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의 울타리

성막의 울타리/출27:9-19,요10:7-9,계11:1-2

성막의 울타리
출27:9-19,요10:7-9,계11:1-2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명령하신 성막을 만드는 과정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막 하나 하나에는 참으로 놀라운 거룩한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으로 가까이 나아갈수가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 성막에 가까이 갈수록 밝고 흰 세마포장으로 둘러친 성막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막의 크기는 가로50 규빗이고 세로가 100규빗 입니다.
이것은 규빗이라는 용어를 먼저는 기억을 하여야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이야기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한 규빗은 약50cm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평균을 잡아 본다면 50cm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길이가 가로는 25m요 세로는 50m입니다. 이렇게 계산을 할 때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서 지은 성막은 총평수가 378평이나 되는 울타리로 쳐진 성막입니다.

성막은 울타리로 쳐저 있는데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는 울타리입니다.
성막에는 동서로는 10개의 기둥이 있고 남북으로 보면 20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둥의 크기는 약 2.5m입니다.

울타리의 60개의 기둥은 모두가 놋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놋바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리가 달려있어서 서로를 견고하게 하여 줍니다.

성경에는 놋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민21장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을 가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원망을 합니까? 그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어 죽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를 하시는데 홍해 길로 좇아서 에돔 광야를 지나게 되자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원망을 하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를 하여서 이 광야에서 죽게하려 한다는 원망입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죽게하지 하면서 원망을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때때로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어서 광야를 지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만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것은 이 박한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박하다’라는 표현은 이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보잘것없는 것인가? 하나님이 그들의 사정을 아시고 가장 아름다운 음식을 만들어 주셨건만 그들이 표현이 보잘것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니은 그들에게 불 뱀을 보내어 죽게 합니다.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기쁨으로 감사를 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선한 것을 보내셔서 인도를 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음시기 바랍니다.

불평을 하지 마시고 가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원망보다는 기쁨을 나누시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원망을 하다가 불 뱀에 물려서 죽임을 당하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니은 또다시 마음은 용서를 하십니다.
그들의 뱀에 물려서 죽임을 당하게 될 때에 살 수 있는 방법을 허락을 하십니다.

그것은 모세가 구리 뱀의 형상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달아놓고 그 장대를 바라보는 사람만이 살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불 뱀에 물렸다 할지라도 그 장대에 달려있는 놋뱀의 형상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들이 상처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광야 중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후에 놋은 십자가를 상징을 합니다. 또한 울타리의 재료로 사용을 하였던 금과 은은 믿음을 상징을 합니다. 변함이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둘렀던 흰 세마포는 성결을 의미합니다.
흰 세마포는 출입금지를 뜻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무조건 환영이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 원칙적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금지되어있습니다.

이세마포가 상징하듯이 희고 깨끗하신 분에게 흠 있는 자들이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세마포는 예수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세마포와 우리는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룹니다.

그분의 순결과 우리들의 정결치 못한 「음란하고 더럽고 죄많은 자들입니다.」
롬3:10절은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이게 되었고 모두가 범죄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먼저 이 사실을 인정을 하여야 이 세마포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곳으로 나아가 성막의 주인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막을 둘러치고 있는 울타리는 십자가만이 우리를 살리며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금과 은 같은 믿음만이 우리를 성결케 한다는 의미를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울타리 전체는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그것은 「복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저께 공사를 하고 있는 인부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혹시라도 교회를 나가고 있는 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모두가 한결같이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로 시작을 하였습니다. ‘당신들이 하루종일 일을 하여서 그 돈으로 자녀를 가르치고 있지만 당신들은 그 자식을 믿을 수 있는냐?’ 하고 물었더니 믿음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누라도 믿지를 못하는데요 뭘 자식까지 믿습니까?’ 내가 일을 나오면 어디를 갔다가 오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냥 살아갑니까?

구별하셔야 합니다. 정확하게 자녀들에게 알려주셔야 합니다. 죄와 불의와 어두움과 정의와 의와 밝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를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교회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구별을 짓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복음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세워주는 곳입니다.
언뜻 생각을 하면 울타리를 율법을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울타리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구별하여 주는 경계선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24장을 「성막 탄생장」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는 두 장으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1:에서 23장 까지는 율법입니다. 율법에는 613가지의 율법이 들어있습니다. 그 율법에는 「하라」는 율법이 「248」가지와 「하지말라」는 율법이 365가지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의 뼈마디가 248마디요 사람의 혈은 365가지랍니다. 그래서 마디와 혈이 조화를 이룰 때에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잇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에 건강한 믿음의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을 먼저 주시고 성막을 나중에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 누구도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613가지의 율법을 어떻게 지킬 수가 있습니까?

에덴동산에는 율법이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도 인간이 지킬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613가지의 율법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율법을 다 지키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완전하게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율법으로는 어떤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은 그러면 무엇을 준비하였습니까?

그것이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이 복음에 응답을 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우리들에게 필요 없는 것인데 하나님이 왜 만들어 놓으셨나요? 율법은 율법대로 필요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나누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율법으로만이 완전하지가 않습니다. 율법은 생명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완전합니다. 여자는 여자대로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남자만으로는 생명을 탄생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을 때에 생명을 탄생시킬 수가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바르게 가르킴입니다.
율법은 정죄 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목적은 용서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율법은 관계가 있습니다.
용서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지를 안습니다. 용서에 따르는 율법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막 교도소를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는 죄로부터 용서가 되었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 모진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좋은 것만 보기로 합니다. 좋은 것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생각만을 하려고 합니다. 만약에 잘못보면 또다시 그에게는 교도소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때문에 그는 율법적인 자기 조절을 합니다. 철저히 율법주의자가 되면 용서를 모릅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그것에는 정죄만 있지 책망만 있습니다.

결국 율법에 머무르면 저주에 으르게 되며 복음에 가까이 가면 그는 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율법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용서를 가르켜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알므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의 집나간 둘째아들의 모양을 봅니다.
그 둘째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돌아온 자식을 보고 아버지는 용서를 합니다. 그러나 그의 형은 율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죄를 지은 녀석에게 살진 양을 잡아준다는 것이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용서를 선포하고 형은 정죄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성막의 울타리는 율법의 장소를 구분하는 곳입니다.

율법으로는 그들의 죄를 가리울 수가 없어도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가릴 수 있는 장소를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곳이 성막입니다. 그들이 죄를 가리우기 위하여는, 그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는 이 울타리를 지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울타리의 높이는 약2.5m가량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그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습니다.

성막은 예수님의 모양입니다.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예수를 믿는 것은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라구요. 그냥 적당하게 믿는 것도 아니라구요. 예수를 믿는 것이 참으로 큰 축복인줄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그랬답니다. 「예수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믿겠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말씀을 하시기를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보는 것이지 보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너머에 게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울타리의 의미를 생각을 하여 보겠습니다. 울타리는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보호입니다. 울타리의 안은 보호를 받는 장소이지만 밖은 보호를 받을 수가 업습니다. 오늘 읽은 계시록의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또 내가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 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거 하십니다.

성전 안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전 밖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홍수 속에 노아의 가정은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방주 밖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지만 복음 밖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늘 예수 안에 있는 복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늘 구원에 감격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늘 주님의 날개아래 거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주님이 보호하여 주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분의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안전입니다.
울타리 안은 안전합니다. 밖은 언제나 화가 미치는 곳입니다. 그곳은 늘 풍랑과 바람이 부는 광야입니다. 독충과 전갈이 있는 곳입니다. 광야의 맹수가 있는 곳입니다.

60개의 기둥은 40년 동안 한번도 보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이런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날에 어떤 광경이 우리들의 시야에 펼쳐지겠는가? 그런 광경을 생각을 하여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날에는 분명히 울타리안과 밖의 차이는 생명과 저주의 차이라는 사실을 기억 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분명합니다. 그날에 구원받는 자리에 서기를 바랍니다. 울타리는 소유를 뜻하고 있습니다. 울타리를 친 안은 안전할 뿐만 아니라 그의 소유가 있는 장소입니다.
울타리는 주인의 것입니다. 그 울타리는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울타리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울타리 밖에 있으면 그는 마귀의 사람입니다.

이사야서43:1-3절의 말씀을 보시면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 하나님의 소유가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선언한 것처럼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우리에게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의 소유권이 있는 백성인줄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 는 엄청난 선언에는 하나님의 남다른 계획이 또한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공급입니다.
요15:7절의 말씀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안에 있다는 것은 공급의 원천자 안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이 공급됩니다. 은혜가 공급됩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때때로 주님의 은혜 속에 살게 되는 줄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를 하신 후에 어떻게 공급을 하여 주셨습니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공급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목이 마를 때에는 바위를 쳐서 물을 내시고 고기를 요청할 때는 메추라기를 보내 주신 분이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증거입니다.

울타리 안은 늘 어떤 모양을 가지고 공급하여 주시는 곳입니다. 울타리 안에 사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구별입니다. 울타리안과 밖은 구별입니다. 양과 염소가 구별이 되는 곳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구별이 있는 곳입니다.

복과 저주의 구별이 있는 곳입니다.
요한복음 10:7-9절을 보면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하십니다.
구별되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장소가 어지러워도 말씀으로 구별하면 그곳은 성소가 됩니다. 구별되어지는 장소를 선택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날을 구별하십시오. 하나님의 날을 구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날은 거룩한 날입니다.

이날은 주일날입니다. 이날은 주님을 위하여 하루를 사용하는 날입니다. 이날을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는 날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이날을 구별함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를 얻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건을 거룩하게 구별을 하십시오. 이것은 구별하면 성물 입니다. 우리는 성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들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나의 노력이나 나의 수고가 들어가지 않으면 나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여겨서 가치 없이 사용하고 이용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가르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가치 없이 이용하는 것들입니다.

교회의 물품을 거룩하게 사용하는 버릇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책망도 안 하십니까? 아이들이기에 그럴 수 있다는 논리로 그냘 내 버려 두십니까? 공짜버릇, 가치 없이 사용하는 버릇,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칩니까?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만 유독 그렇게 가르칩니다. 언젠가는 안다구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구별하는 버릇을 드리십시오.

지난 목요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가는데 교육관 4층이 불이 환하게 켜져 있기에 끄려고 올라갔더니 아이들이 공부를 한답시고 방안의 불을 얼마나 뜨겁게 보일러를 쾌속난방으로 계속하여서 틀어놓았던지 내가 느끼기에는 싸우나 같았습니다. 방안에는 냄새나는 운동화를 다 신고 공부를 하는 건지자는 건지! 만약에 자기의 집이라고 생각하여 보세요. 그렇게 하겠어요? 아니지요.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소중한 땀과 소중한 물질과 소중한 기도가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거룩한 성물이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영국은 한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할만큼 전세계에 많은 식민지를 둔 나라였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식민지 사람들은 참으로 유순하고 잘 복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총독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그 주민들이 아끼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만 폭도로 변하고 말았고 그들은 총독과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영국은 그들의 그 행위를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토록 유순하고 말을 잘 듣던 그들인데 왜 그리도 폭도로 변했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조사를 해보니 그 의자는 아무도 앉지 않는 의자였습니다. 그 의자는 그들의 조상이 앉는 의자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자리에서 본다면 성도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룩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로 성도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유지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울타리 안은 분명히 구별되어지는 곳입니다. 그 울타리를 우리는 지나야 합니다. 그곳은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