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단 출27-1-8.눅1:69-71.롬8: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를 살려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은혜 속에서 삶의 자리를 만들며 믿음으로 순종하며 교회를 받들며 섬겨오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이 한해를 정리하여 가면서 오늘도 성막에 대한 말씀을 묵상을 하면서 한해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사실 성막을 공부를 하면서 오늘 기억하게 되는 번제단은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현대인들에게는 혐오스러운 내용처럼 보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동물을 잡아서 그 피를 뿌리고 불태우는 제단입니다. 그곳에는 날마다 짐승을 잡기 때문에 날마다 짐승의 소리와 그 피 냄새와 고기를 태우는 냄새가 진동을 할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천박하고 야만스러워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상당히 소중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은 왜 이런 제단을 만들어서 끊임없이 짐승을 죽이고 그것을 태우는 역할을 하는 하나님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이 아니고는 하나님 앞으로 나갈 방법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순종의 사람인 아브라함을 생각을 하여 보고자합니다. 그는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가 청년이었을 즈음에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22장에 말씀을 하십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모리아 산에 드리라는 것입니다. 번제는 그리 쉬운 제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을 합니다. 다음에 번제에 대한 말씀을 묵상 할 수 있는 기회가 올것입니다 만은 번제라는 히브리어는 ‘오라’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말로 해석을 한 단어는 ‘올라간다’는 듯입니다. 번제는 태워서 그 연기가 하늘에 올라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들을 죽인다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아들을 번제단에 올려놓고 그를 향하여 단검을 내려칠 때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아브라함이 순종을 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번제단에 올렸던 사실을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성막은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약도입니다. 이 약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정확히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 성막을 향하여 문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제일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번제단이 보입니다.
어느 교회에 가보면 촛대가 있고 그 촛대를 바치는 제단이 있는데 그 제단의 의미가 번제단을 상징을 합니다. 우리는 기억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려 한다면 그것의 첫 번째 신앙적 자세는 우리를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단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예수를 볼 수가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하지 않고 교회의 한 일원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멤버요 한 교회의 식구라고는 할 수가 있지만 정확히 하자면 그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방황을 하는 이라면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번제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번제를 드릴수가 있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번제를 받으시는 분이신가요? 아닙니다. 다만 그분에게 우리가 번제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 회개라는 번제의 의식을 갖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는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회개를 하기 위한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고민하여야 할 것입니다. 회개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 많은 갈등과 고민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에게 와지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집나간 둘째 아들을 생각을 하여 봅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돼지의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고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고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회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것 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복을 얻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는 성막으로 들어와서 이 번제단 앞에서 흠 없는 제물을 가지고 와서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킨 후에 번제단에 불태워드림으로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단」은 히브리어로 「미쯔하」라고 하는데 이는 「동물을 학살하다」. 「죽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번제단은 오늘 구약성경을 보면 「이렇게 만들지니라」고 하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번제단에 쓰이는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아니 번제단에 쓰이는 모든 것들은 놋으로 싸게 하였던 것입니다.
조각목의 의미는 버림바 되어진 들판의 나무들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를 놋으로 싸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을 드린 것처럼 또한 놋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놋은 저주와 승리를 상징을 합니다. 십자가는 치욕적인 사형틀 입니다.
이 틀은 많은 사람들에게 죽임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승리를 상징을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나타내 줍니다. 요한은 주님을 상징을 할 때에 우리 주님을 주석같다고 표현을 합니다.
계1:15적의 말씀을 보시면 “그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된 주석과 같고”라고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상17:5-6절을 보면 군인들의 갑옷과 투구는 놋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승리를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놋뱀을 봄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은 자들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놋뱀에 달린 것은 저주요, 쳐다보는 것은 승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이지만 승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버림받은 조각목은 들판의 버려진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십자가가 아니면 도저히 건져질 수 없는 것입니다.
불길에 싸여 있는 못으로 싼 조각목이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있는 나무가 탈 것 같은데 그 나무는 타지 않는 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놋은 금보다 더 견디는 것이랍니다. 금은 1065도에 녹고 놋은 1085도에 녹는 다고 합니다. 조각목은 불 앞에는 한줌의 재로 남지만 놋으로 싸여진 놋은 번제단의 40년 동안을 견고하게 지키고 있을 정도의 넉넉히 감당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놋으로 싼 조각목은 공기에 접하지 않으면 조각목은 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싸여진 조각목은 전혀 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들은 결단코 죽임을 당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놋으로 안과 밖에 싸여 있는 사람이나 교회는 결단코 멸망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풍진 광야 같은 세상을 한해동안 이렇게 감격스러운 모습으로 살아 올 수가 있었던 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선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씌워진 자들은 하나님이 그를 세워 가시고 그를 책임지시는 존재로 만드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몇 달 전에 한국인이 중국에서 사형을 당한 일로 인하여 국권의 힘이 초라해진 적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만약에 미국인이었다면 중궁에서는 어떻게 하였을까? 그냥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은 더 큰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여하심과 돌보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크기가 가로 세로가 2.5m 높이가 1.5m입니다. 성경에서는 5라는 솟자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의 솔로몬의 5행각에 모이는 사람들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남편이 5이라고 하였습니다. 번제단은 짐승이 학살을 당하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번제단의 높이가 3규빚입니다. 성경에는 3이라는 숫자를 완전의 숫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성 삼위일체의 숫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번제단을 통하여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몸부림이 번제단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동시에 번제단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들을 완전한 자리로 인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 자리가 번제단의 흔적입니다. 번제단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 지옥의 자리에서 우리를 건지어 내어주신 참으로 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은혜 속에 날마다 거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번제단의 특징이 무엇일까? 번제단은 사실은 교회의 모형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교회와 일치를 합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 많은 건물들 중에 오직 교회만이 사람의 죄를 사하고 구원을 주는 곳은 오직 십자가가 있는 교회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건물을 지었다 할지라도 교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이야기하는 교회만이 죄를 해결하여 주는 예수를 소개하는 유일한 성별된 장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번제단 입니다.
그런데 번제단은 3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피」라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특징은 피라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옆에서 잡은 제물의 피는 번제단 사면에 뿌려지게 됩니다.
번제단은 소 하나 마리를 놓으면 꽉차는 곳입니다. 그런 작은 사면에 피를 계속하여서 뿌려지게 되는 곳입니다. 피가 없는 번 제단은 번제단이 아닙니다.
제사가 없는, 제단 제물이 되어 번제로 드려지지 않는 제단은 사실은 번 제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제단의 특징은 피라는 것입니다.
피가 있지 않는 제단을 아무리 만들어 놓아도 그곳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교회의 뿌리는 번 제단입니다. 교회의 특징은 피입니다. 십자가의 피입니다. 이곳에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만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가 그리 깨끗하지 않아도 교회가 그리 탁월하게 세상의 건물과 차별됨이 없어도 교회에 그리스도의 피가 있으면 그곳에는 번제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가 오늘날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교회에 십자가 없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날마다 부르는 십자가의 찬송이 이제단안에 가득 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다음으로는 번제단에는 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인 번제단의 자리에는 늘 불이 준비되어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가 동산에서 돌 단으로, 돌 단에서 성막으로 성막에서 성전으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돌 단 위에 제물을 얹어놓았을 때에 불이 임하였습니다.
횃불이 지나 갑니다. 창15:17절을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더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성막을 만들어 놓았을 때에 번 제단에 하나님이 불을 주셨습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제죄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 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 나와서”라고 번제단의 불을 이야기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첫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
처음 교회가 시작을 할 때에도 불이 내려왔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라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라고 첫 교회의 불의 사건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교회는 불과 같이 시작을 합니다. 때문에 교회에서 불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불을 받으리고 하는 것은 광신적인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불이 없으면 냉냉 합니다. 가슴에 성령의 불이 없으면 냉냉 합니다. 교회에 불이 없으면 교회는 차갑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는 교회는 진정으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불을 이야기를 하여야 합니다.
불이 교회에 있는 한은 죄인들이 의로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서6;8-13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제단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하십니다.
삼상 3장을보면 제단의 불빛이 희미하게 시작이 되면서 영적이 어두움이 엄습하여 온 것입니다. 엘리 선지자는 그 거룩한 제단의 불빛이 희미하게 만들어 진 것을 알지를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는 그 자리만을 지키려고만 하였던 것입니다. 성전의 불이 희미하여가면서 그들은 그 거룩한 법궤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를 거절한 백성들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능력이 사라지면 모두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로 인하여 불레셋 사람이 승리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방법들이 아무리 탁월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성령의 지시를 거절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인도를 받을 수가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드라쉬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강하게 되었을 때는 번제단에 올려놓았던 제물은 삽시간에 다 타버리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약할 때에는 이 불이 약하여 비둘기도 태우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불만 보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인도 앞에 아니 우리들의 영적 상태는 어떤 한지를 스스로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영적인 성령의 인도를 거절하지 않고 늘 인도를 받을 수가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2성전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로마가 성전을 둘러싸고 ‘성전 번제단에 불을 피우기 위하여 나무를 성안으로 들고 들어 갈 수가 없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보초를 길목에 세우고 성전 안으로 나무를 들고 들어 갈 수가 없도록 엄격히 지켰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까지 그들의 가방 속까지 샅샅히 뒤지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번제단으로 나무를 나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번제단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을 꺼뜨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불을 피우지 말라는 황제의 명령보다 더 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샅샅히 뒤지면 성전 안으로 나무를 가지고 말라는 황제의 명령 앞에서도 어떻게 불이꺼지지 않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몹시 두려워하는 가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벌레를 먹지 않은 나무를 잘라서 사닥다리 옆에 붙이고 그 사닥다리를 메고 당당히 보초 옆을 지나갑니다.
그 보초는 멈춰라 그 사닥다리는 무엇이냐 보초가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닥다리로 우리 집 지붕 위에 새집을 놓으려는 것이요 태연하게 로마군병에게 말을 건네자 로마군인은 조금도 의심하지를 않았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간 그는 사다리 옆에 놓인 나무를 조금씩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번제단에 던졌습니다. 그후에 이스라엘 은 이 가문을 「브나이 샬마이」라는 가문으로 불렀답니다. 이 뜻은 사닥다리가문이라는 뜻입니다. 제단 위의 불은 꺼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번제단에는 뿔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뿔은 권세를 나타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뿔은 힘을 상징을 합니다. 그런 의미로 하나님은 번제단의 네 군데에 네 뿔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생명을 뜻하는 뿔이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번제단의 이 뿔만을 붙잡으면 그는 생명을 보호받았습니다. 누구도 이 힘이 있는 뿔을 잡고 있는 자에게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신것입니다.
이 뿔은 예수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이 뿔은 바로 도피성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들의 죄의 억울함이나 실수로 인하여 살인을 하는 경우든지 억울하게 피해를 받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이불을 붙잡으면 그는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에 대한 반역자 아도니아가 도망을 가다가 이 번제단의 뿔을 붙잡았습니다. 왕을 향하여 반역하는 즉시 사형입니다. 그러나 아도니아는 반역은 하였지만 번제단으로 도망을 가서 이 뿔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아도니아를 붙잡으러 왔던 병사들이 솔로몬에게 이렇게 고합니다. ”왕상1:51절에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아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이 오늘날 칼로 자기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이 보고를 받은 솔로몬은 아도니아를 살려 주었습니다.
제단의 뿔은 그것을 붙잡기만 하면 그는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던지 살리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번제단에는 그 뿔이 동서남북에 네 개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느 하나도 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 어린 관심입니다. 그 먼길을 혹은 순간적으로라도 그 손을 뿔에 가깝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제단의 뿔은 어느 누구도 잡으면 살수가 있습니다. 그 뿔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제단은 움지기이는 제단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단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번제단은 채로 꿰어서 움직일 수가 있는 제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도 움직이는 제단입니다. 걸어다니고 움직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약점을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제단의 뿔을 잡기를 원하시며 그리고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올 한해도 그분의 은혜로 살아왔는데 돌아오는 새해에도 그 제단의 뿔을 잡고 용서가 선언되어지며 감싸주시는 그분의 은혜 속에서 승리와 성숙의 한해가 되어지는 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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