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하다 그릇깨기

설거지 하다 그릇 깨기/벧전3:7-12

설거지 하다 그릇 깨기/벧전3:7-12
2001-11-08 10:50:34 read : 97

1. 그릇들이 모여사는 곳, 가정

(1)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그릇 인생을 의미합니다

어려서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40대가 지나고 난 뒤에 그런 말을 쓰는 사람들은 별로 못보았습니다. 시기가 늦었다고 하는 것인지, 단지 어렸을 때나 어울리는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이 말은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노인도 다 그릇이란 말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토기장이라고 하셨습니다(롬 9:21). 인생은 흙으로 지음받은 질그릇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뚝배기 같고 어떤 이는 된장단지이고 또 어떤 이는 청자나 백자와 같다는 말입니다.

물론 더럽게 쓰이는 똥요강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 시대 똥요강이 냄새만 나고 버릴 시기가 없어 못버리는 애물단지였습니까? 아니요, 제 생각에는 나라 상감님도 똥요강을 필요로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떤 그릇은 냄새나고 고약한 그릇 같지만 나름대로 얼마나 긴요하게 사용되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에 보면 큰 집에는 금, 은, 목기(木器), 토기 등 여러 가지 그릇이 있으나 누구든지 자기를 깨끗케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기인데도 귀히 쓰는 그릇이 聆?수 있고 토기인데도 귀히 쓰는 그릇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에서 말한 귀히 쓰는 그릇이란 다 금그릇과 은그릇처럼 쓰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용기(容器)는 담는 것이듯이 사람에게도 무엇인가를 담아야

그릇은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릇은 용기(容器)라는 말입니다. 용기는 용량(容量), 용적(容積)이 얼마냐는 것 같이 담는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용납(容納), 용서(容恕), 용인(容忍)이란 말도 같은 용 자요 관용(寬容)이라는 말도 같은 용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릇이 그냥 빈 그릇으로만 있으면 그다지 쓰이는 게 아닐 것입니다. 만일 깨질 때까지 아무 것도 담기지 않고 있는 그릇이라면 무용지물이라 할까요? 큰 그릇이라면 크고 많은 것을 담고 깊은 그릇이라면 깊이 있게 담고 넓은 그릇에는 넓은 것을 담고 깨끗한 그릇에는 깨끗한 것을 담고 귀한 그릇에는 귀한 것을 담습니다. 1년 동안 먹을 장이나 김장을 사발에 담을 수 없고 미역국을 접시에 담지 않으며 더러운 것을 깨끗한 그릇에 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릇은 용도에 맞도록 쓰입니다.

사람도 무엇인가를 담아야 할 때 담기 위해 있습니다. 다른 그릇에 옮겨 담을 때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나누어주게 하려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자식이 부족한 것은 먼저 된 큰 그릇인 부모에게 채워져 있는 것을 자식 그릇에게 나누어줍니다. 때로는 자식에게 있는 것이 더 많아서 부모에게 나누어줍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각자가 넘치게 가지고 있는 것 혹 더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고 채워 주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어떤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재산을 물려주고 받고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를 가지고 큰 그릇, 깨끗하고 귀한 그릇이라고 여긴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란 그릇에는 단순히 재물로 환산할 수 없는 더 큰 담을 것이 있고 본래 그릇에는 이것을 채우는 것이 주된 목적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설거지하다 그릇 상합니다

그릇을 사용하다 보면 금이 가거나 이가 빠지거나 깨져서 못쓰는 경우가 생깁니다. 어떤 것은 너무 낡아서 못쓰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새 것이고 귀한 것인데도 사람의 부주의로 못쓰고 버려야 하는 게 있습니다. 금이 가거나 상처가 난 어떤 그릇은 다시 잘 수리하면 감쪽같이 회복되는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아주 못쓰고 너무 아까운데도 버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실수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이에 금이 가고 상처가 나고 때로는 깨지기도 합니다. 허물이 많은, 완전하지 못하고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능력이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릇이 오래 되어서 힘이 없이 깨어질 때 그것을 용납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실수를 서로 용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릇을 못쓰게 하는 일은 경솔히 하고 부주의로 인하여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값비싼 그릇을 다룰 때는 매우 조심하여 다루듯이 서로의 관계에서 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정말 있습니다.



그릇은 수시로 안팎을 깨끗이 해야 쓸 때에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거지를 하다가 귀중한 그릇을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거지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그릇을 깨거나 금이 가게 하거나 이를 배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살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새색시나 남자들이 오랜만에 설거지하려다가 보면 그럴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귀한 그릇을 맡기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떨어뜨리고 부딪혀도 잘 안 깨지는 것, 깨져도 그리 아깝지 않은 것이 제격일 것입니다. 그러자면 플라스틱 싸구려나 버려도 괜찮을 중고그릇이 적당할 것입니다. 설거지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결과가 그리 좋지 않게 나오는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라는 그릇들 사이에 설거지도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그릇도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25절부터 26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그릇에 비유했고 안팎을 깨끗이 설거지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서로의 단점을 고쳐주고 약점을 보완해주고 장점을 더 살려주는 것이 사람들 간에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설거지를 한 뒤 더 좋은 것을 가득 담아주려고 계획했었는데 설거지 과정에서 이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아버지가 아들 그릇을 설거지 하다가 아들이라는 그릇을 깨뜨렸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어머니가 딸이라는 그릇을 설거지하려다가 이가 빠지게 했다면 그것도 슬픈 일입니다. 만일 시어머니가 며느리라는 그릇을 설거지하다가, 장인이 사위라는 그릇을 설거지하다가 금이 가게 하거나 이가 빠지게 한다면, 심지어 아예 그릇이 깨지게 한다면 비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설거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설거지하는 일에 내 자신이 서툰 사람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설거지를 하려드는 사람에게는 차라리 싸구려 그릇이나 낡고 별 볼일 없는 그릇을 맡기는 것이 적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이 그런 천박한 그릇들로 만들어져 있기를 원하십니까? 천박한 아내, 싸구려 며느리, 아깝지도 않은 사위 이런 그릇들로 모여있는 집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차라리 쉽게 화내고 오해하기를 더 잘하고 참는 일에는 전혀 길들여져 있지 않는, 설거지에 자신이 없는 자신이라고 판단되거든 그것을 전문가에게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그릇이 정말 수십 억보다 더 귀한 그릇이라고 여기신다면 그것을 전문으로 설거지하실 수 있는 분의 조언을 듣거나 그의 손에 맡기십시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조언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약한 그릇을 더 보호해야 합니다

설거지를 할 때 대부분 잘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하는 것을 보면 이 그릇 저 그릇 부딪히는 시끄러운 소리는 많이 나고 깨끗하게 되지도 않고 떠벌려 놓기는 가관입니다. 서툰 사람이 설거지를 할 때 가장 먼저 깨어지고 가장 크게 부서지는 그릇은 약한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같이 설거지를 해도 우선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보호해야 하는 그릇은 약한 그릇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시비를 가리는 안 믿는 가정을 보면 옥신각신합니다. 설왕설래(說往說來)합니다. 여기서 설(說) 자는 혀 설(舌)이 아닙니다만 말이 오가다 보면 설전(舌戰)으로 번집니다. 그것은 설거지가 완전히 그릇 깨는 판으로 끝이 납니다.

언쟁에서 대개의 경우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아내입니다. 아내에게 금이 가게 하거나 이가 빠지게 하거나 깨지게 하는 자는 설거지 할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싸구려 플라스틱이 어울립니다. 중고 가게에서 거저 얻어오거나 누가 다 쓰다가 길거리에 내놓은 것 주워서 쓰는 게 적당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렇게 설거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릇을 잘 설거지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용납할 만한 용량이 큰 그릇인 사람입니다. 귀한 그릇과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자신이 잘 살피고 삼갈 줄 아는 그릇입니다. 그는 가장 큰 그릇 곧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2.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서로 깨끗하고 귀한 그릇으로 쓰일 수 있습니까?

(1)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지식\'이라는 단어를 많은 영어성경들은 understand 즉 \'이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내의 입장에서 이해를 많이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싱크대에서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그릇은 약한 그릇입니다. 가정에서 가장 많이 관심을 받아야 할 대상은 아내입니다. \'이해\'란 말에서 영어는 \'아래에\'라는 뜻인 under와 \'서다\'라는 뜻인 stand가 합쳐서 된 단어입니다

. 아내를 이해하려면 그 아내에 자리에서 보아야 제대로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어 오셨고 가장 낮은 사람의 위치까지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옛날 왕이 백성의 사정을 알기 위해서 어사를 보내거나 친히 살필 때 했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원어에서 \'그노시스\'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지식\'이란 말이 더 적합합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 가정이란 무엇인지 성경적인 지식, 하나님이 본래부터 계획하신 지식, 인간 근본목적에 대한 지식, 인간의 영원한 미래에 대한 지식을 갖고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에 있어서 동거의 첫째 지식은 하나에서 둘이 나와 서로 돕는 자가 되었고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의 갈비뼈로 지어진 아담을 자기의 분신으로 알았고 그 갈비뼈로 지음받은 하와는 아담의 가슴에 있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동거의 둘째 지식은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되라\'는 것입니다(창 2:24).

결혼을 한 후에도 자기 가정의 모든 문제를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의 완전한 행복을 채우지 못하게 합니다. 정신적으로도 독립되어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요즘 \'마마보이\'라고 부릅니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 맛있었다고 투정하는 남편, 가끔 전화해서 시부모나 친정부모에게 아내의 약점을 고자질하는 남편은 아직 결혼할 정신연령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아직 사회에 내놓아도 될 성년이 되지 못했기에 갈비뼈를 꺼낼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어떻게 독립된 자녀로서 효도를 할지 알지 못하는 무지한 남편은 설거지를 할 때도 약한 그릇을 골라 깹니다.

동거의 셋째 지식은 두 사람 다 죄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심경을 경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창 3:16-19).

먼저 하와가 범죄를 했습니다. \'동산 중앙의 나무 실과\'를 언급한 점이나 뱀이 에덴 동산에 침입했을 것으로 보아 하와는 동산의 가장자리에서 뱀에게 시험을 받았는데 그 때 아담은 다른 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와가 뱀의 거짓말을 은혜롭게 받아들이고 동산 중앙으로 아담과 함께 가서 그 실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었을 것입니다.

뱀이 저주를 받은 후,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과 수고하며 자식을 낳을 것이며 남편을 사모하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3:16). 남편을 사모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내는 그녀를 다스리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남편이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아니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집사가 될 사람에게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들이 저주란 말입니까? \'사모하다\'라는 말이 번역한 문제와 아내와 가정간에 구별을 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모하다\'라는 동일한 단어가 창세기 4장 7절에 \'소원하다\'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인에게는 죄를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지배하고 정복하고 저주하고 미워하고 멀리하고 압박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어떤 식으로든지 다스리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동거의 셋째 지식입니다.

그러면 \'사모하다\'란 말을 다시 \'소원하다\'라는 말로 바꾸어서 이해를 해 봅시다. 죄가 사람을 잡기 위해 어떻게 합니까? 죄는 모든 사람 위에 주인으로서 뿐만 왕노릇을 하려고까지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 되었고 죄와 사망이 모든 이들 위에서 왕노릇해 왔습니다(롬 5:13,14). 이것을 바울은 죄가 주관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롬 6:14; 7:1). 죄가 갖고 있는 속성이 아내가 남편에게 대해서 갖고 있는 것이 범죄 후에 자취한 저주입니다. 아내는 한 사람도 예외없이 자기 남편을 주관하려고 합니다. 가만히 두면 배가 산으로 올라갈 것 같은 불안함이 하와의 딸들한테는 예외없이 다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보면 대개의 남편들은 자기 아내에게 주관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화로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공처가가 아닌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더니 모두가 나왔더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 한 사람이 남아 있었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멋있고 반갑고 신기하고 놀라와서 몹시 부러운 눈치로 그에게로 다가가 도대체 아내를 순종케 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남은 그 사람은 말하기를 \'여러 사람이 가는 곳에는 가지 말라\'고 아내가 명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자리로 나갈 수가 없다고 말했답니다.

여자에게는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때 즉 경수가 끊어지기 전까지 매월 겪는 잉태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낳을 때도 끔찍한 해산의 고통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자를 주관하려는 의지(소원)이 강하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와의 딸들에게 이와 같은 저주가 내려졌습니까? 그것은 하와가 남편의 말을 믿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뱀의 말을 믿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따먹었으며 그것을 자기 남편에게도 먹도록 요구(강요?)하여 아담마저 하나님을 거역하게 한 것 때문에 자취한 것입니다. 뱀이 유혹했을 때 거기에는 아담도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께한 아담에게 주었다고 했고(창 3:6) 아담도 자기 아내(여자)와 함께한 여자가 주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창 3:12).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에게 왜 먹었느냐고 책망하시자 하나님 앞에서 아담은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뱀의 유혹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주관했던 사람은 여자였고 하와 자신의 눈에 좋은 대로 결정하고 행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주저할 여유도 없이 하와는 신속하게 일들을 처리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교회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고전 14:34-36)

그들도 자기 남편들을 주관하려고 했고 여자들은 교회의 일에도 주도적으로 이끌려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여자\'란 말은 모든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오해 때문에 오늘날 교회 안에 여집사를 세워도 되느냐 세우는 것이 비성경적이냐로 논쟁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여자\'는 한 남편의 아내로서 여자로서 \'아내\'의 대용어입니다. 이 증거는 창세기에서부터 볼 수 있습니다.

<야훼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22,23)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 여자는 \'남자\'에게서 취함을 받았기에 \'여자\'라 칭했습니다. 계속해서 \'여자\'란 단어가 나옵니다(창 3:1,2,4,6,1213,15,16…). 따라서 여자는 한 남편의 아내로서의 대용어입니다(창 2:24,25; 3:6,16,1720).

그래서 떠드는 이유가 배우기 위함이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주관하듯이 떠들지 말아야 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집에서 \'남편\'의 인도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율법에 이른 것 같이 복종하라\'는 말씀을 율법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복종\'이란 말은 몰라도 무조건 순종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머리(권위)을 따르다\'라는 뜻이며 \'순종\'은 알 때에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바른 것을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순종하고 그 머리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고전 11:3; 엡 5:22; 골 3:18; 딛 2:5). 여자가 교회에서 떠드는 것이 부끄러울 때는 남편의 권위에 벗어나 주관하려는 자리에 들 때입니다. 이 구절이 모든 여자들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명령이 아니라는 증거는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신약시대보다 제한되었던 구약에서나 초대교회에서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한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시간상 줄이고 필요하다면 이에 관한 주제에서 설명했으니 참고하십시오.). 여기서 가리킨 율법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주신 그 율법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입니다(창 2:17). 이 율법이 여자에게 주어서 남자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주어서 여자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16절에서 \'사람\'은 단수이며 특별히 히브리 원어에서 \'아담\'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디모데에게 가르친 것을 봅시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9-15)

이 구절에서 말하는 \'여자\'가 만일 모든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면 모든 남성들은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자매(기혼, 미혼)에게도 성적 요구를 하는 것을 성경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자가 일절 순종해야 할 대상은 둘 뿐입니다. 오직 자기 머리가 된 남편과 더 위의 머리이신 예수이십니다. 이어지는 내용도 분명히 부부지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지 모든 이성간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서 여자와 남자란 말이 부부지간에 한 말씀임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로 인해 그 여자는 이런 저주를 받아 지금도 자기의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주관하려는 저주를 알지도 못한 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오직 여자는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한 것처럼 아내는 남편의 모든 일에 권위에 따라 순복하여야 합니다(벧전 3:1,5,6).

그러면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는 문제는 어떻습니까? 아내가 순복하지 않고 거역할지라도 안됩니다. 그것 또한 저주에 저주를 더한 것이며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내를 다스리라고 명한 말씀은 없습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 것이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딤전 3:4,5)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딤전 3:12)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반드시 요구한 사항은 집을 다스리는 것이며 자녀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다스리는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전옥답을 다루듯이 물주고 비료주고 병충해 잡아주고 김매주고 북돋아주고 약도 쳐주며 가꾸고 경작해야 합니다. 채소밭에 뱀과 망아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도 쳐줄 책임이 남편에게 있습니다. 물론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는 것은 최고의 울타리입니다. 텃밭이 좋은 채소를 내거나 나쁜 채소를 내는 것은 전적으로 남편에게 있습니다. 아담을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아담은 하와가 먼저 먹고 자기에게로 올 때까지 짐승들을 다스리는 일에나 시간을 쓰고 함께 있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할 의무는 하지 않고 책임은 망각하여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를 깎는 어리석은 일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부부라는 큰 비밀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당신이 결혼한 여자라면 위의 있는 머리 곧 남편은 당신의 머리이시기도 한 예수님께 더 가까이 있는 머리라는 성경의 시각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잖으면 당신은 하나님의 눈을 잃어버리고 여자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며 여전히 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뱀의 머리를 깨뜨리려고 오실 것이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 했습니다. 당신이 결혼한 남편이라면 당신의 영혼의 신랑은 예수이심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죄인들을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남편이 허물이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해야할 일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아내의 허물만을 보고 아내를 위해 당신을 줄 수 없다면 또는 주기를 거절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남편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2) 더 약한 그릇이지만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겨야 합니다

가정에서 말다툼이 생겼을 때 누가 잘못했든지 간에 더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그릇은 아내입니다. 값비싼 크리스탈 그릇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남편인 당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일을 했든지 간에 그 일은 당신의 짝 곧 배필(돕는 배필)이 함께 받을 유업인 줄 알아야 합니다. 부부가 한 일은 하나의 일로 함께 공동으로 받을 유업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그 아내된 교회와 함께 받을 유업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계획 안에서 동거의 지식을 따라야 합니다.



(3) 그래야 기도가 막히지 않습니다

제물을 드리다가도 형제에게 무슨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돌아가서 화해하고 와서 들이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아내에게 그런 일이 있다면 주님께서 그 귀를 막으시고 듣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양심도 기도하는 것을 허락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는 다 금그릇처럼 귀하게 쓰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깨끗케 하면 귀한 그릇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곧 성령을 따라 살고 더럽고 냄새나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는 것이 귀한 그릇으로 쓰일 수 있는 비결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향이 가득하게 담긴 금대접이 있습니다(계 5:8; 8:3). 금대접은 귀한 그릇 성도입니다. 향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무슨 일이 있거든 주관하려고 하지 말고 다스리려고 하지도 말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아내는 가장 안정된 위치 곧 남편의 가슴에 애정으로 호소하십시오. 주님께 드리는 향이 거기서 피어오릅니다. 남편은 육신을 버리고 마음을 죽은 듯이 깊은 잠 안식에 들어가 주님께 그 문제를 맡기십시오. 그곳에서 주님께 드리는 금대접의 향연을 우리 주님이 받으시고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를 다시 다듬어 주실 것입니다.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현숙한 아내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채찍으로 다듬는 것이 아닙니다(잠 19:14; 3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