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준절 설교 5편

사순절 다섯째 주일 설교 5편\"|주일낮설교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롬12장1-13)

미국의 어떤 인생 상담가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여러 가지 들었는데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이 “가능하면 날마다 동이 트는 광경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으레 오고 가는 듯이 보이는 아침과 저녁에 이런저런 이유로 지나치던 것을 새롭게 보면, 분명 삶의 활기를 강하게 느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이 트는 것을 보려면 먼저 고요한 새벽을 보아야 하고 인공 건조물이 가능한 적은 곳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이렇게 사순절 기간 수십 일을 매일같이 고요한 새벽을 깨우며 그 새벽을 첫손님으로 만나며 그 경건한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대화하고 매일같이 결단하고 간구하고 소원을 아뢰는 것은 새벽뿐만이 아닙니다. 평소 잊고 살던 황혼과 노을도 매일 볼 수 있다면 고단한 일상은 상당히 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꼭 보지 못해도 좋습니다. 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삶과 마음속의 노폐물을 상당히 걸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친 세상살이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은 이처럼 평범한 곳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역전인생

월드컵에 이어 두 번째로 온 국민의 스타가 된 것은 알고 보니 복권이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복권에 대한 자기 입장을 확실하게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3대가 연달아 벼락 맞아 죽을 확률에 기대를 걸고 왜 남 좋은 일 시키느냐\"고 강경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어떤 이들은\"어찌 되었거나 1주일 동안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으니 나쁠 거 없지 않으냐\"고 항변하면서 시류에 휩싸여 그럼 나도 한번, 하고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복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복권 당첨되어 좋은 일에 쓰면 좋은 일입니다. “헌금도 많이 하고 구제도 꽤 하고, 장학금도 제법 지급하고, 돈만 된다면, 그 돈으로 거룩한 일에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아니 잘 사용하려고 그러기만 한다면 다 무죄하고 오히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 생각하는 흐름이 있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돈을 벌어 어떤 좋은 일에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복권의 열풍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돈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상실하게 만들 것입니다. 가치가 상실된 돈이라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이 하루아침에 역전되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인가요? 역전되어도 좋을 인생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것일까요? 멀고 먼 길을 돌아 겨우 찾아낸 이 길, 사람 때문에, 사랑 때문에 절망하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애썼던 많은 시간들,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삶의 비밀들, 공들여 맺은 소중한 관계들과 그 관계들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들은 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게다가 인생이란 것이 일확천금을 얻는 것으로 한 번에 역전될 만큼 만만한 것인가요? 치사하게 돈 가지고 사람의 꿈을 저울질할 수 있는 것인가요? 뭐가 어찌 되었거나 얼마의 돈으로 1주일 동안의 즐거움을 사기 원하지만 복권보다 더 즐거운 일들이 우리들 가까이 없을까요?

 

로마서는 구원의 도리(파노라마)를 사도 바울의 논리 정연한 필치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여 본다면 구원은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구원의 비밀을 선포하면서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뜨거운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말씀인 12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먼저 구원의 도리 즉 교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말씀하시고 이젠 구원받은 자로서의 생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리는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여 주는 뿌리 부분이라고 말한다면 생활은 삶을 아름답게 하여주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러므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그것도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이제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삶을 살면 안 되겠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가장 큰 병패가 있다면 예배와 생활의 분리일 것입니다. 이성으로 깨달아지고 감정으로 뜨거워진다고 해도 실제로 주의 일에 시간과 몸을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생활은 거룩한 삶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나는 내 몸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주님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일, 내가 해야만 할 일을 하는 것은 주님께 부름 받은 자, 헌신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단순히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아닌 믿음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알고, 배우고, 행하고, 순종합시다”. 주님은 차가운 논리와 이론을 원치 아니하시고 뜨거운 가슴을 원하십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 앞날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은혜 받은 자와 메마른 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은혜 받으면, 믿음 있는 자는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주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귀한 줄 알고 주의 몸 된 교회가 귀한 줄 알고 주님이 주신 직분이 귀한 줄 압니다. 그래서 주신 직분이 귀하기에 거기에 걸 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들이 지금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몸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옛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나 가정이나 교회에서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은 제물은 되지 않고 자신이 살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살고 지는 자가 이기고 낮은 자가 높은 자라는 원리를 알면서도 막상 나 자신을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은 자기의 행실을 죽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된 몸을 원하고 계십니다. 몸과 마음을 다한 정성의 예배를 원하시고 몸과 마음을 다한 충성을 원하십니다.

 

영적 예배라는 말은 온전한 헌신과 봉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예배라는 것이 단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만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하여 있는 현장에서 우리의 부패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그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의 생활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릴 산제사는 우선 찬미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을 벌려 하나님께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 바로 산제사입니다. 찬미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기적을 체험하고 억눌린 현실에서 구원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찬양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온몸과 전 삶을 통해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산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말씀에는 또 한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는 \"흠이 없는 것\" \"부정한 것이 없는 것\"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세속에 물들지 않은 진실 되고 거룩한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는 두 가지 원리

본문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세대를 본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도가 믿음의 순수성을 세상에 다 빼앗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 발목 잡혀서 믿음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적극적인 의미로서 \"하라\"는 말씀인데 본문에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음은 행동을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부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모든 행동지침들이 지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마음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고 지키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마음을 새롭게 하고...\" 라고 한 것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결심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겠다고 의지적으로 결심하고 힘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심 3일이라도 좋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먹으면 3일 동안이라도 새로운 생활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예 새로운 마음을 먹지 않으면 언제나 그는 세속에 물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가까이하는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의지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맥스웰 말츠가 말하기를 새로운 습관 하나를 형성하는 데는 최소한 21일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의지력이 필요합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품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간다는 뜻으로, 결심이 굳지 못함을 빗대어 이르는 말입니다. 작심삼일을 극복하는 방법은 삼일에 한 번씩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삼일에 한 번씩 작심하려면 변화를 추구하는 이유를 자꾸 의식해야 합니다. 의식을 깨도록 도와주는 것이 독서입니다. 예를 들어 계속해서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기 위해서는 말씀 묵상의 중요함을 쟁점으로 다룬 책을 가까이 두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독서를 통해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면서 영혼이 살찌고, 의지력이 강화됩니다. 변화에 대한 끝없는 도전과 자극을 받게 됩니다. 영성 회복을 위한 독서를 통해서 의지력이 강화되면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 전존재를 변화시키는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성경입니다. 영적 독서는 하나님의 말씀뿐만이 아니라, 신앙도서나 번역서 등의 책을 읽고, 되새김질하는 과정까지가 해당됩니다.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루이스(C.S. Lewis 1900-1963)는 \"우리는 지금 알과 같은 존재들인데 그냥 무한정 평범한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알은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무한정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말은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는 \"하면 좋은 것\"(Nice to Do)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Survial Issue)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사회가 변화되어한다느니 국가가 변화가 되어야 한다느니 혹은 교회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변화의 우선순위는 나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 주위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의 출발점은 바로 나 자신부터 입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행복한 삶을 위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날마다 반복적이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몸 관리를 소홀히 하면 건강은 점점 나빠져 갑니다. 자동차 관리를 게을리 하면 상태가 나빠져 갑니다. 텔레비젼만 오래 보다보면 멍청한 상태가 되어갑니다. 무엇이든지 소홀히 하면 그 상태가 점점 나빠져 갑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요,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라고 또한 가족이라고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돈독하다고 생각하고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지 않으면, 나중에는 냉랭한 껍데기만 남고 형식적인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반복적인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료함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삶에 사람들은 따분함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고 그저 마음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것은 무료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 안에 안정이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는 흥미롭지만 불안정하고 생소합니다. 사람들은 안정 속에 변화를 원합니다. 익숙해진 습관,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데 이것을 개혁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을 쇄신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은 반복적이며 모든 일은 무료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을 의미 있게 보내자면 개혁을 하고 쇄신을 해야 합니다.

(1) 자아의식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자아의식은 어떠한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능력이 없으며 큰일을 할 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 자아의식을 쇄신하여 긍정적 자아의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2) 가족과의 관계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 가족과의 관계는 이 세상 모든 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다른 관계에 아무리 힘을 기울여도 참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관계보다도 가족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족과의 관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여기에도 엔트로피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오늘날은 가족들이 한 집에서 살 뿐 각기 자기 생활에만 몰두하여 가족 사이의 유대관계를 강화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 여러분은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어떤 것을 먼저 하는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먼저 하고싶어 하면서도 실제는 \"긴급한 일\"을 먼저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긴급한 일이 중요한 일이라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하지는 않으면서도 긴급한 일을, 긴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보다 먼저 하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가족과의 관계를 위한 일은 긴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3)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타성이 붙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타성이 되면, 무료하면서도 변화를 거부하게 됩니다. 타성이 된 신앙생활은 형식적이 되고 율법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아의식을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가족들과의 관계를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가족인 교인들과의 관계를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돈으로가 아니라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기도 드립니다. 주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제 안에 영적이고 고상한 습관들이 형성되게 하소서. 날마다 내면의 은밀한 죄와 싸워 승리하게 하시며, 오늘도 만나는 사람, 해야 할 업무를 대할 때 주님이 주시는 신선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엡1:3-6)

 

꽃을 피우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봄이 왔습니다. 그 동안 어디 있다가 이렇게 나타났을까요? 온 세상의 나무들의 움이 트이고 가지가지 색깔로 꽃을 피우는 저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오늘은 그 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려봅니다. 그때 찾아오는 하늘과 땅의 은총,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한 그 일체 좋음의 세계 안에 평화의 띠로 묶어 하나 되게 하신 그분의 뜻을 헤아려 봅니다.

 

어느 한 아이가 이렇게 물어봅니다. \"왜 개나리는 노랗고 진달래는 왜 빨간색인 줄 알아?\" 그런 물음에 어른들은 이미 선악과를 먹을 대로 먹은 존재가 되었고 가슴의 언어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기에 바른 정답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던졌던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스스로 합니다. “개나리는 지난밤에 노란 꿈을 꾸어서 노란색이고 진달래는 빨간 꿈을 꾸어서 빨간 색이야”. 가슴에서 나오는 소리요 에덴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것이 회개라면 회개가 아닐까 합니다.

 

20세기말부터 머리로부터 가슴으로 내려오는 내적 우주여행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부터 서구사회에 일기 시작한 지성중심에서 감성중심으로의 교육과 상담과 심리학의 발전과 일반 대중화, 감성회복 내지는 영성회복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차원이 아닌 영혼의 첫소리인 감성, 느끼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봄이 온 것이 아니고 겨울이 변하여 봄이 된 것입니다. 봄은 또 봄으로 충분히 익고 익어서 여름으로 변할 것입니다. 물론 이 여름도 그대로 여름으로 있을 수 없고 틀림없이 여름은 변하여 겨울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표현을 했어요. “잠자는 밤은 겨울이고 일하는 낮은 여름이고 밥 먹는 저녁은 가을이며 깨는 아침은 봄이다” 라고. 우리는 지금 깨는 시간에 자리잡 고 있고, 깨어야 할 계절인 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법

사랑과 애정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숙해지면서, 육체적인 사랑의 표현에 대한 욕구를 자제하는 반면, 말로써 하는 사랑의 표현을 받고 싶은 욕구를 점점 강하게 나타냅니다. 인간은 어떠한 사람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났기에 살았고 또 지금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리라고 한 번도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한 다음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또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우리는 우리 부모에게서 이 때, 이 나라에,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우리 부모의 자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한다면 우리 부모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너를 낳고 싶어서 낳은 것이 아니다.\'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 다윗은 자신을 지으시고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와 능력을 묵상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하여 감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서 신기해하고 감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부모에게 물어도 해답이 없고 나 자신에게 물어도 해답이 없습니다. 나를 낳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아무도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너를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나를 창세전부터 이때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만이 그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스스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창조하신 분의 뜻을 따라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근거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사랑받기 위해서 학교에 간 일이 없고, 사랑받기 위해서 직장에 간 일이 없고, 사랑받기 위해서 결혼했다고 말하지만 사랑받는 사람 별로 없고, 사랑받기 위해서 누구를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우리 주님만이 그 대답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절). 하나님은 창세전에 나를 아셨고 창세전에 나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려고 양자를 삼은 것입니다.

 

양자를 삼은 이유

그런데 \'왜 양자를 삼았느냐\'라는 대답이 3절에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3절) 복 주시려고 양자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자녀 없는 부모들은 양자를 삼습니다. 양자를 삼는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자기에게 있는 모든 재산을 그 자식에게 주려고 양자 삼습니다. 전혀 이름도, 얼굴도 몰랐으나 그를 택해서 양자로 삼아 그에게 복을 줍니다. 또 사랑해주려고 양자 삼는 것입니다. 양자 삼아 일 시키려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양자로 삼으신 것은 하늘의 복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이런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으라고 태어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죽으셨습니다. 전부 거기에 \'나\'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왜 부모님을 이 세상에 살게 하셨을까요? 나를 사랑해서 낳아주라고 우리 부모님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왜 이 교회에 목회자를 세우셨습니까? 여러분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이 목회자를 수 없는 연단을 통해서 세워주셨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위해서 이 목회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셨다고 믿으신다면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요한은 하나님의 본성을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할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자녀 삼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그 자녀에 대해서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해 주려고 낳습니다. 그 자식을 낳아놓고 일 시키려고, 뭘 받으려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낳을 때는 사랑하려고 낳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곡조보다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 노래입니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을 물들고 싶소.

붉게 물든 저녁노을 어린아이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소” 그런데 이미 하나님은 우리 얼굴에 당신의 모습을, 우리 마음 가운데 당신의 형상을 물들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과 아주 연결이 잘 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낳게 할 때 일 시키려고 낳게 했다면 내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겠습니까? 만약에 나를 고생만 하라고 태어나게 했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부정적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한 유일한 믿음이라면 나를 사랑하려고 태어나게 했다고 믿어야 그 믿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자기 생에 대하여 한없는 기쁨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나게 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얼마나 좋으신 분으로 고백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받게 하기 위해 태어나게 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여기에 신비가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창세 전에 나를 사랑하신 계획과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현재도, 미래도 우리 삶 전체가 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가 언제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속에 있을 때 신성한 자존심이 생기며 살만한 가치가 있고 살맛이 나고 긍지를 가지며 인생의 모든 장애를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게 될 때부터 자기 자신을 자기가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나를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기 위해 창조한 나를 내가 싫어한다면 하나님을 얼마나 노엽게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한 번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날을 소중히 알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도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므로 나도 나를 받아주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선하고 착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의 출생과, 신분과, 용모와, 성격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지 말자

우리는 자신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고, 부모를 미워하고, 자기를 미워하고, 상처받은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고 한탄하며 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을 용서하며 현재 그대로 자기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지 마시고 자기가 되십시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고 행복하십시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자기가 자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자신을 싫어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도 너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으니까 나도 나를 사랑해야 됩니다.

 

이 땅에서 가장 필요한 것

그리스도의 피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입은 바 사랑의 빚은 우리가 평생을 갚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소망과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의 이 피의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만 소망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사랑은 우리들 가슴 속에 각인된 채로 오래오래 남아있게 됩니다. 그처럼 오래도록 남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꽃이 자기를 가꾸어주는 손길에게 향기를 남기듯이 <받은 사랑을 되돌릴 줄 아는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또한 사랑은 죽어 땅속에 묻힐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랑은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데 이와 같이 <실천된 사랑>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때로 사람들은 사랑하는 상대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사랑하는 상대를 잃어버렸을 때까지를 포함하며, 오히려 그 때에 비로소 사랑이 완성된다는 <미래지향적 사랑>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름다운 예술작품

사랑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취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됩니다. 사랑이 빠진 예술, 사랑이 빠진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꽃은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받는데 꽃보다 더 귀한 우리 인간의 생명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당당히 사랑받을 권리를 가지고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부사이에도, 부모님들로부터도, 자녀들로부터도, 이 사회와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구원에 이르는 사랑받은 존재입니다. 앞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엡 6:23-24)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속도도 빠르고 변화하는 크기가 엄청납니다.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도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다 변합니다. 심지어는 돌도 변하고 쇠도 변합니다. 사람도 변하는데는 예외가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 결심했어도 환경이나 여건이 변하면 변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사물이나 환경에 친화하다보면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다가 변하는 것이 상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이나 증오하는 마음이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신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사랑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해서는 안됩니다.

 

어미 닭의 죽음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의 부인은 늘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에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보니까 그 닭장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서는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글쎄 이게 웬일입니까? 그 암탉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농부가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저 머리에 난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이 암탉의 몸에서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도 이 닭은 족제비가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내가 멸망 받기에 그 모든 수치와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상함과 찔림을 당한 예수의 품이야말로 진정 구원과 참 안식의 품이 아닐까요?”

 

세월의 무상

사람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세월 속에서 살다가 가야만 하는 세월의 동행자들입니다. 영국의 생물학자인 케리카딘 박사는 실험을 했는데 두 마리의 쥐에게 똑같은 환경과 생활 여건을 만들어준 후 한 달 동안 정반대의 현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쪽은 어둡게 한 후 불안과 긴장과 짜증이 나도록 만들었고, 다른 한쪽은 밝은 빛을 적당하게 비춘 후 즐거운 음악을 들려주면서 행복감에 젖어있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전자의 경우 쥐는 6개월이나 빨리 죽을 뿐만 아니라 암에 걸려 있더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살아온 시간의 무상함에 후회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이 되지 말고 현재 있는 세월 속에서 자랑스러운 일들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내가 짊어진 무게는

어느 날 한 가닥의 희망조차 잡지 못 한 채 절망에 빠진 한 미망인이 자신의 처지가 너무 힘들어 큰 소리로 한탄을 하고 있었습니다.\"허구 많은 십자가 중 내가 짊어진 십자가는 왜 이리도 무겁단 말인가. 너무도 불공평한 세상이구나\"그때 하얀 수염을 가진 한 노인이 길을 지나다 이 말을 듣고는, \"그것이 그토록 무거우면 그 십자가를 저 많은 십자가 속에 버리시오. 그리고 당신이 가장 가볍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라 가져가시오\"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미망인은 너무도 반가워서 자기의 십자가를 힘껏 아주 멀리 보이지 않게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짊어질 아주 작은 십자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열심히 찾던 미망인은 자기가 평생 지고 갈 수 있을 만한 십자가를 찾고서 힘을 얻어 다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하얀 수염의 노인이 미망인이 새로 찾은 십자가가 어떤 것인가를 자세히 보니 그 것은 바로 미망인 자신이 너무 무겁다고 버렸던 바로 그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아무리 힘들다고 하소연 해도 항상 나보다는 나아 보이고 내가 짊어진 짐이 제일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내가 받는 고통이 다른 사람이 받는 고통에 비하면 매우 작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새로운 희망이 생기게 됩니다. 희망을 안고 고통을 인내로서 이겨 나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의 어깨는 가벼워질 것입니다.

 

사람마다 유일한 한가지 소원이 있다고 하면 행복일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행복의 평가 기준 열 가지를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친구의 사업이 성공하고 잘 될 때에 내 마음이 흐뭇하고, 성공한 친구를 만날 때에 조금도 샘이 나지 않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남을 위해 돈을 쓸 때가 있는데 구제를 한다든지, 봉사를 한다든지, 점심 한끼를 낸다든지, 남을 위해 돈을 쓸 때에 아까운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이 부자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돈을 쓸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고, 떨떠름하다면 이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셋째로 자녀가 평범하게 성장하였을 때에 여기에 대해서 감사가 떠나지 않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마다 내 자녀만은 특별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보통이면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내 자녀만은 특별해야 한다는 그 생각 때문에 자녀도 불행하고 부모도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잘 자라주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넷째로 여러분은 식사 기도할 때에 얼마나 감사하십니까? 이 좋은 음식! 이 건강! 이 왕성한 식욕! 그리고 소화력, 그리고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 앉을 수 있는 이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행복하십니까?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섯째로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 새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사람! 가을에 붉게 물들어 가는 가을 하늘이 눈에 보여지는 사람! 봄이면 예뿐 싹이 땅위로 고목 나무 같은 곳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아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그 사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언제 싹이 나왔는지! 언제 꽃이 피었는지! 단풍은 어떻게 되어 갔는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항상 불만과 불평과 욕구에 노예가 되어서 늘 쫓기는 듯한 사람을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만하면 넉넉하다! 나에겐 분에 넘치는 것이다! 이렇게 넉넉한 마음! 자족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남을 비판하는 횟수보다 남을 칭찬하고 남을 축복하는 말을 더 많이 하며 사는 그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꼭 남의 흉만 보기를 좋아하고 비판이나 하고 잘못된 것만 보이는 그 사람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비뚤어졌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모든 사람이 아름답게, 귀하게 보여지는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덟째로 현재나 과거를 막론하고 후회에 매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미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항상 미래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이렇게 미래 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아홉째로 아무리 바쁘고 절박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열 번째로 죽음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공한 사람입니까?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울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족하는 마음이 있었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살았고, 늘 겸손하게 살았고, 감옥에서도 감사하며 살았고, 축복하면서 살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이미 이룬 것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계속적으로 좇아가는 삶을 살았고, 죽음을 기다리면서 당당하게 맞이하는 그의 모습을 우리가 보면서 그는 과연 행복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오늘 에베소서를 마치면서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은혜라는 단어가 13회 나오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힌다.\" \"인사하다, 친절하다\"라는 말로 사용될 때가 있고 또는 \"유쾌하게 되다. 행복하다, 너그럽다, 기쁨\"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많이 쓰이는 말로는 \"카리스\"라고 해서 \"호의를 베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높은 사람에게 값없이 베풀어주는 호의를 말합니다.

 

바쿨레이라는 주석가는 말하기를 은혜를 \"매력\"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은혜는 사람을 매력있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 수록 아름다워지고 매력적이게 됩니다. 외모도 그렇게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이 아름다워 지는 것을 봅니다. 세상에 많아서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많을수록 좋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아무리 많아도 부작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과 삶은 황폐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떠나서는 도저히 우리는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

세상에 사랑이란 용어가 풍부하여 넘치는 것 같이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랑 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사랑을 받으려고 헤메이다가 헛된 것으로 허무한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참된 사랑 즉,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려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신 그 엄청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좋은 가문, 학벌, 직위를 배설물처럼 여기고 내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고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빌3장)

 

오늘 본문은 그런 바울이 스승이 아니라 아비된 심정으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기를 바라며 이 은혜 즉, 대가없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있기를 구하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이 변함이 없다고 하는 말은 한결같다 혹은 꾸준하다는 말입니다. 이에 반대되는 말로 변덕, 변절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변덕이란 것은 무척 피곤한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사람을 만나 사귈 때 변덕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참으로 피곤합니다. 좋다고 할 때에는 자기의 살이라도 다 먹일 것처럼 하다가도 얼마 안가면 완전히 돌아서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럴 이유가 아무 것도 없는데도 그렇게 합니다. 자기가 손해를 봐서 그렇다면 손해를 배상해 주면 되는 것이고 다른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사과하고 고치면 되는데 이런 저런 이유도 없이 싫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덕은 사람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면 그 장난감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흔들어 대면서 좋다고 합니다. 죽을 것처럼 좋아하다가도 하루 이틀이 지난 후에 다시 집어 주면 집어 던지고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소위 아이들의 변덕인데 이처럼 사람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는 사람은 참 피곤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예수님께 싫증을 느끼면 그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면 믿음 생활에 변덕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 비슷한 의미로 변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절이란 좀 다른데 반드시 이해 관계가 따릅니다. 그래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이익이 있다고 생각되면 절대 변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손해가 될 것 같으면 혹은 이용가치가 없으면 안면을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한결같은 사람, 변함이 없는 사람, 꾸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가르쳐 주는 뜻입니다. 여하간 변덕쟁이가 되거나 변절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미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몸이기에 당연히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환경과 조건 따라 변하기도 하기에 변함없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고 물어보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그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결과를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삶을 생각해 봅니다.

 

1. 언제나 함께 하는 삶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 절대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하시고 계속해서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마10:37-39) 부모, 자식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셨으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십니다. 이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늘 함께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제일 먼저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의 사랑도 많은 관심을 갖고 늘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하셨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기억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이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그러기 위해 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쉬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할 것은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 환경, 가문에 관계없이 계속적으로 기도하는 삶이 주님과 늘 함께 사는 삶이요,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2.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 (말씀)을 지키라\"(요14:15) 하셨습니다. 계명 곧 말씀을 지키는 생활은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마음 먹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똑같고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이라면, 주님 말씀이 삶 전체를 주관하도록 말씀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는 삶이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삶입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 감정과 기분에 따라 달라지고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 형편과 입장에 따라 흔들리며 사는 것은 변하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요 사도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은 한 번만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유혹에 89년 동안 한번도 잘못되게 아니하신 주님을 내가 어떻게 모른다 하겠는가 하며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하셨으니 말씀이 가는 곳에 가고 머무는 곳에 머무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헌신과 봉사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 모든 것 다 주어도 아깝지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머리에 삼백 데나리온의 거금의 향유를 붙고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여인을 다른 사람들은 수군거렸으나 예수님은 내게 좋게 하였다고 칭찬하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막14:9, 마26: , 눅22: , 요12: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고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진정 주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깨달았다면 내 것이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내 힘도, 정성도, 물질도 시간도 주님을 위해 바쳐지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항상 자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좋은 것은 자랑하고 싶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좋게 보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증거에 열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며 교회를 많이 자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어떤 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1. 주안에 평안을 얻게 됩니다.(23절) 주님이 가지신 참된 평안(요14:27)을 얻게 됩니다.

2. 믿음을 겸한 사랑을 얻게 됩니다.(23절) 올바른 사랑은 믿음을 동반합니다. 거기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없이 공통의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3.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24절) 은혜란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하며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복입니다.

 

물통 속의 나무조각

성 프란시스가 고향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자기 집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에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인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조그만 나무토막 하나를 넣는 것이었습니다. 궁금해진 프란시스는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물을 퍼 올릴 때마다 나무 조각을 넣으면 물이 출렁거리지 않아 넘쳐 버리는 걸 최대한 막을 수 있으니까요.\"

 

성 프란시스는 하인의 말 속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친구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물통 같은지 ...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으로 요동하는 마음, 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거기에 십자가를 던져보면 어떻겠나 ...`

 

결론으로 우리는 변함없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은 변함없이 주의 일에 협력하는 자, 변함없이 인생을 바로 살아가는 자,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와 같이 변함없는 자가 될 때 평안과 믿어주는 사랑과 은혜의 복이 있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생각과 마음이 주님께 향하여지고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며 아낌없이 봉사하고 헌신할 뿐만 아니라 자랑을 많이(전도) 하므로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기도하고 말씀 순종하여 주안의 평안도 얻고 믿음을 겸한 사랑도 받으시되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늘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조용히 하던 일을 멈추고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사순절입니다.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바쁘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많은 사람의 틈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그러다보니 자신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말았습니다.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은 그분이 이곳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경건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지개에 담긴 약속(창9: 8-17)

한 연극배우가 공연을 앞두고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서 공연 티켓 두 장을 드리면서 “목사님, 이번에 공연을 하는데, 시간을 내셔서 공연을 관람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랜만에 연극 공연을 관람하게 된 목사님은 서둘러 공연장에 찾아갔답니다. 공연이 시작되자 연기자들이 어찌나 열연을 하던지, 관람객들이 푹 빠져드는 걸 보았어요. 그걸 보면서 목사님이 문득 이런 생각을 나더래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사람들은 왜 진리에 매료되지 않는 걸까?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진리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할 수 없을까? 사람들은 왜 진리에 대한 진지함이 부족할까?’ 그걸 생각했대요. 그리고 관객을 사로잡는 배우들의 매력과 호기심을 갖게 하는 비결이 알고 싶어서 연극이 끝난 후에 그 배우에게 아주 진지하게 물었대요. “우리 목사들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 진리에 대해서 외치는데도 사람들은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거 같아요. 오히려 당신들의 연극 연기에 더 호감을 갖는 거 같은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했더니 연극배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는데, 그 진리를 거짓말처럼 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 배우들은 허구(거짓)를 마치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사실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허구의 세계를 진리처럼 믿고 그들의 마음이 사로잡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들립니까? 아니면 사람의 말로 들리나요? 한 마디의 말이라도 진실을 담아서 말하고 한 가지의 일이라도 정성과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글을 쓰고 책을 만들지만 좋은 글, 좋은 책이 위대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듭니다. 좋은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릴린 사반트는 말하기를 “지식을 얻으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하지만 지혜를 얻으려면 관찰을 해야 한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려면 말씀을 관찰하는 눈이 있어야 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 새로운 것을 발견합니다.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일상적인 일에서 새로운 것을 깨닫고, 새로운 것을 발견합니다. 진리를 깨닫는 사람이 앞서 나갑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이 땅 위에 번성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는데 그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듣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들이 점점 추악해졌어요. 또한 진리로 지도받기를 원치 않더라는 겁니다. 진리를 거스리는 세대,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욕망이 커졌고 세상적인 아름다움,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들에 현혹 되었어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생각과 삶은 하나님의 근심이 되었고 결국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피조물을 심판하시려고 계획 하셨어요. 세상이 심판을 받으려고 할 때, 노아라는 사람이 하나님 주목을 받았어요. 노아가 왜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 되었을까요? 노아는 타락한 세상에서 살았지만 흠이 없이 살았다는 것이요, 진실한 사람으로 순결한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노아는 950년을 살았는데, 하나님의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아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그랬습니다. 노아는 100년 후의 사건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믿고 준비했는데. 이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들린 사람은 미래를 준비합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이 믿음의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귀가 열린 사람은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를 의의 후사라고 했는데, 의의 후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것인데 믿어진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의의 후사에게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그와 그 후손들에게 약속해 주셨어요. 본문 9절~10절을 보세요.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모든 짐승에게니라.”

여러분! 사람들은 약속을 해놓고서 자신이 유리할 때에만 약속을 지키는 경향이 있어요. 약속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그가 한 약속들을 잘 잊어버립니다. 성공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언약을 걷어차지 않습니다. 왜 그럽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시니까요.

제시 펜 루이스는 말하기를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 함은 모든 측면에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힘을 의미한다. 이로써 괴롭고 기쁨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세계의 기쁨과 영광으로 충만하게 된다. 진정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가 없는 삶이다. 십자가는 옛 창조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고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얻게 한다. 죄로부터 해방은 죄를 이기려고 노력하는 데 있지 않고 단순히 죄에 대해 죽는 데 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예고 하셨고 그 약속을 지킴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불신합니다. 성공한 사람의 모델이 된 카네기는 말하기를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한 번 약속한 일은 지켜야 합니다. 약속을 지킬 때 상대방이 감탄한다. 신용과 체면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그만큼 서로의 믿음이 약해진다. 그러므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그랬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 혹은 다른 사람들과 약속을 해놓고 잊어버리고 지나쳐버렸다면, 이 시간 그 약속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후사인 노아와 그의 후손에게 무엇을 언약하셨나요? 본문 11절을 보세요.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랬어요. 이 언약을 기억하는 사람은 홍수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어떤 분이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글을 써놨는데 감동적이었어요. 내 마음의 하늘에는 날마다 무지개가 뜹니다. 동산에 해가 뜰 때 내 마음에도 일곱 색깔 무지개가 뜹니다.

빨간색 띠는 내 마음에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하루 좋은 일이 얼마나 있을지. 열정을 가지고 찾아내고 행복하라.’ 그럽니다. 주황색 띠는 내 마음에 인내를 가르칩니다. 오늘은 쓰고 버리는 날이 아니라, 배우고 기다림으로 내일을 찾아가는 길목이라고. 노란색 띠는 마음에 평화의 소식을 전합니다. 평화는 승리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열매라고. 평안을 얻으려면 사랑하라고 속삭입니다. 초록색 띠는 마음의 쉼터를 마련합니다. 무조건 성공하겠다고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여유를 가지고, 여백 있는 삶을 살라고. 쉼이 곧 힘이라고 말합니다. 파란색 띠는 내 마음에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노력해도 실패할 수 있고. 허무할 때도 있지만 내일의 그림은 늘 밝고 아름답게 그리자고. 남색 띠는 내 마음에 겸손의 자리를 폅니다. 높아지고 교만해지는 것은 외롭고 위험하니,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섬기라고.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안전하다고! 보라색 띠는 내 마음에 사랑의 단비를 내립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것은 가진 것이 없고, 만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사랑의 빗줄기로 마음의 밭을 촉촉이 적시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볼 때, 여러분의 마음에도 언약의 무지개가 떠 있습니까? 무지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은총을 기억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도록 돕는 것이다.” 이제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청명한 하늘에 펼쳐진 무지개처럼 일곱 색깔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약1장 5-8절)

야고보는 목회적인 입장에서 성도들이 당하는 제일 중요한 문제를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먼저 시험을 극복하는 법에 대해 언급합니다(2-4절)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시험을 참고 견디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몇 가지의 방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견디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마디로 인내하는 능력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든지 참고 견디는 마음이 있으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12) 시험을 통과한 후에 올 복을 생각하며 참으라는 것입니다.

2) 정복당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험하는 자에게 자신을 내어 주지 말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마음에 물질에 의한 갈등으로 시험에 들었을 때 사단에게 그 마음을 내어주게 되어 예수님을 파는 죄를 짓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주위를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을 저들에게 내어주면 우리는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3) 신뢰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시험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는 분명히 승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만났을 때, 이길 수 있는 힘이나,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4)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때가 이르기까지 기다리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시험은 자연히 소멸되거나 우리를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일본에 춘추전국시절에 세 명의 영웅이 있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도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꾸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어느 날 현자가 그들에게 울지 않는 앵무새를 보여주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제일 먼저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거든 죽여 버리자\"고 했으며, 다음으로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거든 울게 만들자\"고 했으며, 마지막으로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울지 않거든 울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 현자는 도꾸가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통일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그 앞에 절을 했다고 합니다. 역시 시험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때가 올 때까지 참고 견디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도, 기도해도 시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을 당할 수는 있어도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일에 기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야고보는 곧 바로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기도에 관해 언급합니다. 교회생활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관심사를 \"기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해야 우리의 영혼이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늘 본문 5절에서 권면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5절 말씀은 3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를 구하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되 믿음으로 구하면 주시겠다” 고 합니다.

첫째,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시련을 만났을 때 시련을 없애 달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시련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1) 지혜란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말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십시오. 새벽 기도회가 시작되기 전에는 주로 듣는 기도를 하고 새벽 기도회를 마친 후에는 주로 탄원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2) 지혜란 선악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제목에 지혜를 구하는 기도가 꼭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누구에게 구해야 합니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은 \"후히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를 달라고 하면 열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색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어서는 안되겠기에 안 주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달라는 대로 다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돈만 버린다면 몰라도 자식까지 망치게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다음에 훌륭한 인격으로 준비된 다음에는 다 줍니다. 하나님은 사려 깊은 분이기에 준비가 된 심령에게만 주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은 \"후히 주시면서도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사람은 주면서 정죄와 책망의 눈초리를 하면서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받는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주는 손길 속에 \"자랑하는 마음과 책망하는 눈길\"을 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처럼 후히 주시되 꾸짖지 아니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등록금을 주면서 술이 취해서 자녀들을 모아놓고 훈시하면서 큰 다음에 반드시 갚으라고 하는 아버지에 대해 불쾌한 마음을 갖는다면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절대로 아닙니다.

3. 셋째,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풀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 마음을 품는다는 말은 안되면 어떻게 하겠다고 후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로 그 추구하는 것을 성공적인 작품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결혼할 때는 일생을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해야지 한번 해보고 살만하면 살고 아니면 때려치우겠다는 생각으로 하면 두 마음을 품은 것이기에 그 결혼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업을 할 때는 신중히 결정하고 한번 결정했으면 사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다 안되면 다른 것을 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면 그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기 때문에 그 사업은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마음을 품고 항상 탈출구를 염두에 두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은 안됩니다. 여기에서 비약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비약입니다. 즉 일단 맡기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에서는 하나님과의 친교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나 능력 혹은 선물이나 물질에 주로 관심하게 됩니다. 그것은 흔히 자녀들이 필요한 것을 부모에게 구하게 될 때, 부모님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는 부모님께서 주시는 선물의 내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목적만 획득하면 엄마나 아버지는 본 체 만 체 해버립니다. 자신의 관심은 자신들이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할 때 관심하고 있는 선물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소홀히 하게 될 우려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될 때 가끔 선물을 주고받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 선물을 사람의 정과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고 사랑의 감정을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그 사람 자신입니다. 연인 사이에는 꼭 선물을 받아서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사람 자신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요 기쁜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즐겁고 기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을 하면서 매일매일 응답 받으면서 하나님께 늘 받기만 하니까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온통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에만 관심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기도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좀 더 가까이 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하면 좀 더 복종하면서 살까? 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요구하는 기도의 제목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이 없으면 기도하는 일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의 태도는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선물을 받지 않고 주지 않아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따뜻한 사람이 흐르듯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정말로 친밀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하는 명상집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나로 하여금 피조물보다, 건강과 아름다움보다, 모든 영화와 명예보다도, 부와 예술보다도, 쾌락과 위안보다도, 모든 은사와 은혜보다도,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어떤 좋은 것보다도, 나의 주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떠나서 내게 주신 것이나 계시한 것이나 약속한 것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거기서 하나님을 뵈올 수 없고 완전히 만날 수 없다면 그것들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고 불만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듣고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체험하게 될 때 그는 비로소 기도의 중심에 하나님 자신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도는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에 맞추어 지게 됩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위한 건강이나 부나 생명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는 오직 주님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쓰여지게 하옵소서. 주께서만 나에게 선하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니, 주께서 가장 선하고 좋은 대로만 하옵소서.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제게 주실 것은 주시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시며,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좀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제는 파스칼의 기도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교를 먼저 생각하고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는 자기의 주권을 하나님께 완전하게 맡기고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목마른 자에게는 물이 필요하고, 굶주린 자에게는 먹을 양식이 필요하고, 질식된 자에게는 산소가 필요하듯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오직 하나님과 생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만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 기도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은 일직선으로 옵니다.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자에게 진정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