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자료실

 

 

본 설교 자료는 저작권(한국교회정보센타)이 있는 자료입니다. 

한국교회정보센타(www.kcdc.net)

 

4월 목회 자료

 

 

 

 

매월 업데이트되는 한국교회정보센타의 4월 목회 자료가 완성되

었습니다. 업데이트 시기는 매월 마지막 주이며, 작업이 빠르면

그 전에도 제공이 됩니다. 홈페이지에 들어오시면 더 많은 자료

들을 만나보실 수 있으며, 이번엔 “주일 낮 설교”의 양이 더

늘어났고, 새롭게 “주일 특별 설교”가 추가되었습니다.

 

 

 

 

2009년 4월 월간 목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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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월 주일 낮 “행복한 주일 예배” 를 위한 예배 자료

가. 4월 5일 종려주일 “행복한 주일 예배” 를 위한 예배 자료

나. 4월 12일 부활주일 “행복한 주일 예배” 를 위한 예배 자료

다. 4월 19일 부활절 후 2 번째 “행복한 주일 예배”를 위한 예배 자료

라. 4월 26일 부활절 후 3 번째 “행복한 주일 예배”를 위한 예배 자료

 

2. 4월 주일 낮 “행복한 주일 예배”를 위한 설교 자료

가. 4월 5일 종려주일 “행복한 주일 예배” 를 위한 설교 자료

(1) 본문 : 마가복음 11: 1-10 제목 : 나귀를 타고 가는 길

(2) 본문 : 마가복음 11: 1-10 제목 : 주께 쓰임 받을 때

(3) 본문 : 마가복음 11: 1-10 제목 : 말씀의 순종과 축복

나. 4월 12일 부활주일 “행복한 주일 예배” 를 위한 설교 자료

(1) 본문 : 누가복음 24:1-12 제목 : 부활의 아침을 여는 사람들

(2) 본문 : 누가복음 24:1-12 제목 : 부활의 약속을 이루어집니다

(3) 본문 : 누가복음 24:1-12 제목 :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다. 4월 19일 부활절 후 2 번째 “행복한 주일 예배”를 위한 설교 자료

(1) 본문 : 고린도전서 15:1-11 제목 : 점점 확장되는 은혜의 복음

(2) 본문 : 고린도전서 15:1-11 제목 : 부활신앙의 주는 힘

(3) 본문 : 고린도전서 15:1-11 제목 : 기독교의 부활 신앙

라. 4월 26일 부활절 후 3 번째 “행복한 주일 예배”를 위한 설교 자료

(1) 본문 : 마태복음 28:18-20 제목 : 영원토록 위대한 명령

(2) 본문 : 마태복음 28:18-20 제목 : 우리의 꿈을 이루어 주는 힘

(3) 본문 : 마태복음 28:18-20 제목 :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과 교회의 책임

 

3. 주일 낮 “행복한 주일 예배”를 위한 특별 설교 자료

가. 4월 5일 본문 : 사도행전 2:17-21 제목 :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 4월 12일 본문 : 요한복음 20:1-18 제목 : 부활과 명품 신앙

다. 4월 19일 본문 : 누가복음 11:9-13 제목 : 그 때 그 기도처럼

라. 4월 26일 본문 : 마태복음 6:25-34 제목 : 오늘부터 잘할까? 내일부터 잘 할까?

 

4. 4월 주일 낮 “행복한 주일 예배”를 위한 예화 자료

가. 4월 5일 종려주일 “행복한 주일 예배” 를 위한 예화 자료

나. 4월 12일 부활주일 “행복한 주일 예배” 를 위한 예화 자료

다. 4월 19일 부활절 후 2 번째 “행복한 주일 예배”를 위한 예화 자료

라. 4월 26일 부활절 후 3 번째 “행복한 주일 예배”를 위한 예화 자료

5. 4월 주일 밤 “주 찬양 예배” 설교자료

가. 4월 5일 : 고전 15:1-10 제목 : 하나님의 은혜로다

나. 4월 12일 : 눅 19:28-40 제목 : 주님이 가신 길

다. 4월 19일 : 요 13:36-38 제목 : 무엇이 베드로를 실족케 했는가?

라. 4월 26일 : 빌 2:11 제목 :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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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4월 수요일 “주 만남 예배”를 위한 주제별(승리) 설교 자료

가. 4월 1일 : 롬 8:31-38 제목 : 넉넉히 이기느니라(1)

나. 4월 8일 : 롬 8:31-38 제목 : 넉넉히 이기느니라(2)

다. 4월 15일 : 롬 8:31-39 제목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라. 4월 22일 : 출 17:8-16 제목 : 여호와 닛시, 승리합시다

마. 4월 29일 : 삘 4:13-20 제목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의 승리

 

7. 4월 “금요 축복 기도회”를 위한 설교 자료

가. 4월 3일 행 4:23-31 기도로 일구어가는 성도

나. 4월 10일 약 1:19-27 경건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기도

다. 4월 17일 마 26:39-46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한 기도

라. 4월 24일 요 14:13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

 

8. 4월 새벽 기도회 “영성 예배”를 위한 설교 30편

1. 4월 1일 새벽 창세기 1 장 : 천지 창조

2. 4월 2일 새벽 창세기 1 장 : 천지 창조

3. 4월 3일 새벽 창세기 1 장 : 천지 창조

4. 4월 4일 새벽 창세기 2 장 : 인간 창조와 에덴 동산

5. 4월 5일 새벽 창세기 3 장 : 인류의 타락과 구원 예시

6. 4월 6일 새벽 창세기 4 장 : 가인과 아벨

7. 4월 7일 새벽 창세기 5 장 :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

8. 4월 8일 새벽 창세기 4 장 : 홍수 예고와 노아의 방주 제작

9. 4월 9일 새벽 창세기 7 장 : 홍수 심판

10. 4월 10일 새벽 창세기 8 장 : 지면 회복

11. 4월 11일 새벽 창세기 9 장 : 무지개 언약

12. 4월 12일 새벽 창세기 10 장 : 인류의 분산

13. 4월 13일 새벽 창세기 11 장 : 바벨탑

14. 4월 14일 새벽 창세기 12 장 : 아브람의 가나안 이주와 첫 실패

15. 4월 15일 새벽 창세기 13 장 : 아브람과 룻의 분리

16. 4월 16일 새벽 창세기 14 장 : 아브람의 승리와 멜기세덱

17. 4월 17일 새벽 창세기 15 장 : 후사 약속, 횃불 언약

18. 4월 18일 새벽 창세기 16 장 : 이스마엘 탄생

19. 4월 19일 새벽 창세기 17 장 : 개명과 언약, 할례

20. 4월 20일 새벽 창세기 18 장 : 아브라함의 천사 접대와 중보기도

21. 4월 21일 새벽 창세기 19 장 :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룻과 두 천사)

22. 4월 22일 새벽 창세기 20 장 : 아비멜렉을 속인 아브라함

23. 4월 23일 새벽 창세기 21 장 : 이삭의 출생과 이스마엘 축출

24. 4월 24일 새벽 창세기 22 장 :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여호와 이레)

25. 4월 25일 새벽 창세기 23 장 : 사라의 죽음과 매장지 구입

26. 4월 26일 새벽 창세기 24 장 : 이삭의 결혼

27. 4월 27일 새벽 창세기 25 장 : 아브라함의 죽음과 에서와 야곱 출생

28. 4월 28일 새벽 창세기 26 장 : 이삭에게 나타나신 하나님(로호븟의 축복)

29. 4월 29일 새벽 창세기 27 장 : 이삭이 야곱에게 속아서 축복함

30. 4월 30일 새벽 창세기 28 장 :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남

 

9. 4월 주일 낮 “행복한 예배” 를 위한 PPT.

가. 4월 5일 종려주일 “행복한 주일 예배” 예배를 위한 예배 자료

 

성경: 마가복음 11:1-10, 예전색깔: 보라색

 

 

예배의 부름 :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막11:9-10)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희 죄를 속하기 위해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영원토록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삶의 질고를 지고 허덕이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십자가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 걸으신 주님, 험난한 길을 걷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주님 가신 길을 함께 걷는 순례자가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저희들의 헌신을 받으시고 예비하신 은총으로 영성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성령이 예배의 순서 순서가운데 임재하실 줄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참회에의초대 : 오늘은 십자가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저들은 모두 주님을 환영하고 기뻐했지만 주님은 고난의 길을 걷는 무거운 발걸음입니다. 철부지처럼 주실 영광만 바라보고 환영하는 무지한 자가 바로 내가 아닌지 이 시간 반성하고 참회하는 기도를 계속합니다.

 

참회기도 : 죄인들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순종하여 인류를 향한 구원을 베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으로 다시 살게 하시고 영원한 소망을 품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아직도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아픔을 깨닫지도 못한 채, 죄악의 세상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시면서 몸소 사랑을 실천해 보이셨지만 저희들은 미워하고 시기하며 질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에 철없는 아이처럼 마냥 좋아하기만 했던 그들이 바로 저희들입니다. 이 시간 참회하고 자복하오니 주님의 피묻은 십자가를 가슴에 품게 하시고 그 흘리신 보혈의 피가 저희 심령을 적셔 흐르게 하옵소서.

 

어두운 세상에서 저희의 몸과 마음을 지켜 주옵시고 흠없이 보존되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를 위해 살고자 하지만 더욱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주를 위해 살고자 했건만 세상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리만큼 강하지 못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 주께서 십자가 지신 그 희생과 용서의 길을 좇지 못했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생명에서 떠나 사는 외로운 고아가 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다시 한 번 저희를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늘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여 주시고 저희의 길에 동행하여 주시며 저희의 길이 주님 걸어가신 모범을 좇아 거룩한 길, 신령한 길, 사랑하는 길이 될 수 있도록 저희의 길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함의 확인 :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51:7)

 

목회기도 : 저희들에게 영생과 풍성한 하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메마르고 척박한 저희들에게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시고 성령의 풍성함을 베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호산나! 환영받고 모두들 기쁨으로 맞이하지만 저들은 곧 주님을 향해 못박으라고 외칠 자들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뒤를 묵묵히 따르는 종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십자가가 신앙이 유일한 소망임을 알고 죽도록 충성하며 십자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저희들도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는 뜨거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민족을 가슴에 품고 사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앞에 다시는 못박는 성도가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핏자국난 손과 발을 닦아 드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는 종들이 있습니다. 환경이 열악한 가운데서도 제단을 지켜 가는 종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주님, 응답하여 주옵소서. 특히 주의 종의 자녀들이 목회자를 부모로 둔 것을 후회하지 않고 늘 감사하면서 지낼 수 있게 하옵시고 목회자를 위해서 내조하는 사모들에게도 한없는 사랑과 기쁨으로 목양의 동반자로써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고개 숙인 이 무리의 기도 제목을 주님 열납하여 주실 줄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을 위한 성구 :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58:11)

 

헌금기도 : 풍성한 은혜로 지난 한 주간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고 주님께 물질로 헌신할 수 있는 기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비록 적은 물질이지만 이시간 주님께 그것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믿음을 주셨기에 용기내어 드립니다. 저희를 건져주시고 용서해주시고 소망을 주셨기에 더더욱 기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감당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물질은 이 땅에서 영원하지 못하고 썩어 없어질 것이기에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려 합니다. 저희들의 정성과 마음을 받아 흠향하여 주옵소서. 십일조로 드립니다. 감사예물로 드립니다. 선교헌금으로 드립니다. 성전꽃꽂이로 봉헌합니다. 식당봉사로, 차량봉사로, 여러 예배순서가운데 봉사하고 섬기는 모든 손길들을 축복하시고 은혜 풍성하게 베풀어 주옵소서.

오늘도 온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봉헌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가 저희가 드린 적은 헌금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실행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께 마음과 몸과 물질을 드릴 때 마다 하나님으로부터 한없는 은혜를 받은 자임을 늘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온 교회 성도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서로 아끼는 삶을 살아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위탁의 말씀 :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직책이 바로 주님이 쓰신다는 증표로 알고 충성스럽게 헌신합시다.

 

축 도 : 이제는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 감화 역사 치유 교통하심이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누리는 온 성도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성시교독 : 58번. 종려주일

설교전찬송 : 12장(고난받은 주를 보라) 141(웬 말인가 날 위하여)

설교후찬송 : 403장(나 위하여 십자가의) 136장(거기 너 있었는가)

금주의 성가 : 사랑의 왕 내 목자(Harry Rowe Shelley)

다윗의 아들 호산나(C. F. Lane)

내 너를 위하여(Gergg Sewell)

➠ 4월 / 주일 행복한 낮 예배 설교

 

 

 

 

 

 

 

 

 

 

 

 

 

 

 

본 설교 자료는 저작권(한국교회정보센타)이 있는 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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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주일설교)

 

 

 

 

한국교회정보센타에서 제공하는 설교 자료는

“2009 복음적인 예배와 설교를 위하여”핸드북을 근간으로 하여 매뉴얼에 나와 있는 매주일 본문은 같은 말씀으로 하되, 설교제목과 내용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2009년도 새롭게 회원 교회와 목사님들의 사역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앞으로 여러 장르의 설교 자료를 통하여 탁월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국교회정보센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설교제목

 

 

나귀를 타고 가는 길 (마가복음 11: 1-10)

 

 

 

 

 

 

 

 

 

주제 : 예수님의 길은 환영과 배척이 교차하는 길이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가시는 환영의 길이 배척과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로 바뀌었다.

 

논지 :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호산나 찬송을 받으셨다.

1. 호산나 찬송을 위한 주님의 준비

2. 호산나 찬송을 위한 사람의 동의

3. 호산나 찬송을 향한 백성의 행동

4. 호산나로 영광을 받으시는 주님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중에 사람들로부터 환영과 배척을 동시에 받으셨다.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려 하였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셨지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예수님을 질시하며 죽이려 하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놀라 더 들으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병을 고쳤을 때와 사람들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였다. 아프고 배고프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환영한다. 그런데 건강하고 배부르면 예수님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배척한 사람들이 대부분 높은 사람, 지식과 명망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진리와 복음의 길, 영적인 길은 환영과 배척이 교차하는 길이다. 환영만 받으려 한다면 배척받을 때 견디기 어렵다. 배척만 받으면 복음의 진리가 사람들에게 심겨지지 않는다. 어느 한 쪽만 나타해도 복음이 전파되기 어렵다.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도 환영과 배척이 차례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후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배척할 것이다. 우선 호산나 외침이 들리는 환영부터 받는다. 예수님이 환영받는 것은 구원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다. 이 환영은 하나님이 준비하셨고, 옛적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이다.

 

1. 호산나 찬송을 위한 주님의 준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준비를 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될 때임을 아시고는 제자 둘을 보내어 나귀 한 마리를 빌려오라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직 아무도 등에 올라간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보거든 풀어서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주인에게 먼저 허락받으라는 말도 하지 않으셨다. 아마 제자들이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하면 도둑이라고 누명을 쓸지도 모른다. 나귀를 풀어가는 것을 보면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남의 나귀 왜 풀고 가느냐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묻거든 주님이 쓰시겠다고만 대답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시겠다는 말 한마디면 사람들이 순순히 물러갈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시기를 아시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켜서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시하게 준비할 사항을 알려주셨다. 건너편 마을,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 사람들이 물을 때 대답할 말 등 차근차근 알려주셨다. 더 중요한 것은 나귀 새끼이다. 옛적에 스가랴에 예언된 말씀이 당신에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슥 9:9). 예수님은 분비하실 때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예언이 성취되도록 준비하셨다. 사역의 목적을 성취하려면 이렇게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2. 호산나 찬송을 위한 사람의 동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다. 어느 집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 나귀를 보자마자 풀어서 오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묻는다. 엄벙덤벙하다가는 도둑놈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주가 쓰실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순순히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고 가도록 허락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만 했는데 아무런 어려움이나 방해를 받지 않았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단순히 관광이나 방문이 아니다. 관광이나 방문이래도 준비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의 최종관문인 십자가를 지러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준비도 있어야 하거니와 사람들의 지원도 필요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지원이 필요함을 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심부름을 하였고, 동네 사람들이 순순히 동의해 주었다. 예수임의 사역에는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 족장들과 예언자들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여자 아이를 사용하신 적도 있고, 이방인을 사용하기도 하셨고, 심지어는 동물까지라도 사용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더러 잘 먹고 잘 살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다. 진짜 잘 먹고 잘 살려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에 동의하고 협력해야 한다.

 

3. 호산나 찬송을 향한 백성의 행동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 왔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귀의 등에 올라가시도록 준비하였다.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등에 올려놓았다. 예수님이 타시도록 안장을 만들어드린 것이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사람들이 길 가에서 환영한다. 사람들이 제자들처럼 겉옷을 벗어서 길에 펴고,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흔들어댄다. 예수님을 환영하는데 거창한 것으로 환영하기 어렵다. 당장에 준비할 시간과 돈이 부족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것이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환영한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 힘들거나 복잡하지 않다. 다만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고, 예수님이 하자는 대로 동의하고 예수님이 하시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무엇인가 내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으면 내게 있는 것이라도 내어 놓으면 된다. 내게 있는 것이 남들 보기에는 볼품없는 것이라 해도 내게는 소중한 것이다. 예수님은 내게서 소중한 것을 받으신다. 내게 아무 것도 없다면 눈에 보이는 대로 이용하면 된다.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비난받지 않을 것을 찾아서 그것을 이용하면 된다.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었듯이 말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가?

 

4. 호산나로 영광을 받으시는 주님

예수님을 환영하는 자리에 환호가 빠질 수 없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앞뒤를 따르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우리 조산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일반적으로 환영하는 자리에는 나팔소리가 들리고, 군인들이 나열하고 단체로 경례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환영하는 자리에는 나팔이나 군인이 없다. 예수님은 권력을 가진 왕이 아니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왕이시다. 그분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과 지혜를 갖고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셨다.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려 하기 때문에 배척을 받으셨다. 그러나 배척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구원을 이루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외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호산나로 영광을 받으셨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원하옵소서’라는 뜻이다. 비록 방법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라도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만큼은 이루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배척을 받아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설교제목

 

 

주께 쓰임 받을 때 (마가복음 11: 1-10)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더나 이 당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평소에는 제자들과 함께 걸어서 다니시던 예수께서 오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할 때 타고 갈 나귀를 준비하라는 분부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나귀를 고르는 일을 통해서 제자들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어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2절)

 

보통 나귀처럼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던 나귀 한 마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이다. 이 나귀는 결코 주님에게 쓰임받기 위해 사전에 준비된 나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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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3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끌고 온 나귀 위에 예수님께서 올라탄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이 그 나귀에게 도달되었을 뿐이다. “주께서 쓰시겠다” 이 한 마리로 인하여 나귀 주인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나귀를 예수님에게 내어주었다. 그 뒤에 나오는 대목인 “호산나”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군중들의 외침 속으로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셨다.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섭리의 은혜로 마련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 성업의 일부에 나귀도 동원되고 인간들도 동원되고 제자들도 동원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우리 외부 인사로부터 선택받기를 소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일생을 나의 선택으로만 채워지기를 원하는 삶을 살지는 않는가?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대화 한 토막이다.

 

엄마가 아들에게 말한다. “너는 내가 다니는 교회에 나가자”, 그러자 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한다. “싫어!” 아들의 말을 들은 부모는 마음이 상해서 이렇게 다시 말한다. “왜 싫은데?” 그 때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가관이다. “엄마는 엄마의 자기 선택에 의해서 교회에 나가듯이 나도 나의 선택에 의해서 교회 안 나간단 말씀이야”

 

여기에 대해서 보통 엄마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아들의 말에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즉 엄마가 말한 “엄마는 엄마 자기 선택으로 교회 나간다”라는 주장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엄마가 참된 성도라면 결코 자신의 선택으로 교회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짜 신앙인과 참된 신앙인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인간들은 그 어떤 불가능성도 용납 못한다. 구원되는데 있어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오기가 나서라도 그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보란 듯이 뒤바꿔놓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면, 아직 구원이 안 된 나를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나를 데리고 예수님께 갔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예수님, 애는 곧 나 자신인데요. 평소에 꼭 천국에 가고 싶어 해요. 그러니 이 나라는 인간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잘 믿고 있다고 제발 인정해주세요”

 

하지만 이 논리의 모순점은,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가는 ‘나’와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나’가 둘로 분리되어 있어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결국 이 논조는, 자신이 하나님 위에 놓여 있는 상위 절대자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사사건건 관여하고 간섭하고 조언하고 압력을 가하는 자를 항상 상정하게 된다. 이것은 엉터리 신앙이다.

 

인간은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구원되는데 성공할 자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왜 그럴까? 인간은 우표딱지와 같아서 두께가 없이 세상에 딱 들어붙어 있다. 그림 속의 나무가 실제로 살아있는 실물의 나무가 아니듯이 인간들 속에서 그려내는 신은 인간들이 창조해낸 가짜 신이다. 인간들로부터 부림을 당하는 신이요 인간으로부터 쓰임을 받는 신이요 인간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만 하는 그런 장난감 같은 신이다.

 

참된 신은 인간 중심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하고만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자와 그렇지 않고 버림받은 자들이다. 주님께서는 ‘쓰신다’는 속성이 빠진 나귀 위에는 타시지 않는다. 그들의 호산나 환호 속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쓰시는 나귀’를 타시고 진입하신다. 이로서 호산나가 예수님을 위를 뒤덮다. 그리고 나귀도 같이 호산나를 덮었다. 호산나를 유도하고 호산나를 이끌어내기 위해 예수님께서 준비했던 바는 ‘주께서 쓰시겠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세기 2:3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영을 불어넣지 아니하면 인간은 그냥 하나의 점일 뿐이다. 면적도, 부피도, 크기도 없고 그냥 존재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점과 같은 인간도 성령에 들어오게 되면 비로소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육으로 난 사람은 ‘영의 일’을 분간치 못한다.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영적 인간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사실로 인하여 세상에서는 여전히 ‘구원불가능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진실로 구원받은 자라면 이 ‘구원불가능’을 주춤주춤 의도적으로 누락하려고 하지를 않게 된다. ‘구원불가능성’을 말하지 않는 구원은 곧 교회가 가짜들만 가득차기를 전도한 셈이 된다. 가짜 성도를 전도하는 이를 아무리 생각해주어도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이스마엘이요 한 사람은 이삭이었다. 이스마엘은 인간의 가능성에서 나온 아들이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불가능성에 나온 아들이다. 이 둘 중에 누구 구원받은 자인가? 이스마엘은 그냥 살다가 간 사람이지만,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

 

그는 죽었지만 숲 속에 있었던 수양 덕분에 되살아나게 된 자이다. 어린 양의 대신 죽음으로 되살아난 자가 이삭인고로 이삭은 분명히 구원불가능성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 쓰임 받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거듭나야 한다. 죄악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보혈의 피로 거듭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오늘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것이다. 건성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 없는 삶을 산다면 이스마엘처럼 그냥 살다가 간 사람으로 남지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시인하고 가슴으로 믿을 때 우리는 거듭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설교제목

 

 

말씀의 순종과 축복 (마가복음 11: 1-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또한 순종하기 어려웠던 때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방주를 지은 노아를 심판에서 구원을 얻은 표본이라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요, ‘은혜와 구원’이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을 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아시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한번도 타보지 아니한 나귀새끼를 타고 가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어떤 이들은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깔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소리지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에 성경은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그때에 예수님은 누구의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새끼 나귀는 어떠한 나귀일까요?

오늘은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말씀의 순종과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의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이에 두 제자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주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곳에 갔더니 정말 나귀새끼가 매어져 있었습니다.

두 제자가 어린 나귀 쌔끼를 끌고 오려고 하니까 주인이 “왜 그러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시킨대로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두 말 없이 허락을 하고, 두 제자는 나귀새끼를 주님께로 끌고 왔습니다.

그 나귀를 주께서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많은 군중이 겉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덮고 다른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고 안장을 올리고는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예수님을 승리와 평화의 왕으로 환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은 주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은 어떤 이유나 이치를 달지 않았습니다.

나귀 주인에게 왕이 쓰시겠다고 대답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랑하는 자가 필요해서 꼭 쓰시겠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답은 오직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더라”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해주신다면 그 이상의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나귀 주인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가슴에 품고 그 곳에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하는 이 말을 두려움 없이 말했던 것입니다.

“주여 그 분이 아는 분입니까? 우리가 혼이 안 나겠습니까?”

이런 반문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조건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저들은 달려갔고, 그대로 말하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보니 나귀가 준비되어 있었고, 또 주인은 기쁜 마음으로 허락하였습니다.

어떻게 그 주인이 주님을 알게 되었고 나귀가 준비되었는지, 먼저 연락이 닿아서인지, 아니면 주님의 영이 그를 움직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사실은 명령하신 자가 그 명령에 순종하는 자를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불합리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말씀은 처음 믿는 사람에게나 할 말이지 우리가 얼마나 오래 예수를 믿었는데, 성경말씀은 지킬 만한 것도 있고 안 지킬만한 것도 있기 때문에 잘 생각해서 지혜롭게 해야지”

 

만약 우리의 생각이 이와 같다면 안됩니다.

말씀대로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주님께서 예비해 두신 것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14장 1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유월절 잔치를 준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보냅니다.

거기에 가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이 있을 터인데 따라가서 주께서 유월절을 지낼 객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가 다락을 보일 터이니 그곳에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가보니 물을 이고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서 그들은 주님께서 물어보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순종하여 “유월절을 지낼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가서 객실을 물었더니 그 객실이 다락방이었습니다.

이 다락방에서의 유월절 잔치가 바로 성만찬 예식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의 번제물로 바치라는 순종하기 힘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더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모든 생활은 지금까지의 생활보다 더 잘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 새끼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언뜻보면,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벳바게”라는 시골 동네에 사는 어떤 사람의 나귀를 억지로 뺏어 타고 가신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귀새끼는 이름도 성도 직분도 모르는 한 무명의 성도가 바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이도, 성도, 이름도, 직분도 없이 헌신하고 충성한 이 무명의 성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유다지파에서 나신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해마다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것이며, 또한 이 무명의 성도도 같은 유대인이었기에 해마다 유월절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때 이 무명의 성도는 주님을 보았을 것이고, 그가 본 주님은 제사장이나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은 화려한 차림새나 흠모할 만한 풍채는 없었으나, 항상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으므로 그는 곧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주님 앞에 나타나 입을 맞추며 인사는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또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존경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월절 행사가 끝났다 할지라도 1년 뒤에 다시 만날 주님을 생각하며 그리워하고 나사렛에서 오시는 젊은 선지자라 하는 “예수”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에서는 유명인도 많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출세하고 성공하려는 교권주의자들이요, 명예와 공명심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이용하여 출세 성공하려는 자는 많았으나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이 무명 성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에서도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을 탐내는 자는 많아도 주님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까? 어떤 희생을 할까? 어떤 일을 할까? 하며 헌신과 봉사를 탐내는 자는 극히 적습니다.

또한 자기 이름을 내고 출세하려는 노회장, 총회장, 학장, 이사장 등 직책을 탐하는 자는 많지만 과연 교단과 교계의 지도자들이 교인을 사랑하고 교회와 교단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일했다면, 어째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처럼 분열되고, 혼탁되고, 오염되고, 부패해졌겠습니까?

온 성도가 다 이 무명의 성도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고 헌신하고 수고하려고 한다면, 어찌 교회에서 다툼과 분열의 시기와 원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겸손하고 낮아진 자리에서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할 일을 타인이 하기 전에 먼저 찾아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키 위해 기도하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한편 이 무명의 성도는 유월절이 명절이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날이기에 유월절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과 장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어린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드리려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이 무명의 성도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으나, 주님께 드릴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는 열이었으나, 기름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는 다섯뿐이었듯이, 성도들이 주일을 기다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나,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은혜 받고 축복 받기 위해 얼마나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습니까?

주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였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면 몸도 생명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준비와, 주님이 오시면 언제라도 영접할 수 있는 준비를 항상 해야 합니다.

 

이 무명의 성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귀를 주님께서 쓰시겠다 할 때, 아낌없이 주님께 바쳤습니다.

이 성도에게 누가 와서 나귀를 팔라고 하면 팔고, 어떤 권력자가 나귀를 뺏으려 한다고 뺏기겠으며, 또 자식이나 부모, 아니면 친척이 달라고 한들 주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쓰신다 하니 그렇게 정성으로 기른 나귀였지만 아낌없이 기쁜 마음으로 바친 것입니다.

이 나귀 주인의 이름을 우리는 모릅니다.

이 나귀 주인은 혹,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친척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도 아니면 평소 예수님을 잘 아는 신자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 무명의 나귀 주인은 자기도 한 번 타보지 아니한 나귀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였습니다.

또 예수께서 메시야 되심을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협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난주간 첫날인 종려주일을 기념하는 성도들에게 뜨거운 감명을 줄 뿐 아니라 이 복된 소식이 전할 때마다, 전하는 곳마다 이 무명의 나귀주인의 아름다운 봉헌도 전해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의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무엇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이 요구하실 때 그것을 주님께 기쁨으로 드려 주님의 사역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새끼 나귀는 어떠한 나귀일까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 역사 이래로 나귀 중에서 가장 귀히 쓰인 나귀는 벳바게의 새끼 나귀였습니다.

주님을 태우고 입성한 새끼 나귀!

무명의 존재이나 그의 업적은 길이길이 빛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끼 나귀는 어떠한 나귀입니까?

한마디로 이 새끼 나귀는 아무도 타보지 아니한 새끼 나귀요, 끌려오는 새끼 나귀요, 영광을 받은 새끼 나귀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가운데서 두 가지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새끼 나귀는 어려서 아무도 탈 수 없는 무자격, 무가치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그의 순결성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후계자 될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 예루살렘 랍비 학교에서 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불학 무식한 어부들을 택하셨습니다.

궁중 대궐 안에 있는 훌륭한 사람들을 제쳐두고 세관에서 세를 받는 세리를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남이 쓰지 않는 무자격 무가치한 자들을 뽑아서 쓰신 것입니다.

 

또한 이 새끼 나귀는 순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아주 천진스럽게 메시야를 태우기에 합당할 만큼 깨끗하였습니다.

주님은 교활한 인간을 쓰시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이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주님의 진리는 순진한 사람에게만 알려지고 또한 주님은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어리다 어리석다 하는 핑계나 염려를 하지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우리 몸을 주님께 드려 그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나귀 새끼를 끌고 올 때에 나귀는 거기에 반항하지 않고 잘 따라왔습니다.

이는 실로 기특한 일입니다.

나귀는 반항을 잘하는 짐승인데도 주인 아닌 딴 사람이 풀어 끌고 올 때에 한번의 반항도 없이 따라왔으니 주님은 그를 귀히 써 주시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끌려오는 새끼 나귀의 순종하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자를 쓰시고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거리에 앉아서 구걸하던, 나면서 부터 소경이 된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는 곧 순종하여 가서 씻고 보게 되었습니다.

순종함으로 그는 큰 은혜를 입어 모든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디베랴 바다에서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던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던 까닭에 큰 성공을 하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에 곧 순종하였으므로 하늘 나라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제사보다 기뻐하신다고 친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끌고 온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는 새끼 나귀의 헌신입니다.

이 새끼 나귀는 연약한 몸 부드러운 등에 예수님을 모셨으니 그는 자기의 몸을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자기는 수고하면서 주님께는 평안을 드린 것입니다.

또한 자기는 묻혀지고 주님만 나타낸 것입니다.

 

이 땅 위에는 주님을 타고 영광을 받으려는 자는 많지만 주님을 태우려는 사람은 그 수효가 매우 적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벳바게의 새끼 나귀처럼 우리 몸을 주님께 드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존귀케 하려 하는 생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 마음 기뻐하시며 평안하게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편 주님을 등에 모신 새끼 나귀는 그 발이 사람의 화려한 겉옷을 밟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름답고 부드러운 나무 가지를 편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귀에는 호산나 만세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백성들이 기뻐 뛰노는 환호 소리에 개선 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으니 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물론 이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받은 영광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봉사할 때에 또한 헌신할 때에 주님과 함께 무한한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 역사와 교회 역사에 나타난 모든 사람 가운데에 주님을 모신 성도들은 주님을 위하여 고생도 당하고 또한 희생도 되었으나 무한한 영광을 금생과 내생에 받아 누렸습니다.

이에 성경은 증거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벳바게의 새끼 나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무도 타 보지 아니한 새끼 나귀였으니 무자격하고 무가치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끌려오는 새끼 나귀였으니 이는 아무 반항 없이 오직 순종하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태운 영광 받는 새끼 나귀였으니 주님께 헌신하여 주님 받으시는 그 영광을 같이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 주님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 심령을 성전 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쓰시도록 즐겁게 드리기 바랍니다.

주께서 내 집에 오시면 그 때 삭개오의 집같이 구원에 이르고, 기쁨이 충만해지고 은혜가 충만해 질 것입니다.

예수님께 드려 예수님이 거하시면 그 집은 성전이 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내 집에서 주님을 모시고 주와 함께 살면서 주님의 보호와 사랑과 축복 받기를 바랍니다.

 

어느 정도까지만 순종하고 그만두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마십시오.

어느 정도 순종하고 그만두어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가지지 못하는 어리석은 신앙을 버리고, 마지막까지 전적으로 순종하여, 말씀대로 행하여, 약속된 은혜를 체험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금년에는 안됩니다. 제게는 어떤 계획이 있습니다. 3년 후에는 철저히 주일도 지키고, 십일조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후의 시간을 누가 보장해 줍니까?

미루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이 되는 줄 아십니까?

오늘 우리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영과 육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주의 계명과 말씀에 주저없이 전적으로 순종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나귀새끼와 그 주인의 순종을 통해, 우리도 이같이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과 기적을 체험하고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은총의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4월 / 주일 행복한 주일 특별 설교

 

 

 

 

 

 

 

 

 

 

 

 

 

 

 

본 설교 자료는 저작권(한국교회정보센타)이 있는 자료입니다. 

 

한국교회정보센타(www.kcdc.net)

 

목회자료(특별설교)

 

 

 

한국교회정보센타에서 제공하는 설교 자료는

“2009 복음적인 예배와 설교를 위하여”핸드북을 근간으로 하여 매뉴얼에 나와 있는 매주일 본문은 같은 말씀으로 하되, 설교제목과 내용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2009년도 새롭게 회원 교회와 목사님들의 사역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앞으로 여러 장르의 설교 자료를 통하여 탁월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국교회정보센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설교제목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2:17-21)

 

 

 

 

 

 

 

 

 

말씀을 향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난 꿈이라는 것을 몰라! 내 평생소원이 꿈 한번 꾸어보는 것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만큼 꿈은 우리는 꿈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꿈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자면서 꾸는 꿈과 눈을 뜨고 꾸는 꿈입니다. 자면서 구는 꿈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꾸어지는 것이고, 눈을 뜨고 맑은 정신으로 꾸는 꿈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꿈입니다.

 

-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

-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

- 주의 종이 되겠다는 꿈들은.. 자신이 스스로 만든 꿈입니다.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꿈은 눈을 감고 잠을 자면서 꾸는 꿈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람이 하루에 한 시간씩만 꿈을 꾼다면 그 사람은 평생 3년 이상을 꿈속에서 산 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꿈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줄잡아 200번도 넘게 꿈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래의 비밀이나 삶에 필요한 통찰력을 주시는 도구입니다.

 

- 어떤 사람은 돼지꿈을 꾸어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 어떤 사람은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와 소망을 얻고,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을 아는 은혜로운 말씀 안으로 들어갑니다.

 

 

말씀 안에서

 

- 대학에서 강의를 하거나

- 교회에서 설교를 하거나

- 자녀들에게 무슨 충고를 주는 말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나 이익이 되는 경우에는 잘 듣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는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 마음의 문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 마음이 열려있다 할지라도 심각한 방해전파를 받고 있을 때 누구의 말도 듣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기심과 욕심이 마음의 문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사람은 주일 아침 부족한 종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조차도 그 심령 속으로 뚫고 들어갈 틈새가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음 문이 닫혀 있는 자녀들에게는 부모의 말이 뚫고 들어갈 틈새가 없는 경우가 게 됩니다.

 

하나님과 선한 생활이나 부모의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바램보다는

 

- 어떻게 하면 오늘도 잘 먹고 잘 살까,

- 어떻게 하면 부모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내 맘대로 살 수 있을까?

- 어떻게 하면 남이야 힘들건 말건 나만 편하면 될까?

 

그래서

 

-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겨를이 없습니다.

- 부모의 말이나 선배 혹은 나를 위해주는 말을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잠을 자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 잠자리에 든 사람이 “나 지금 바빠 나중에 말해” 하면서 바쁘다고 난리 치는 법이 없습니다.

- 잠자리에 든 사람이 “나 지금 피곤하니까 제발 건드리지 말라”고 째려보는 법도 없습니다.

 

일단 잠을 자면 자존심도 욕심도 권력도 이기심도 완전히 무용지물이 됩니다. 모든 문이 활짝 열여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어느 순간이든지 무사통과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어떤 사람도 잠을 자면서 이렇게 소리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나 지금 잠자고 있는 중이야! 꿈아 난 너랑 놀 기분이 아니거든 썩 물러가라!”고 할 위인은 적어도 살아 숨 쉬는 동안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잠자는 시간이야 말로 활짝 열린 문을 통해서 누구든지 그 사람의 심령 안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기회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수 마귀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 하나님! 나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가고 싶은데 그 목사님의 꿈속에 이번 부흥회 강사로 내 모습이 보여 지게 하옵소서!

 

- 하나님! 우리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은 대 마주 앉으면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녀석의 꿈속에 내 음성이 들리게 하옵소서. 아버지 말을 듣지 않으면 엄청난 고통이 꿈속에서도 보이고 들으면 놀라운 결과가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 하나님! 내일 시험을 봅니다. 시험지 문제가 보이게 하옵소서..

 

실제로 그 꿈이 이뤄진 적도 많습니다.

 

- 부흥회 강사로 가서 담임 목사를 통해서 확인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 말씀카드를 만들고, 부활절 달걀, 동전카드 모두다 꿈속에서 본 환상이었습니다.

 

잠을 자는 순간은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도 인간의 중심세계로 파고 들어가기가 수월해지는 시간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온 세상을 다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속으로 반응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님도! 공갈 좀 그만 치십시오! 제가 벌서 죽다니요 이렇게 살아 있는데..” 그러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남들은 “아멘” 해도 속으로는 “노멘” 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 사람도 꿈속에서 무서운 괴물이 쫓아오면, 혼비백산하여 살려고 발버둥 치면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악몽에 시달리게 되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은 큰 병에 걸리거나,

- 사업에 불어 닥친 큰 풍랑을 만났을 때

- 자녀들의 문제로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 중에 시달리게 될 때

 

마음에 작은 틈새가 벌어진다고 합니다. 바로 그 틈새를 통해서

 

- 기도의 문이 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단 것을 경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 미워진 사람이 사랑받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여 용서가 되기도 합니다.

- 전도의 문이 열리고 쉽게 영접할 의지를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모셔 들일 여지가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 때로는 꿈에 만나 대화를 나누시기도 합니다.

- 꿈속에서 병이 치료되는 감격을 맛보거나 치료될 소망을 갖게 하시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꿈으로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친척과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무조건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 사랑하는 종수야! 지금 하는 사업을 다 접고 집을 팔고 사랑하는 아내 장진서와 아들 신민이랑 사랑하는 딸 솔희를 데리고 부산으로 이사 가거라?

 

- 사랑하는 대혁아! 철밥통이라고 말하는 공무원 그 좋은 직장에 사표를 쓰고 사랑하는 아내 김수연 권사와 아들 해민이와 기민이를 데리고 울릉도로 가거라!

 

그것도 얼굴을 보여 주시면서 한 말이 아닙니다. 개꿈처럼 자면서 꾼 꿈에서 수염달린 도사 같은 모습을 한 분이 비몽사몽간에 한 말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에 도착했을 때 밀어닥친 것은 그를 환영하는 플래카드와 수많은 백성들의 환호가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날 밤 꿈 쏙에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15:1).

 

그 꿈을 꾼 다음 아브라함은 힘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만의 비밀스러운 방법이 바로 꿈입니다.

 

하나님은 깊은 잠 속에서 인간을 만나 주시고 상처 난 우리의 마음을 만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깊은 잠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 마음에 약속을 심어 주십니다.

 

요셉도 꿈을 꿉니다. 그의 형들과 아버지까지 모두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꿈꾸는 자 동생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웁니다. 결국 요셉은 그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던 바로 왕의 꿈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해몽해냅니다. 그리고 꿈대로 형제들과 부모가 그 앞에 절하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다니엘도 꿈을 굽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당시 노예였던 다니엘이 해석해 주었고, 꿈을 통해 바벨론 제국을 다스리던 황제가 겸손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16장 9-10절을 보면 오늘의 서구 사회에 복음전파의문이 열리게 된 것도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 이러라”(행16:9-10).

 

예레미야에게 내린 계시도 꿈과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렘1:11).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을 통해 우리들에게

 

- 때로는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 해야 할 일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내려 주시기도 합니다.

- 약속을 하시거나 격려를 주시기도 합니다.

- 통찰력을 주시기도하시고 때로는 앓고 있는 병을 치유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심지어는 믿음이 없는 불신자에게까지도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가나안의 왕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는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취한 것에 대한 경고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방여인이었던 빌라도의 아내가 꿈을 꾸고 남편에게 예수님에 사형에 남편이 휩말리지 말 것을 경고하기도 합니다.

 

노예 중계 상인이었던 존 뉴톤은 꿈의 계시를 통해 노예매매를 중단하고 변화되어, 결국은 영국 황실의 채플린이 되었고 나중에 그 유명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가를 작시한 사람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가 드린 주기도문을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Ex. 임명애 사모의 경우에도 꿈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두 번 째 수술을 받고 퇴원한 후 한 달이 지나서 담당 의사를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는 날 새벽녘 꿈에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흰옷을 입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에서 발산되는 빛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답고 찬란하고... 눈이 부실 정도의 아름다운 빛이 발산되는 예수님. 그리고 그 뒤에는 김 목사가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사모에게 가까이 오시더니 머리에 손을 얹은 후 잠시 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쫙 훑어 내려가신 후 미소를 지으시면서 가셨다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임교수는 예수님께서 내 몸의 병을 완전히 쓸어내리시고 고쳐주신 것을 확신했답니다.

 

그리고 저에게 그리고 의사 선생님에게 “어젯밤에 예수님께서 제 병을 완전히 고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참고 병원에 갔답니다. 담당 의사께서 검진을 하고 종합 진단을 받은 모든 기록표를 보시더니 “임교수님, 걱정 하지 마십시오. 치유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집에 와서 꿈 이야기를 하면서 암에서 치유된 감격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물론 수술 전에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임교수가 가끔 부르는 찬송 중에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를 부르는데 실제로 자기가 그런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빛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 빛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안수해 주실 때 입으셨던 그 빛과 같은 아름다운 빛이었답니다. 어제도 그 빛의 모양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했지만, 이 세상 어느 말로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그 아름다운 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느냐? 너무 아름다운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퇴원한 후 많이 변한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 바로 그 빛 가운데로 하늘나라에 가지 않겠느냐는 소망 과 자신감 때문에 감사하면서 지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 전에는 제 설교를 들으면서 늘 딴 소리를 했지만, 지금은 어쩌면 우리 교회에서 가장 은혜를 받는 분이 임교수인지도 모릅니다.

- 전에는 엄청나게 모난 생각을 했지만, 요즘은 많이 알부남이 아닌 알부녀가 된 것을 느낍니다.

 

성경 어디에도 정상적으로 꾸는 꿈이 위험하다거나 나쁘다고 한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꿈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 모든 꿈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서 만드신 도구입니다.

- 모든 꿈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대화의 통로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꿈을 무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꿈을 통해서 당신의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이방인도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을 보고 변화됩니다.

-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본 꿈과 한상을 보고 요한계시록이라는 놀라운 책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을 통해 계속 말씀하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꿈은 과거나 미래에 관한 것도 많지만 대부분의 꿈은 현재와 상관이 있습니다. 어떤 꿈은 꿈꾸는 사람의 과거와 관련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꿈은 어떤 문제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꿈을 통해 그 해답을 주시거나 나아갈 길을 지시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마리아와 결혼하기도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된 약혼자 요셉은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요셉에게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할 것을 말씀해 주시고 마음에 편화를 주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소식과 장소를 알려주기 일보직전에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알리는 것을 금하고바로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안다면 꿈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하나님은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내려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 상징적으로 우리의 심령에 말씀을 새기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에 주위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말씀 중에 많은 것을 놓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꿈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본명 오늘 밤에도 꿈을 통해서 나를 만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즉시 일어나 기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 어떤 사람은 내일 적어야야지 하는 순간 진자 꿈이 개꿈이 되어 버립니다.

- 어떤 사람은 미루다가 잊어버리고 맙니다.

 

셋째.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을 놓고 기도하면서 깊이 생각해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건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환상을 통해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우리와 교통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합니다.

 

-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꿈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만나 기쁨을 얻고 문제를 해결 받고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앓던 병까지도 치유되는 신 바람나는 꿈꾸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 4월 5일 종려주일 “행복한 주일 예배” 를 위한 예화 자료

 

장미의 가시

 

 

창조주께서 만드신 꽃들은 많다. 그 중에서도 장미의 아름다움을 다른 꽃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한 사람이 그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고 너무나 사랑스러워 키스를 하려고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자 장미 꽃 속에 있던 벌이 깜짝 놀라 자신을 해치기 위해서 그러는 줄 알고 자기 몸에 붙어있는 침으로 그 남자의 입술을 콕 쏘고 말았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단이 미소를 지으면서 벌을 잡아서 침을 빼낸 후 장미 줄기에 꽂아 둔 것이 장미의 가시라고 한다.

(고난/사랑)

 

☞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백성들은 “다윗의 왕, 예수”를 외쳤다. 그 외침이 3일 후에 “십자가에 못 박아라!”는 소리로 돌변하는 무서운 침이 숨겨져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당신의 대화 속에 숨겨진 가시는 없는지?

 

 

용서주간

 

 

아프리카 깊은 숲 속의 어떤 부족 원주민들에게는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은 용서주간 이라는 것이다. 날씨가 좋은 날을 택해 실시되는 이 풍습은 모든 사람들이 친구나 이웃들에게 어떤 잘못이라도 용서해주기로 서약을 하는 주간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만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장문을 글을 서서 상대에게 보내지도 않는다. 그 동안 각자가 누구로부터인지 받았던, 생긴 오해를 다 훌훌 털고 용서해주는 것이다. 이 주간이 끝나면 그들은 서로 용서받고 용서해 준 감격으로 다시 만나 일상생활을 보낸다.

(용서/사랑)

 

☞ 용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자선행위가 아니다. 용서라는 것은 흐트러진 자신을 가다듬는 행위이다. 용서는 타인을 향해 뿌리는 향수이지만 결국 자신도 향기롭게 만드는 신비한 것이다. 이번 고난 주간을 “용서주간”으로 선포하고 당신이 먼저 실천해 볼 용기는 없는가? 내가 먼저 손을 내림 수 없다면 내민 손 뿌리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도자기 두 개

 

 

학생들이 단체로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특별한 두개의 꽃병이 전시되어 있었다. 두 꽃병은 같은 재료, 같은 무늬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는 빛을 내면서 생동감이 넘쳐났고, 다른 하나는 볼품없는 모양으로 놓여 있었다.

한 학생이 관리인에게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얘야, 그 이유는 간단하단다. 하나는 오랜 시간 불에 달구어 졌고, 다른 하는 구워지지 않았단다. 시련은 인생을 빛내며 생동감 있게 하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해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전시해놓은 것이지.”

 

(시련/승리)

 

☞ 우리의 삶에 생기는 크고 작은 고난은 우리를 완성시켜가기 위해서 있는 불가마와도 같은 것이다. 쉽게 얻은 성공은 모래성처럼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성공이다. 반면 오랜 시간 물과 시멘트의 반죽을 맛본 시멘트 같은 시련 뒤의 성공은 저래 무너지는 법이 없는 철옹성 같은 값진 성공이 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의 길을 가기 위한 또 다른 고난의 길이었다.

 

양과 돼지의 차이

 

 

시골 움막에 돼지가 양과 함께 갇혀 키워지고 있었다. 하루는 주인이 움막에 들어와 자신을 잡으려 하자 그는 꽥꽥거리며 격렬히 저항했다. 양은 돼지가 울부짖는 소리에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질러대는 돼지에게 불평하는 말을 했다.

󰡒이 놈 돼지야 시끄러워 죽겠다. 나는 주인님이 종종 나를 붙잡아 가려하고 막상 붙잡혀 가더라도 너처럼 울부짖지는 않는데…….󰡓

그러자 돼지가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양을 향해 말했다.

󰡒너에게 손을 대는 것과 나에게 손을 대는 것은 아주 다르단다. 주인은 네 털을 깎기 위해 너를 붙잡지만, 그는 내 목숨을 빼앗으려고 나를 붙잡거든.󰡓

(차이/죽음)

 

☞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전혀 헤아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운다면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다. 만족스러운 인생을 보내는 비결은 다른 사람에게 보다 많은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 주는 데에 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며칠 만에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고 외쳐댈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낳지도 않은 아들 때문에

 

 

옛날 아들 하나를 둔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은 또 아들을 낳고 싶어 주위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다시 아들을 낳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한 할머니가 말했다.

“하늘에 정성껏 제사를 올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네.”

“그렇다면 제물로 뭘 바쳐야 하죠?”

“자네 아들을 죽여 그 피를 희생물로 바치면 반드시 더 많은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거네.”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난 부인은 집으로 돌아와 외아들을 죽이려 했다.

그때 곁에 있던 한 지혜로운 사람이 비웃으며 꾸짖었다.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단 말인가?”

“?”

“아직 낳지도 않은 아들을 얻으려고 지금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외아들을 죽이려느냐…!”

 

(계명/의심)

☞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 욕심은 이렇게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예수님께서 입성할 떼 백성들이 소리친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옵소서”라는 뜻이다. 이미 얻은 구원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힘껏 호산나로 주님을 환영하자

 

앵무새의 의리

 

 

앵무새 한 마리가 고행을 떠나 먼 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산에는 여러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앵무새를 반기며 친형제처럼 대해주었다. 신이 난 앵무새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오랫동안 그 산에서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앵무새는 가족들이 몹시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섭섭해 하는 친구들에게 작별

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몇 달 후 그 산에서 큰 불이 났다. 밤은 대낮처럼 환했고, 낮에는 시커먼

연기가 해를 가려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앵무새는 발을 동동 굴렸다.

“이러다가 내 친구들 모두 타죽겠다!”

안절부절못하던 앵무새는 급기야 근처에 있는 호수로 뛰어들어 온몸을 적셨다. 그런 다음 그 산으로 날

아가 깃털에 묻은 물을 뿌렸다. 오직 친구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앵무새는 그 일을 수백 번이나 되

풀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신이 말했다.

“앵무새여, 넌 어찌 그리 미련하냐? 그렇게 해서 저 큰불을 끌 수 있다고 보느냐?”

앵무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형제처럼 대해준 친구들이 타죽는 모습을 어찌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앵무새의 의리에 감동한 천신은 곧 먹구름을 불러 폭우를 퍼붓게 했다.

 

(의리/사랑)

☞ 정녕 우리는 능력이 없어 곤경에 처한 이를 돕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진정으로 도울 생각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 여부를 핑계 삼지 않는다.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백성들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길가에 갈고 영접했다.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영접하면 된다.

 

 

살을 베어 원숭이와 바꾸다

 

 

숲 속의 사자와 원숭이는 사이가 무척 좋았다. 원숭이는 사자를 매우 신임했기 때문에 먹이를 구하러

나갈 때 종종 새끼 원숭이 두 마리를 사자에게 맡기곤 했다.

어느 날 굶주린 독수리가 세끼 원숭이들을 발견하고는 사자가 잠든 사이 발톱으로 낚아채어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얼마 후 잠에서 깬 사자는 새끼 원숭이들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무척 다급해졌다. 사방을

둘러 찾아보다가 독수리가 새끼 원숭이들을 붙잡은 채 나무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에 사자

가 간곡히 부탁했다.

“그 새끼 원숭이들은 내가 친구 원숭이의 부탁을 받고 돌봐주고 있던 참이었는데, 잠시 잠든 사이 네

가 잡아가버렸구나. 친구의 신임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나는 백수의 왕이고, 너

는 뭇 새들의 왕이니 내 체면을 봐서라도 부디 그 새끼 원숭이들을 돌려다오.”

그러자 독수리가 말했다.

“사자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나는 지금 지친데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 이 새끼 원숭이들을

잡아먹을 참이다. 너의 지위와 체면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독수리가 매정하게 거절했음에도 사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자는 독수리가 흉포해서 순순히 새끼 원

숭이들을 돌려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을 한 움큼 베어주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아픔을 감수하며 새끼 원숭이들을 돌려받은 사자는 친구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

 

(사랑/의리)

☞ 친구관계에서 의리를 빼면 남는 게 무엇일까? 그 의리는 바로 책임감이기도 하다. 예수를 먼저 영접한 우리에게 그런 책임감이 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이다.

 

 

 

 

 

 

 

 

 

 

 

 

 

 

 

 

 

 

 

 

 

 

 

 

 

 

 

➠ 4월 / 주일 오후 주 찬양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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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찬양예배)

 

 

 

 

1.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10)

2. 주님이 가신 길 (눅 19:28-40 )

3. 무엇이 베드로를 실족케 했는가? (요13:36-38)

4.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 (빌2:11)

 

 

 

 

가. 4월 5일 종려주일 주일 밤 “주 찬양 예배” 를 위한 설교 자료

 

본문 : 고전 15:1-10 제목 : 하나님의 은혜로다

 

 

올해도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또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 봅니다. 성도라면 하루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야 할 당연한 십자가와 부활이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들을 생각하며 깨우침을 받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지나온 날들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오늘 주어진 삶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다가오는 앞날을 새롭게 설계 한다면 부활의 절기에 누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흔히 부활장이라 불릴 만큼 성경에서 부활에 관하 기록한 최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바울도 부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의 자기가 있게 된 이유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 부활의 목격자로서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 증거자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10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강조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힘주어 외치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오늘 우리도 성도라면 우리의 모든 삶에서 무엇보다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교훈 받습니다. 다시 말해 이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사도 바울만의 간증과 고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대명사라고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얻음에 나의 선함과 나의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하고 증거 하면서 또 장치 우리에게 있을 그 부활의 날을 소망하면서 먼저는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합시다.

사도바울이 본문 10절에서 말씀한 하나님의 은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그러나’로 시작됨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단순한 겸양의 말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고 칭함 받기에는 다른 사도들에 비하여 뭔가 부족함과 미흡함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핍박자요 복음의 훼방꾼이었던 자신의 지난 과거를 생각할 때 도저히 사도라는 이름과 직분을 받기에 감당 할 수 없는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면서 먼저 ‘그러나’로 10절을 시작합니다. 핍박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의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로 말미암아 그는 사도로 세우심을 입어 복음 증거자로 또 이방인을 위한 세계 선교의 기수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과거를 불문에 붙이는 이 하나님의 파격적인 은혜가 아니었다면 사도바울은 핍박자 사울로 일생을 마치는 그런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랍고 감사한 것은 이 ‘그러나’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고 오늘 저와 여러분 나아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하신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으나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러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악을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또 우리의 못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예수님의 생명과 바꾸어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더욱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며 충성되게 여기셔서 직분과 사명을 맡기시고 감당케 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베푸신 파격적인 은혜 즉 ‘그러나’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 아닙니까? 또한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흠 없는 자가 될 수 없으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 ‘그러나’의 은혜가 계속 임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더욱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주를 위해 더 많이 수고함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 전력을 다해 주님위해 일하며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 중에 포도원에 11시에 부름 받고 들어가 일하는 일꾼 같은 심정으로 살았을 것입니다.(마20:-1-16)죽음에 미칠만한 그런 어려움과 형편에도 기쁨으로 주의 일에 힘썼습니다.(고후11:23-27)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가 주를 위해 더 많이 힘쓰고 수고한 모든 것이 자기의 능력이나 학식이나 성격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오늘 바울이 주를 위해 수고하는 이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성도라면 누구든지 가져야 할 모범적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들도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 더 많이 수고하고 힘써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또 일한 뒤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17:10)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전도자라 할 수 있는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제일 먼저 “하나님 왜 나 같은 것을 부르셨습니까?”라고 하나님께 질문하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겸손한 믿음을 갖고 우리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름과 자리에서 그 이름에서 그 이름에 합당한 이름값을 하고 또 그 자리에 맞는 열매를 맺혀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결코 헛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음을 고백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거에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음을 경험한 사람은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또 내일 주실 하나님의 은혜도 헛되지 않을 것을 당연히 믿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진 자는 오늘 걱정스런 일 앞에서 염려하며 한숨만 쉬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불안해하며 근심만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불평과 원망의 죄를 범치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헛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므로 내일의 삶에 소망을 갖고 자신과 가정과 교회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큰 사랑과 은혜로 나를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오늘도 임마누엘 되심을 믿고 감사하면서 또 우리의 앞날에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전진하는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희근 목사/뉴욕동원교회)

 

 

 

 

 

 

 

 

➠ 4월 / 수요 주 만남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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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만남예배)

 

 

 

 

1. 넉넉히 이기느니라 (1) (롬 8:31-38)

2. 넉넉히 이기느니라 (2) (롬 8:31-38)

3.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롬 8:31-38)

4. 여호와 닛시, 승리합시다 (출 17:8-16)

5.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의 승리 (빌 4:13-20)

 

 

 

 

가. 4월 1일 수요일 “주 만남 예배” 주제별(승리) 설교 자료

 

본문 : 롬 8:31-38, 제목 : 넉넉히 이기느니라(1)

어느 교회에서 집사님 한분이 성경교독을 시작하면 줄행랑을 치듯이 혼자 매우 빨리 읽어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예배 중에 목사님께서 \" 시편23편을 다 함께 소리 내어 읽어 봅시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성경을 빨리 읽는 여 집사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우리보다 먼저 쉴만한 물가에 도착한 집사님은 아직 \" 푸른 초장에 머물고 있는 우리들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셨습니다(요 16:33). 주님은 믿는 자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비록 환난을 당할지라도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믿는 자에게 환난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넉넉히 이기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자에게 두신 하나님의 크신 뜻과 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 계획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구속의 비밀을 깨달은 바울의 심정에는 환희에 넘치는 사랑의 시가 나이아가라 폭포수와 같이 웅장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31-35절에는 다섯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 질문은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자들을 아무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해 볼 때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요소들은 많습니다. 환난, 곤고, 핍박과 같은 외부적인 압박이 있습니다. 굶주림, 헐벗음과 같은 결핍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생명의 위험이나 순교(칼)도 있습니다. 신자들은 세상에서 애매하게 도살할 양같이 천대를 받고 멸시를 당합니다. 이때 우리는 사단의 시험에 들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 우리는 사정없이 음부의 심연으로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할 때 장래를 맡기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계획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다가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붙들어야 됩니다.

 

어느 여인이 술주정뱅이 남편을 위하여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은 묵직하고 지저분한 구두를 벗어서 아내에게 던졌다.

그러나 아내는 꼼짝도 않고 기도를 계속하였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자신의 신발이 빛나게 닦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몹시 부끄러웠고 마음이 아팠다.

그 뒤로 그는 술을 멀리했다고 한다.

남편을 사랑한 그 여인은 인내로 승리한 것이다.

 

\'성경을 한 개의 황금 반지로 비유할 수 있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이고 로마서 8장은 그 보석 중에 금강석(diamond) 부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8장 31절로 38절 부분은 최절정의 빛을 내고 있는 부분으로, 영화의 개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한 사실입니다.

영감의 사람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8:31)하는,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밖에 없다는 확실한 대전제를 내걸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논리적 가정법의 표현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하는 말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하는 의미와 직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넉넉히 이길 수밖에 없는 필승의 소유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일에...넉넉히 이기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면...

 

Ⅰ. 그것은 대적자 앞에서 승리의 근거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31절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대적”이란 말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뜻합니다. 도전을 뜻합니다. 그 대적의 정체가 누구인가? 그 정체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직접적으로 아니면 간접적으로 온갖 대적의 도구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생의 후사가 된 성도들을 대적의 표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8장 32절은 그 대적자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라고 한 말입니다(8:32).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자기 독자를 아끼지 아니함\'과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습니다(요 3:16).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사랑했다고 하였습니다(요 13:1). 그 사랑은 하나님 편에서 죄인을 먼저, 처음부터 사랑한 선수적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요1서 4:10).

둘째 근거는 그 사랑이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8:32)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증거는 그 아들을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었다고 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편에서는 거저 받은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셋째 근거는 남은 모든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8:32)고 하였습니다.

여기 \"모든 것\"은 무제한적 의미입니다. 모든 영적인 축복 곧 성화에서 영화에 이르는 신령한 은사와 이 세상에서 누릴 육신적, 물질적 모든 것을 망라하는 말입니다.

중대하고 중대한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우리는 대적자 앞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외아들 예수가 우리의 대적을 막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의 대적의 정체는 사망입니다. 사망은 쏘는 것입니다. 그 쏘는 독소는 죄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56). 그래서 이놈이 인류의 대적이요, 원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25). 그 놈은 우리를 죽이려고 쏘았으나, 마침내 주님 앞에 찔려 사망의 원수가 오히려 죽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25).

 

Ⅱ. 그것은 송사자 앞에서 대답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송사\"라고 하는 말은 재판의 처음 단계로 검사가 죄의 혐의를 주장하여 피의자를 재판부에 기소하는 절차를 뜻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송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탄의 송사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대답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대답의 근거가 ① 하나님의 선택(예정)이요(8:30, 33) ② 부르심이요(8:30) ③ 의롭다 하심이요(8:30, 33) ④ 마침내 영화롭게 하심(8:30), 곧 궁극적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의 송사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대답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계획의 불변과 부동(不動)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욥을 송사했습니다(욥 1:12, 2:1-6).

사탄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걸어 송사했습니다(슥 3:1-5).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선민의 대표요(선택자), 하나님 앞에 죄인 된 피조물의 대표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마치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슥 3:2).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선택자) 택한 자라고 하였습니다(슥 3:2).

그 더러운 옷을 벗기고, 죄과를 제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정한 관을 씌우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 앞에 사탄은 패소하고 말았습니다(슥 3:4-5).

사도요한은 밤낮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던 사탄은 마침내 영원히 쫓겨나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가고 말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궁극적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택자를 위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Ⅲ. 그것은 정죄자 앞에서 변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정죄는 유죄판결인데 그 결과는 죄의 삯인 사망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 이것이 사탄이 노리는 마지막 목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 받을 수 없는 이유 네 가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8장 34절에 \"죽으실 뿐 아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죄를 대신한 속죄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흘린 피가 우리를 영원히 구속했습니다(벧전 1:18-19, 계 7:14).

둘째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8장 34절에 \"다시 살아나신 자요\"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다\"고 하였습니다(롬 4:25). 예수 부활은 우리 의인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 우편에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8장 34절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자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세세토록 살아 계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가져, 전 세계를 통치하시는 왕이요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빌 2:9-11).

그가 세세토록 살아 왕 노릇하실 동안 그의 백성은 영원히 그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넷째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8장 34절에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영원한 대제사장의 행사를 말합니다.

히브리서 7장 24절로 25절에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대제사장의 영원한 중보기도의 효력이 우리의 확실한 소망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이유가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성령의 주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필승에 대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중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필승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심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우리를 사랑해 주심에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대한 하나님의 음성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궁극적 승리가 있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입니다.

유명한 영국의 수상 처칠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첫째 조건은 전투를 피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투를 피할 수 없을 경우 싸워 승리를 얻은 것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독일군과 싸움하고 있는 그 병사들에게 이렇게 연설하였습니다. \'나는 피와 노고와 눈물, 그리고 땀 이외는 아무 것도 여러분께 바칠게 없습니다.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만은 얻어야 합니다. 그 어떠한 공포를 무릎 쓰고라도 승리만은 얻어야 합니다. 승리! 그 도정(道程)이 아무리 멀고 힘든 것이라도 승리만은 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승리 없이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처칠의 이러한 승리의 맹세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1945년 5월 8일 화이트 홀 발코니에서 또 한 번 연설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시민 여러분에게 감사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승리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최선을 다해 준 결과입니다. 오랜 전투의 시간이나, 죽음에 직면하는 위험이나, 적의 격렬한 공격으로도, 우리 영국민이 스스로 결정한 죽음에의 결의를 약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러분에게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이 연설은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을 때 그의 백성들에게 보낸 승리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두 부분의 그의 연설은 참으로 유명한 부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승리를 약속합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하였습니다. 주님 자신이 \'십자가로\' 세상을 승리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최후에 남긴 말이 \"내가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속죄 성취의 개가를 남겼습니다.

정복의 대왕 알렉산더는 \'승리를 훔치는 것은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훔치지 않고 취한 그의 승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폴레옹은 말하기를 \'싸우지 않고 취한 승리는 비겁한 승리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싸워서 취한 나폴레옹의 승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럼에도 이들이 절규한 승리는 땅에 속한 영토와 권력을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본질적인 승리요, 궁극적 승리요, 영원한 승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위하신 사랑의 결과 얻은 영원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대적자 앞에서의 승리입니다.

송사자 앞에서의 승리입니다.

정죄자 앞에서의 승리입니다.

 

➠ 4월 / 금요 축복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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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축복예배)

 

 

 

 

1. 기도로 일구어가는 성도 (사도행전 4:23-31)

2. 경건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기도 (야고보서 1:19-27)

3.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기도 (마태복음 26:39-46)

4.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 (요한복음 14:13)

 

 

 

 

가. 4월 3일 “금요축복기도회” 설교자료

 

본문 : 사도행전 4:23-31, 제목 : 기도로 일구어가는 성도

 

말씀을 향하여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다. 예배당 지붕 위에 작은 귀신이 누워서 단잠을 자고 있는 관경과 다른 예배당 지붕 위에는 엄청나게 많은 귀신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꿈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나이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같은 예배당 지붕인데 왜 저쪽에서는 한 귀신이 낮잠을 자고 이쪽 교회 지붕 위에서는 그렇게 많은 귀신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일까요?”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예배당의 교인들은 모두 잠자는 교인들이기 때문에 작은 귀신 하나로 방비해도 넉넉합니다. 거기다가 귀신이 할 일이 없으니까 지붕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저쪽 예배당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열심히 기도하기 때문에 많은 귀신들이 모여 그들의 기도를 벙해할 작전을 짜고 있기 때문에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랍니다.”

 

기도는 승리의 비결이다. 기도는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위해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다면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잠자는 교회이며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그 자리에서 패배하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기도로 일구어가는 성도가 되는 비결을 아는 금요 축복 기도회가 되시기 바란다.

 

말씀 안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은 오리니

마음은 항상 미래를 바라 사느니

현재는 언제나 한없이 슬픈 것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져 가고

지나가 버린 것은 더 없는 그리움이 되리니“

 

이것은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란 詩이다. 이 시가 주는 의미는 삶이란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 슬프고 괴로운 일이 더 많아 항상 인생을 불행하게 하지만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쁜 날이 온다고 하는 희망적인 메시지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늘 불행과 고통과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들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의 능력을 능가할 어떤 대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탄생된 것이 우상이라는 신이다. 일단 만든 다음에는 그 신을 위한 경신행위를 한다. 굿을 하기도 하고 푸닥거리를 해서 자신들이 만든 신을 숭배하는 일을 행한다.

 

출 32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올라간 뒤 종적을 감추게 되자 그들의 삶이 불안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애급에서 가지고 나온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먹고 마시면서 광란의 춤판을 벌렸다. 십계명 돌 판을 받아 들고 하산하던 모세가 이 광경을 목도하고 분노하여 십계명 돌 판을 금송아지에게 던져 박살을 내게 만들고 레위 지파들을 시켜 반역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죽이고 다시는 우상숭배하고 푸닥거리를 못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불안하고 힘들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다.(눅 18:1). 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다.(살전 5:17) 그래서 신앙인들은 삶의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되면 밤을 지새우며 철야·금식하며 기도하고, 인생문제를 내놓고 울며 애통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한다.

 

오늘 본문에 나온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렇게 기도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엄청난 박해, 경제적 빈곤, 불편한 교통수단, 적은 성도 수,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교회의 열심 있는 기도는 시대를 변화시켰고, 사람들을 변화시켰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Ex.

1917년 러시아에 공산 혁명이 성공하자 모스코바의 한 복판에 있던 화려한 금색 지붕의 대성당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과 연주회 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공산정권의 계속되는 박해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시작되고 1990년 9월 대성전은 다시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도의 집으로 그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비록 소련의 정치 세력이 종교를 비합법으로 공식 선언하고 박해와 억압을 가했다고 해서, 사람들의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믿음이 뿌리 뽑힌 것은 아니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입증하는 웅변과도 같다.

 

믿음의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나와 내 가족과 가정을 변화시킬 수 있다.

 

딤전 2:1-2절을 보라!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Ex.

영국에 크리스토퍼라는 목사님이 계셨다. 그 당시에 많은 영향력을 끼진 덕망 높은 목사님이셨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에게 한 가지 근심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들의 문제였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아들은 술을 먹고 주정하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였다. 아버지의 애원도 부탁도, 설득도 아무 소용없이 타락에 빠져들어 갔다. 목사님은 자신이 회개하며 아들 문제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을 주셨다.

 

그 응답은 아들에게 피리를 불어 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응답은 하찮은 것 같아도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있는 마을 언덕에서 날마다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 날도 술에 만취가 되어 흥청거리는 그의 귓가에 낯익은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그 피리 소리는 아들이 어렸을 때 재롱을 부릴 때 마다 흥을 돋워 주기 위해서 아버지가 불러 주셨던 그 피리소리였다.

 

하루 이틀, 그 아들은 그 피리 소리를 내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다. 문득 문득 취중에서도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치는 것을 느끼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아들이 누가 피리를 부는가 알아보기 위하여 언덕을 올랐다. 가까이 다가가 그분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발견한 아들은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회개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의 기도가 타락과 방탕의 늪에서 죽어 가던 자식을 살려 낸 것이다.

 

그렇다.

인간을 살리는 것은 권세나, 부귀영화나, 재물이 아니다. 인간을 살려내는 능력은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으로 만들어가는 비법은 오직 하나 기도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그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죽어 가는 생명을 구원시키고 방탕한 자녀를 회개시켜 새사람으로 만들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어른을 몰라보는 불학무식한 자를 변화시키는 것은 기도 밖에 없다.

 

- 주께 무릎을 꿇으면 영적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 무기력한 삶에 일어설 수 있다.

- 당신의 황폐된 영적 삶을 복원할 수 있다.

 

약5:16보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신 자들이니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고 불쌍한 심령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면 역사가 일러나고 기적이 나타난다.

 

Ex.

지금부터 30여 년 전 미국 어느 도시 시립병원 정문 앞에 생후 6개월 된 아이가 버려져 있었다. 그 아기는 날 때부터 소경인 데다가 뇌성마비에 걸린 정신박약아였다. 병원 당국은 당황하여 마침 은퇴한 간호사 메이 렘케에게 이 사연을 말했다. 당시 52세로 신앙이 깊었던 그녀는 내가 죽는 날까지 그 아기를 돌보아 주겠다는 마음으로 버려진 아이를 데려 왔다.

 

그러나 메이는 아기를 보는 순간 너무도 비참한 인간 생명의 무기력함에 울어야 했다. 우유를 대주어도 빨아먹을 반사 본능마저 없는 이 생명, 메이는 그때부터 아기의 뺨에 얼굴을 대고 정성스럽게 안마를 했으며 팔과 다리, 손가락을 어루만져 주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야기와 자장가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몇 년이 흘러도 이 식물인간 레슬리는 단 한 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말 한마디는 물론 웃음이나 눈물도 기대할 수 없었다.

 

메이는 이때부터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제가 스스로 레슬리를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아기를 키우도록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주여, 그 이유를 언제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祈禱라기 보다 항변에 가까운 호소를 하면서 걸음마를 시켜 보고 특수 요법으로 치료를 계속했으나 레슬리는 그 어떤 변화도, 살아 있다는 신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레슬리가 18살이 되었을 때 메이의 남편과 친척 친구들은 모두 이 아이를 포기하라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다.

 

“사랑의 하나님! 성경의 기적을 믿습니다. 이 아이에게도 기적을 허락하소서. 정신적 감옥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기적을 주시옵소서.”

 

이것은 메이 부인으로서도 마지막 호소이자 기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이는 레슬리가 엄지손가락으로 기타를 튕기고 있음을 발견했다. 실로 18년 만에 처음으로 보여준 이 기적 앞에서 순간 메이는 “ 음악이다. 음악이야! 하고 외쳤다.

 

이 일이 있은 후 메이는 그 남편과 레슬리의 방에 피아노, 전축, 라디오, 텔레비전을 틀어 놓아 온통 음악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레슬리의 손가락을 집어 손가락을 집어 주며 연습을 시켰다. 그러나 레슬리는 한 번의 기적으로 만족하라는 듯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1971년 어느 겨울 새벽, 기적은 일어났다. 곤한 잠에 빠진 가족들은 누군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순간 메이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레슬리의 방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레슬리가 미소를 머금은 채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21년 만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그가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더듬대며 \"음악은 사랑입니다\". 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생하던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감동의 눈물과 함께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 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왜 주님은 기도하라고 간곡히 명령하실까?

祈禱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戀人들이 자주 만나고 대화하듯이 하나님께 자주 나아가 대화하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祈禱하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행복해진다.

祈禱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의 권능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와 축복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도로 우리의 삶을 일구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4월 / 매일 새벽 영성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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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료(새벽설교)

 

 

 

한국교회정보센타에서 제공하는 설교 자료는

“2009 복음적인 예배와 설교를 위하여”핸드북을 근간으로 하여 매뉴얼에 나와 있는 매주일 본문은 같은 말씀으로 하되, 설교제목과 내용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2009년도 새롭게 회원 교회와 목사님들의 사역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앞으로 여러 장르의 설교 자료를 통하여 탁월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국교회정보센타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 4월 1일 새벽 기도회 “영성예배”를 위한 설교자료

1. 4월 1일 새벽 : 창세기 1 장 - 천지 창조

본문 : 창 1:1

제목 : 창세기 해설

찬송 : 78장, 40장

 

오늘의 설교를 위한 주제

 

1. 창세기의 서론 및 명칭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과 은혜가 나타나 있는 성경 최초의 책이다. 원래 히브리 성경에서는 창세기의 명칭을 “브레쉬트”라고 불렸다. 이와 같은 말이 붙게 된 것은 창세기 1장 1절의 처음 단억인 “태초”라는 듯에서 유래했다. 그 후에 번역되는 과정에서 기원, 생성, 근본 , 원천의 듯을 가지고 있는 “게네세오스”가 나중에 “Genesis”라는 이름으로 발전되었다. 인간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제시되어 있다.

 

오늘의 설교

 

저 자 : 모세

기록연대 : B.C. 1446-1406

기록장소 : 시내 광야

대 상 : 이스라엘 백성

배 경 : 무(無)에서 역사가 시작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룸.

기록목적 :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일반 백성들로부터 구원하시 는 점진적인 구원 사역을 이룸

특이사항 : 우주의 기원과 가정의 형성 및 타락, 홍수, 바벨탑 사건 등 선사시대 사건과 야

야곱 가족의 애굽 생활까지의 타락한 인간에 대한 구속사의 발단이 기록됨.

 

1. 창세기의 서론 및 명칭

창세기는 창조, 타락, 홍수 심판, 바벨탑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1-11장까지의 약 2,000년의 인류 역사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네 족장들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12-50장까지의 약 200년간 진행된 이스라엘 선조들의 초기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서의 구조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천지창조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서 택한 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기원 및 근본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나머지 성경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창세기의 저자

창세기의 저자는 오경의 기록자인 모세이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자체가 오경의 기록자가 모세임을 증명하였다(참조, 출 17:14; 24:4-8 레 4:12; 6:11 민 5:2-4; 7:19 신 31:9; 31:22 수 11:15; 20:14 왕상 2:3 왕하 14:6 스 6:18 스 13:1 등).

신약 역시 오경이 모세의 저작임을 증명하였기 때문이다(참조,마 8:4; 19:8 막 1:44; 10:5; 12:26 눅 5:14; 16:31 요 5:47).

이렇듯 오경이 모세의 저작이 분명하다면 출애굽기에 나타난 역사가 창세기 역사의 연속이라는 점과, 출애굽기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역시 동일한 정신과 의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 출애굽기의 저자와 창세기의 저자와 동일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애굽어의 사용과 요셉의 역사 이야기에 묘사된 애굽인의 생활양식에 대한 세밀하고도 정확한 지식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운(참조, 행 7:22) 모세의 교육과 경험에 일치한다.

 

3. 창세기의 목적

본서의 기록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우주만물 및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 계시를 통하여 인간이 경배하고 섬겨야 할 대상은 오직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가르쳐 주기 위함.

 

2) 우주만물의 시작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12 족장이 애굽으로 내려가 신정국가를 형성하게 되는 준비 단계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계시 역사를 보여 주기 위함.

 

3)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분명히 밝혀 민족의 통일성을 이루며,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맺은 언약의 관계를 정확하게 기록함으로써 백성들이 여호와를 의지하며 충성스럽게 따르게 하기 위함.

 

4. 창세기의 기록 연대

창세기의 정확한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출애굽부터 모세가 죽기까지의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출애굽 사건은 애굽의 투트모스 3세(Thutmoses, B.C. 1504~1448)를 이스라엘의 탄압자로 보고 그 아들 아멘호텝 2세(Amenhotep, B.C. 1450~1420)때 출애굽 사건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볼 때 약 B.C. 1446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5. 창세기의 특징

1)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다.

창세기는 한마디로 모든 것의 시작(기원)을 말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창조된 우주의 시작, 인류의 기원, 가정의 시작, 종족과 민족의 시작, 안식일의 시작 과 죄의 기원, 그리고 선택된 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시작

등 모든 것의 기원 을 밝힌 책이다.

2) 창세기는 관계의 책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 자연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3) 창세기는 족보책이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을 다시 찾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및 계시가 여인의 후손의 혈통을 좇는 계보 속에서 전혀 그 초점이 흐트러짐 없고 뚜렷이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 아담 - 셋 - 노아 - 셈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 ....... 마리아 )

4) 창세기는 언약의 책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게 가나안 땅을 그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5) 창세기는 구속의 책이다.

창세기는 그 서막으로서 비록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면면하게 인간의 전역사가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점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메시아의 그림자로 이해되고 있다.

 

아담 - 제 2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가죽옷 - 그리스도의 보혈과 인간의 칭의의 옷

아벨 - 그리스도의 속죄와 고난

노아 -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멜기세덱 - 그리스도의제사장직

이삭 - 갈보리 산상의 그리스도

야곱의 사닥다리 - 그리스도의 중재사역

요셉의 생애 -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

 

창세기에 나타난 중요인물과 교훈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아담 - 인간성

가인 - 육적인 마음

아벨 - 죽임당한 어린 양, 영적인 마음

에녹 - 하나님의 동행, 영적인 고제

노아 - 구원과 중생

아브라함 - 믿음의 생애, 칭의

이삭 - 순종의 본

야곱 - 하나님과의 씨름, 성화

요셉 - 낮아짐으로 영화롭게 됨. 성화

 

성경 66권과 구약 39권, 그리고 모세오경의 첫머리에 배치된 창세기는 구속 계시의 막을 여는 책으로서 그 내용에 있어서도 기원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계속해서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비롯하여 사람, 안식일, 결혼과 가정, 죄와 죽음, 문명과 문화, 그리고 희생과 구속 등 모든 존재의 기원이 명쾌히 밝혀보고자 한다.

이러한 주제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나타난다.

1) 신비한 우주적 진리 및 기원이 명쾌히 서술되어 있다.

2) 다신교 사상 및 범신론 사상이 팽배해 있던 고대 근동 문화 속에서도 독특하게 하나님의 유일신관 사상만이 초지일관 견지되어 있다.

3)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을 다시 찾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및 계시가 여인의 후손(창3:15)의 혈통을 좇는 계보 속에서 전혀 그 초점이 흐트러짐 없이 뚜렷이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