 작품을 보지 못했고, 또한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단지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랬을 것이다. 주위 군중들 가운데 우쭐거리며 십자가를 향해 발길질을 하거나, 침을 뱉거나, 군병들이 우리 주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질 때, 또는 주님의 머리를 칠 때에도 구경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때론 웃고, 박수를 치고, 야유하고, 서로 그 장면을 보려고 아우성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다. 그들이 언제 교회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거룩한 열망(관심)이 있었던가.

모두가 부정적이며, 무관심하며, 방관하며, 거부(거역)하며, 정죄하며, 저주하며, 모욕하며, 참소하며, 대적하며, 완악하며, 거짓되며, 교만하며, 무례하며, 반항하며,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있다(14:64-65, 15:29-31). 그들은 더욱 소리 지르며 말하기를 예수님을 \"십자가에 오직 못 박게 하소서!\"(13-14)라고 외쳤다. 문제는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이 죄인지도 모르고 십자가 앞에 서 있다는 점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정말 그렇다.

인생의 죄를 들어내고, 인생의 죄를 해결하는 십자가 앞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서 자행되는 이러한 파렴치한 행위야말로 그 어떤 아이러니보다 더 역설적이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깊은 의미들을 알지 못했다. 단지 죄인이라는 안경을 쓴 눈에 보여진 것들만이 전부였다. 영적 의미나 가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는 관심조차, 그런 감각조차 없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말이다.

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 예수의 시체를 달라.\"(42-47)

주님은 오후 3시에 운명하셨고(34-37), 안식일은 오후 6시에 시작된다. 남은 3 시간 안에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야만 했다. 이 일을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인 요셉이 나서서 맡게 되기를 빌라도에게 구한다(43).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의 이러한 언행은 그에게 대단한 역풍이 될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공회원이었던 그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15:1). 그는 백부장처럼 다르게 산 사람들 편에 서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3일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의 행적에 대한 가장 진실한 증인이었다. 그가 제공한 무덤은 로마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것은 주님의 육체가 분명히 장사되었고, 또한 주께서 부활하실 때 이들은 새로운 증인들이 되었으며, 마침내 그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사신 것이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증거케 되는 섭리의 도구가 되었다. 요셉의 결
단은 이와같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맡은 배역은 무엇일까?
비겁한 제자들의 모습에서 의분을 느끼는가. 그러나 바로 나도 그 제자 가운데 하나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님을 희롱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을 보고 격분하고 있는가. 나 자신도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나가는 자들\"(29)의 예수님을 향한 모욕의 소리가 들려 오는 듯하다. 어떻든 십자가가 서 있던 갈보리 언덕에 모인 무리 가운데 나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처럼 살았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더 이상 감추어진 휘장 넘어가 아닌,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휘장 뒤의 영광을 보며, 주와 더불어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히4:16) 간다. 전적으로 주님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다. 골고다 언덕에서 나의 모든 죄를 철저하게 용서함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저 휘장 넘어 영광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축제에 참여하는 그날까지 나의 달려갈 길을 주님께 맡긴다. 나는 내가 봐도 믿고 맡길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언제까지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앞에 주님은 먼저 친히 십자가로 서셨고, 또 그 뒤를 따라 나를 세우시기를 원하신다는 생각, 해 본다. 나는 백부장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인가. 중간(회색)지대는 결코 없다. 휘장 안과 그 밖, 세상과 천국, 사탄과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편(곳)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부활을 찬양하는 축제를 맞이할까. 그 선택은 언제나 바로 내 몫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평생(영원)을 좌우한다. 나는 이 진리를 갈보리에서 배웠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직 은혜로, 오직 십자가로, 오직 주의 죽으심으로부터 말이다.

갈보리의 증인들의 각자 자신들의 언행을 따라 살았던 두 종류의 \'인생 보고서\'를 읽은 마음이 왠지 좀 착잡하고 무겁다. 하나님은 저들의 모든 삶을 이처럼 기록하심으로써 [최후심판대] 앞에 섰을 때를 미리 대비하신 것일까. 어떤 변명도, 이유도, 명분도, 논리도, 저들의 죄악을 역전시킬 수 있을까. \'십자가의 도\'는 그 어떤 다른 것으로 대신될 수 없다. 저들은 각각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저들의 족적을 가감 없이 성경에 기록하셨다면 나의 일생 또한 하나님께 기록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과연 어떤 [인생 보고서]를 기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록하고 계실까. 솔직히 좀 두렵다. 하지만 아직은 최종 보고서가 기록되기까지 남아 있는 여백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은 다시 지우고 기록할 수도 있고(회개), 새롭게 써 갈 수도 있고(헌신), 그래서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아직 남아 있는 내 인생이라는 여백을 주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들을 통해(달란트) 주의 영광이라는 열매로 채워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직 희망은 있다. 나도 백부장처럼, 여인들처럼, 요셉처럼 살고 싶다. 그리고 회개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 제자들처럼 내게 주신 기회의 때를 주님께 드리고 싶다. 내 인생 보고서는 어떻게, 또 무엇으로 기록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