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4째주설교 4편

사순절 넷째주일 설교 4편\"|주일낮설교
 

 

이 사람을 보라(요19:1-16)

 

인간의 참 모습은 극단 상황에서 보다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평안할 때는 진실이 숨겨질 때가 많고 또 일이 잘되고 무사할 때는 의가 감추어질 때도 많습니다. 선 인지, 악 인지, 의인 인지, 죄인인지, 사랑 인지, 미움 인지, 알 수 없게 혼돈 될 때가 있지만, 극단 상황에 오면 그 진실이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광과, 칭찬과, 부귀와, 그리고 분에 넘치는 형통과 성공 뭐 이런 때는 무엇이 의 인지, 악 인지 알 수가 없 습니다. 그저 거짓된 자도 영광을 누리고 그리고 위선도 진실한 선처럼 통할 때도 있지만 재난이 있고, 가난과, 질병과, 실패와 수욕, 고독, 그리고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이제 모든 거짓은 다 물러가고 진실만이 선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특별히 극단적 고난을 당하게 될 때에 그 존재 자체가 확실하게 노출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대로 묻혀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말대로 말하면 숨겨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묻혀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 시작할 때 예수님의 모습이 드려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하실 때 병 고치시고, 불쌍한 사람들을 방문하시고, 하나하나 돌보고 계실 때 좀 더 확실하게 주님의 모습이 드러났지만 결정적으로 주님이 주님 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은 역시 십자가 사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님의 교훈, 십자가를 생각지 않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적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 의미가 대단한 것 아닙니다. 문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그에 교훈과, 그의 능력과, 그의 본능들이 다 새로운 의미로 나타나게 되고 재해석 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나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서신 사실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또 읽고, 또 읽고 깊이 명상해 보세요. 그러면 앞이 환하게 보일 것 입니다. 주님과 나만이 아는 신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성, 예수님의 인간 존재의 모습이 바로 빌라도 앞에서 확 들어나게 됩니다. 분명해 지고 아주 선명해 집니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조용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흔히 말하기를 빌라도 법정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건 하나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빌라도 법정,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십자가에 못 박은 잘못된 재판에 의인을 죄인 만드는 재판을 흔히 역사적으로 말하기를 빌라도 법정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된 재판에 대표적인 아주 극치적 상징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런데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에 모습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엄청난 말씀이 있습니다. 두고두고 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개개인에게 주시는 확실한 말씀이 그 속에 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빌라도는 예수님을 알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처럼 세상에 취해 있고, 권력에 취해 있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알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예수를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니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을 보라”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앞에 섰습니다. 그는 지금 죽음 앞에 섰습니다. 모순된 재판 앞에 섰습니다. 결과를 다 알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조용히 명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들끓는 생각도 없고 번요 분요한 마음도 없습니다. 이미 결론을 다 가지고 조용히 섰습니다. 침을 뱉든지 가시관을 씌우든지 홍포를 입혔다 벗겼다 하든지 갈대로 치든지 말든지 무슨 일을 해도 상관하지 않고 조용히 서 계시는 침묵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빌라도가 이것을 알리가 없습니다. “이 이상한 사람 좀 보라 이 사람을 보라”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이해할 수가 없는데 특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죽음 앞에서의 담담함 입니다. 빌라도는 죽는 것은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죽음에 뒤에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 고요함이라 조그만 어두운 그림자도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구차한 변명도 없습니다. 살아보려고 요리조리 몸부림 치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 변명이 없이 죽음 앞에 담담히 섰습니다. 십자가에 죽음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 거기에 위대한 힘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빌라도는 들어서 압니다. 그가 얼마나 능력을 행했다는 것을 병 고친 사람, 고침 받은 사람, 죽었다가 살았다는 이야기, 바다를 고요하게 한 이야기, 많은 사람이 따른다는 것 왜 빌라도가 모르겠습니까? 옳은 정보를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결정적 시간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능력인 사람인데 왜 이 시간만은 무능하게 아무 능력도 없이 초라하게 이대로 서 있느냐 이거죠. 그런가하면 시기와 질투 때문에 예수님이 여기 끌려 왔다는 것을 빌라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재사장과 바리세인들 서기관들이 이들이 음모를 해서 자기 인기가 떨어지니까 예수님이 높아지는 것 알고 이것을 잡아온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 결심한대로 행하고, 말씀한대로 행하고, 가르친 대로 자기가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침묵의 깊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지금 예수가 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계속 그 얘기를 합니다. \"무죄하다 무죄하다\" 그러면 무제하다는 것을 알면서 지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빌라도 앞에 무슨 말을 해야 됩니까?

 

또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생명을 다 위탁해 버렸습니다. 바로 어젯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에 뜻대로 하옵소서” 아멘 하는 순간 모든 일은 다 끝났습니다. 그 후로 상황이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누가 배신을 하든 누가 침을 뱉든 누가 욕을 하든 그런 이야기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와 하나님 하고 관계에서 이미 일은 다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침묵입니까 이것이 침묵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오히려 두려워했다고. 예수님에게는 영적 군세가 있습니다. 일본 카톨릭 문학가인 엔또 슈사크가 쓴 침묵이라는 책을 보면 세반스티안 노드리얼 이라고 하는 포르투갈 신부가 일본에 찾아와서 선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에 보도미에 이에야스가 기독교인을 모조리 잡아 죽이게 됩니다. 큰 핍박에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 순교 사화를 역사적 사료를 가지고 기록한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사람들을 죽일 때에 나가사키 영주인 이노우에가 고안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후미에라고 하는 것입니다. 후미에 그림을 밟는다는 뜻 입니다. 후미에라고 하는 그런 이상한 제도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진을 동판에다가 그린 그 그림을 이런 판자 쪽에다가 또 붙여놓고 이걸 땅에다가 논 다음에 뭐 확실한 그림도 아니지요. 대층이 사람에 얼굴처럼 그려놓고 이 예수님에 그림이다. 예수님에 얼굴이다. 이렇게 해놓고는 이걸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 주고 이걸 밟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죽인다 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 그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밟는다는 것은 신앙을 배반한 것이 됩니다. 사실 이것을 처음에 만들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독교인을 살려주기 위해서 만든 법인데 의외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을 줄 몰랐답니다. 여기서 바로 이 후미에라고 하는 이 사건 앞에 로드리어 신부가 딱 서게 됩니다. 그는 밟으면 살고 지나가면 그가 그림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로드리 신부의 귀에 예수님에 말씀이 들려왔답니다. \"나를 밟아도 괜찮다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하여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그런데 나를 밟는 너의 마음이 몹시 아플 거야. 오늘날 까지 나의 얼굴을 밟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너에 마음도 아플 거야. 밟히긴 하지만 나는 네가 마음으로 아파해주는 그 사랑으로만 충분하다 밟아라\"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로드리에스는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언제까지 침묵하고 있는 것을 나는 원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대답하십니다. \"내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바닷가에다 세워놓고 십자가 형틀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물이 들어와서 민물이 차올 때 사람들은 물속에 빠져 죽게 됩니다. 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신부가 소리를 지릅니다. \"하나님이여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 하십니까? 왜 보고만 계십니까?\" 다시 주님에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침묵, 예수님의 침묵, 빌라도 앞에 서 신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보세요. 여기에 우리를 향한 주님에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도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픔과 고난에 내가 동참하고 있노라\" 여기에 신비로운 역사가 있습니다. 저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조용히 침묵하시는 주님에 모습 깊이 생각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조용히 주님과 함께 고난에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십니다.

가시 면류관에 담긴 예수님의 사랑: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일신의 안위를 위해 사용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눈썹 한 번 치켜 올리시면 가시 면류관을 엮는 군병의 손을 마비시킬 수 있으셨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놀랍다. 하지만 이것이 그분이 오셔서 행하신 사건 중에 가장 놀라운 부분일까? 별들로 구슬치기를 하시던 분이 자신의 무한성을 포기하신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성육신의 가장 멋있는 부분을 알고 싶은가?

 

예수님과 가장 가깝다는 친구들이 그분을 배반하고 달아날 때도 그분이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으셨다는 사실? 아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남녀 죄인들의 온갖 죄를 대신 뒤집어 쓰시면서도 주님은 자기변호를 거부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가장 놀랄 만한 사실은 아니다. 천국의 법정에 무수한 유죄 판결이 울려 퍼지고 빛의 창조자가 죄인들이 가득한 밤의 냉기 속에 버려졌을 때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셨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무덤에서 사흘을 보내신 후 환한 웃음으로 부활의 아침 햇살 속으로 당당히 걸어 나오시며, 초라한 루시퍼에게 “그것이 제일 센 주먹이더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나 심지어 그 부분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도 멋있다. 말할 수 없이 멋있다. 그러나 천국의 면류관을 버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분의 가장 멋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당신을 위해. -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맥스 루케이도

 

예수님은 우릴 대신해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큰 사랑을 받은 내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고백과 헌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 고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라는 신앙 고백이 모든 상황과 시간에 적용되고 있습니까?

저희 모두가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했음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 고개 숙이게 하시고, 친히 죄인들의 변호자 되어 주신 주님께 무릎 꿇고 경배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숨은 믿음의 사람들(요19:28-42)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에 \"목마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이 제일 많이 애원하는 것이 \"목마르다\"는 애원입니다. 십자가는 손과 발에 못을 치더라도 이것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습니다. 금방 피가 응고되고 대신 사막의 뜨거운 햇빛에 온몸을 말려냅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극도의 갈증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보름, 한 달씩 목숨이 유지되며 십자가 밑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한 방울만 혀에 찍어 달라는 애원을 하다가 숨지는 것입니다. 마치 생선을 햇빛에 말리듯 사람을 말려 죽이는 잔인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다 이루었다\"는 나의 주머니가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자신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 이루었다\"는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오히려 배반당하고 찢기우고, 조롱당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의 받을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마태 5)

 

그러면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내 몫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아직 우리는 상 받을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목을 채우는 일보다는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그들을 위한 음료로 내어주시고 그들을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목마르다\"라고 소리치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남의 메마른 가슴에는 샘물을 파주면서 자신은 끝내 목말라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목말라 하십니까? 조롱처럼 신 포도주가 여러분 입에 물려질 때라도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구원을 가져다주는 신기한 부적입니까? 여러분 몫의 십자가를 기다리는 구원의 현장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골고다의 십자가들이 지금 부르짖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목마르다\" 고 저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생에게 가장 치명적인 죄의 문제를 일시에 다 해결하신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기적 같은 대 사건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은 죄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의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이 놀라운 은혜들이 모든 성도들의 삶에 풍성하게 임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운명하십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이 이미 죽으신 것을 알고 다리를 꺾는 대신 창으로 옆구리를 찌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를 지냅니다.

모든 것을 성취한 죽음 (19:28~37) 죽음을 향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성취와 증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전과 후는 구약의 암시와 모형으로 설명됩니다.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으로 유도된 신 포도주의 들이킴은 시편 69:21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완수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4:34). 이 완결성은 죽음 후의 과정에서도 계속됩니다.

 

왕의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 (19:38~42)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즉시 열매가 맺힙니다. 그동안 소심하게 예수님을 믿었던 두 사람이 예수님의 죽음을 계기로 담대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해 몰래 믿었던 아리마대 요셉과 인적이 드문 밤길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협력해서 예수님의 시신을 최상의 영광으로 모십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이들은 독수리 밥이 되게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러나 왕이신 예수님은 장례에서만큼은 왕의 대우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이 영광(요 12:16, 23; 17:1)으로 정의하며 기다리셨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한 소심했던 두 제자가 어둠에서 광명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들이 치른 장례는 예수님의 죽음을 확실히 증언합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암송되듯이 예수님은 분명히 돌아가셔서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마지막에 충성을 바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언제 어디서 말씀을 들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니고데모도 한 번 밤중에 찾아온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두 사람 다 고관이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요, 존경받는 지성인이며, 특히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메시야가 올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철저한 성서적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숨은 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감정적인 사람, 지적인 사람, 의지적인 사람입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조금만 자극을 주면 당장 예수 믿겠다고 쉽게 결단을 합니다만, 신빙성은 없습니다. 언제 또 다른 자극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성적인 사람은 결단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깊이깊이 생각하고, 일단 결정을 내렸어도 자기 체면, 위신, 지위 등을 생각해서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물론, 분명한 것은 합리적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서 합리적 이론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을 한다고 해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는 의심이 가장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일단 믿음 위에 선 뒤에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심이 많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의심을 위한 의심일 때가 문제이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경우에는 가장 확실하고 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 없는 믿음은 비판 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비판 있는 믿음은 비판 앞에서 튼튼하게 서서 신앙을 변증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신앙은 화끈하지는 않지만 조용한 중에 깊이 들어가고, 특히 환난 때에 견고하게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성도들은 두 가지 현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극적인 변화로 분명하게 중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태부터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특별한 감동 없이 믿음이 있는 것 같기고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는 희미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대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은 전자에 비해 자기의 신앙이 든든하지 않다고 걱정하는 것을 불 수 있습니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자의 신앙은 어떤 계기, 즉 사건을 만나면 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자력이 나타납니다. 반드시 야단스럽게 화끈하게 믿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용한 중에 깊이 든든하게 자라나는 것이 지성적 신앙입니다. 분명하고 저력이 있으므로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 집니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인정은 하면서도 충성이 없고, 자기를 부정함으로 소극적이 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 사건 앞에서는 신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두 강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는 일을 맡았던 군사들을 지휘한 백부장은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라고 했고, 누가복음에서는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라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십자가 사건 앞에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거나 오천 명을 먹였을 때에,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보고도 그것을 메시야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서는 그 분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받아들입니다. 십자가 중심 신앙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다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으니 감사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다가 다시 병들면 어찌합니까? 돈을 좀 벌었다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감사합니까? 그러다가 손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병 고침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람은 약간 걱정입니다. 죽을 때에는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감사를 드리지만, 그러다가 손해를 보게 되면 하나님이 떠나신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낙심한다면 이런 신앙은 참으로 문제가 많은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은 환난과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가장 귀한 증거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증거의 초점은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세상적인 축복이나 어떤 이적에서 찾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안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였습니다. 물론 생각은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신이 행하는 이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이미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고 위탁이 없을 것입니다. 지적으로 인정은 하나 전적인 위탁이 없었단 말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모습을 보고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확증하게 됩니다.

 

사람의 참 모습은 죽음에서 드러난답니다. 진실은 죽음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 끝까지 보아야 하고 마지막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끝나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주위에서 보면, 살아생전에 멋있는 사람 같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실망을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끝을 잘 맺도록 소원하는 것은 중요한 기도제목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지휘관인 백부장과 함께 지키던 사람들이 예수가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죽여 놓고서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중생의 도리를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결론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느니라\"고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보아야 네가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 날이 되어야만 네가 알겠구나\"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이 사실화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서야 모든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이제서야 예수가 누구며, 이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에게 헌신합니다. 깨달은 이상 더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지성적 신앙, 숨은 신앙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빛을 나타나게 됩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체면, 명예, 지위를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만약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를 동정했다가는 예수님과 공동 운명에 들어갈 찌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 도망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 위험한 시간에 모든 체면을 다 버리고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신앙입니까?

생명용품의 길

인생은 한 번밖에 없는 기회라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을 많은 사람을 살리며 살아갈 수도 있고,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도리어 많은 사람을 해치면서 허망한 공동묘지로 치달을 수도 있다. 전자가 자기 인생을 생명용품으로 가꾸는 자라면, 후자는 오직 한 번뿐인 인생을 어리석게도 죽음용품으로 소진하는 자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 컷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골고다 위에 세워진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란 의미인데 해골의 정수리에 꽂힌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해골 위로 흘러내립니다. 그 보혈을 타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참 생명이 해골에 임합니다. 마침내 생명의 보혈로 수혈 받은 해골이 생명을 얻고 되살아납니다. 확실히 해골의 정수리에 꽂힌 십자가보다 더 강렬한 복음의 상징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사명을 완성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달려가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죽음으로 열매 맺는 한 알의 밀’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순교자적 삶은 무엇입니까?

 

주님! 이 사회가 골고다처럼 절망의 언덕이라 할지라도, 아니 아무도 부정할수 없는 분명한 골고다 언덕이기에, 절망하기보다는 도리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므로, 한없는 소망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하나님의 나라, 에덴을 회복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이 작은 삶을 통하여, 골고다 곧 해골과 같은 이 세상이 부활의 언덕, 새 생명과 새 역사의 시발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이루신 뜻을 이제 제 안에 허락하소서. 제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은총을 비추어 주소서.

 

 

용서하는 사순절(창 50:15-21)

 

본문은 창세기의 마지막 장으로 요셉과 그 형제들의 화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미워했으며 타박했고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고도 했고 극기야는 장사꾼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팔려온 요셉은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유혹을 물리치다가 오히려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끝내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옛날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요셉은 마음만 먹으면 옛날에 자기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든지 통쾌하게 복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들도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15절에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두려움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20,21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수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기간을 맞아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악을 당하였습니다.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였으며 매질과 그리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사순절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악을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기간입니다. 철천지 원수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나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기인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마5:43-45)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여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순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삶! 그런 삶을 우리도 지금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죄의 은총조차도 누리지 못하며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입술로 고백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진한 주홍빛과 같다 할지라도 다 용서하신다는 말씀이 우리 앞에 분명히 던져져 있지만 우리는 그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요셉의 삶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는 요셉의 모습은 그의 생애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모습은 다름 아닌 용서의 모습! 그것입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이 지난 날 자신들이 잘못한 일을 놓고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늘 그 형들의 지난날의 잘못을 다 용서하고 있습니다. 용서가 있는 곳! 용서가 가득한 곳! 다. 거기야말로 천국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거기야말로 정말 살 맛 나는 세상입니다. 우리 가운데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대의 특성 중 하나가 실수!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용서!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분노! 그것은 우리 안에 없어도 됩니다. 정죄! 그것 역시 우리 안에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용서! 그것은 반드시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과연 어떤 사람이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겠나요? 오늘 말씀은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분명히 주고 있습니다. 먼저 19절 말씀은 두려워서 떨고 있는 형들을 향해서 요셉이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라고 말했습니다. 정죄!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죄 있는 사람이 그 어떤 사람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정죄! 그것은 우리의 몫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한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롬 8:1-2 말씀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저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세상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정죄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요셉의 고백은 그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의식만 있다면 우리도 누군가를 기꺼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고 하는 이런 의식으로 오늘 우리 안에 용서가 가득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두 번째로 20절 말씀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니!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신 말씀을 말입니다.

 

오늘 요셉의 고백은 자신을 일찍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까지 팔려가게 하신 분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 장래를 미리 보시고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하시기 위해서 요셉으로 하여금 먼저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재수라는 말은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그것만이 우리 안에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이런 의식이 있을 때!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지금 누군가가 내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용서가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깊고, 훨씬 높습니다. 사 55:8-9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기에 하나님의 섭리! 그 섭리 안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정말로 좋으신 계획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한 믿음! 그런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에서 좇아나는 용서가 우리 안에 가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열려 있을 때 새로운 정보나 자극이 들어올 수 있고, 새로운 정보나 자극이 오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서서히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작은 변화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전혀 새로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나 개혁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점진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열리고 거기에 성령이 임하시면, 여러분의 삶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기쁨이 생기고, 감사한 마음이 생겨서 가정의 변화를 이룹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열심을 내게 되고 주일 빼먹기를 밥 먹듯 하던 사람이 열심히 참석을 할 뿐 아니라 무엇인가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이니까 지단체가 활발해지고 찬양대가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찬양대가 열심히 노래를 연습하여 부르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면서 듣는 회중들에게 기쁨을 선사하여 그 교회에 활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교회를 내리 덮었던 검은 구름이 걷혀지면서 교인들의 얼굴에 웃음이 깃들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여러 가지 전에 하지 않던 일들이 하나씩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침체했던 교회가 개혁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교인의 마음이 열려서 거기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면 그 변화는 훨씬 더 강력하고 빠른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의 20%만 그 마음이 열리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그 교회 전체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을 20대 80의 원리라고 합니다. 어떤 성과의 80%는 20%가 이룬다는 것입니다. 팔린 매상의 80%는 20%의 상품과 20%의 고객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원리에 의하면 교회 개혁이나 갱신, 그리고 성장과 부흥과 발전의 80%는 그 교회 교인의 20%가 열린 마음을 갖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경우 만약 20%의 교인들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큰 꿈을 꾸기 시작하면 이 교회는 놀랍게 변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바로 사순절 거룩한 절기에 새벽을 깨우시는 여러분에게 이 열린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에 요동이 일기 시작하면서 여러분에 의해서 교회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통해야 산다

숨이 통해야 살고, 말이 통해야 살고, 기가 통해야 삽니다. 사는 것은 통하는 것이고 막히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말이 막히고 마음이 막히면 그것은 살았다 하나 죽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막혀 목숨을 끊고, 어떤 남자는 여자에 막혀 자포자기를 하고, 어떤 여자는 남자에 막혀 삶이 괴롭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일에 막혀 죽을 지경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자기 자신과 막혀 슬프고 외롭다고 합니다. 막힌 관계를 뚫어 통하게 하자는 것이 길이요, 막힌 세계를 열어 통하게 하자는 것이 진리요, 막힌 숨을 통해 시원하게 살자는 것이 생명이지, 그 무슨 길이 있고 어떤 진리가 있으며 그 어디에 생명이 있겠습니까?

 

하수도가 막혔다가 뚫릴 때의 기쁨을 아십니까? 돈줄이 막혔다가 그 어떤 손길을 통해 뚫릴 때의 시원함을 아십니까? 길이 막혔다가 길이 뚫어졌을 때 소통되는 자유함을 아십니까? 인간관계에서 막혀 옴짝달싹 못하다가 관계가 뚫려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할 때의 맛을 아십니까? 먹은 것이 체하여 답답해서 미칠 지경일 때 누군가가 손을 따주어서 체증이 내려갈 때 살맛을 아십니까? 그렇다고 통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통하는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친구와 통하고 싶다면 친구를 찾아가야 합니다.

 

선생님과 통하고 싶다면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자연과 통하고 싶다면 자연과 친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통하고 싶다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찾아야 합니다. 찾아서 만나고, 만나서 듣고, 들어서 해보고, 해 봐서 터치고, 터쳐서 깨치고, 깨쳐서 통하고,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통하는 것이 십자가요, 그리스도가 나와 통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통해서 하나 되어 산다는 것이 내가 갈 길이요, 깨칠 진리요 얻을 생명입니다. 진리를 깨칠 때 마음이 깨어나고 생명을 얻을 때 몸이 깨어납니다.

 

마음이 깨어 몸과 통하고, 몸이 깨어나 마음과 통하는 것, 몸과 마음이 통해서 하나로 사는 것이 건강입니다.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건(健)은 빛이요 강(强)은 힘입니다. 빛과 통하고 힘과 통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신 말씀(Logos)에 통하는 삶입니다.

 

막혔다는 것은 통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막힘 앞에 좌절하고 원망하고 포기하고 사는 것은 삶이 아닙니다. 사는 것은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법인 신관을 갖고, 자연과 통하는 요령인 자연관을 갖고, 사람과 통하는 기술인 인생관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계를 통하는 기술인 관(觀)을 갖고 산다면 막힐 것이 있을까요?

 

사랑의 기술을 갖고 사람과 통하고, 평화의 요령을 갖고 자연과 통하고, 생명의 법을 갖고 신과 통하는 것이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요, 성령의 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진짜 나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살라는 것이 성령의 기도입니다. 머리는 진리로 통하고, 가슴은 사랑으로 통하고, 배는 생명으로 통하는 삶, 이렇게 통해서 하나로 사는 삶, 삼위일체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십자가의 용서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통하고 살게 하신 것이요, 우리 인간들끼리 서로 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롬 5장 6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고 합니다. 8절 말씀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의 사람을 입었다고 합니다. 10절 말씀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바로 그 때에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용서가 가득 묻어있는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제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가 진하게 배어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우리 안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정죄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내 삶의 모든 정황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심으로 이제는 우리 가정에서도, 우리 교회 안에서도 용서가 가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서가 가득한 곳! 거기가 천국이고 거기에 기쁨이 있고 거기에 웃음꽃이 만발합니다. 사순절 새벽을 깨우시는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이, 그리고 우리 영암교회가 그런 곳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삶(롬12장1-13)

 

역전인생

월드컵에 이어 두 번째로 온 국민의 스타가 된 것은 알고 보니 복권이었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복권에 대한 자기 입장을 확실하게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3대가 연달아 벼락 맞아 죽을 확률에 기대를 걸고 왜 남 좋은 일 시키느냐■■고 강경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어떤 이들은 어찌 되었거나 1주일 동안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으니 나쁠 거 없지 않으냐 고 항변하면서 시류에 휩싸여 그럼 나도 한번, 하고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복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복권 당첨되어 좋은 일에 쓰면 좋은 일입니다. “헌금도 많이 하고 구제도 꽤 하고, 장학금도 제법 지급하고, 돈만 된다면, 그 돈으로 거룩한 일에 잘 사용하기만 한다면, 아니 잘 사용하려고 그러기만 한다면 다 무죄하고 오히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 생각하는 흐름이 있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돈을 벌어 어떤 좋은 일에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복권의 열풍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돈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상실하게 만들 것입니다. 가치가 상실된 돈이라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이 하루아침에 역전되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인가요? 역전되어도 좋을 인생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것일까요? 멀고 먼 길을 돌아 겨우 찾아낸 이 길, 사람 때문에, 사랑 때문에 절망하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애썼던 많은 시간들,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삶의 비밀들, 공들여 맺은 소중한 관계들과 그 관계들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들은 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게다가 인생이란 것이 일확천금을 얻는 것으로 한 번에 역전될 만큼 만만한 것인가요? 치사하게 돈 가지고 사람의 꿈을 저울질할 수 있는 것인가요? 뭐가 어찌 되었거나 얼마의 돈으로 1주일 동안의 즐거움을 사기 원하지만 복권보다 더 즐거운 일들이 우리들 가까이 없을까요?

 

로마서는 구원의 도리(파노라마)를 사도 바울의 논리 정연한 필치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여 본다면 구원은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구원의 비밀을 선포하면서 구원받은 자들로 하여금 뜨거운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말씀인 12장에 들어와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먼저 구원의 도리 즉 교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말씀하시고 이젠 구원받은 자로서의 생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리는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여 주는 뿌리 부분이라고 말한다면 생활은 삶을 아름답게 하여주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러므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그것도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이제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삶을 살면 안 되겠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가장 큰 병패가 있다면 예배와 생활의 분리일 것입니다. 이성으로 깨달아지고 감정으로 뜨거워진다고 해도 실제로 주의 일에 시간과 몸을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생활은 거룩한 삶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나는 내 몸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주님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일, 내가 해야만 할 일을 하는 것은 주님께 부름 받은 자, 헌신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단순히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아닌 믿음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알고, 배우고, 행하고, 순종합시다”. 주님은 차가운 논리와 이론을 원치 아니하시고 뜨거운 가슴을 원하십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 앞날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은혜 받은 자와 메마른 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은혜 받으면, 믿음 있는 자는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주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귀한 줄 알고 주의 몸 된 교회가 귀한 줄 알고 주님이 주신 직분이 귀한 줄 압니다. 그래서 주신 직분이 귀하기에 거기에 걸 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들이 지금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몸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옛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나 가정이나 교회에서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은 제물은 되지 않고 자신이 살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살고 지는 자가 이기고 낮은 자가 높은 자라는 원리를 알면서도 막상 나 자신을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은 자기의 행실을 죽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된 몸을 원하고 계십니다. 몸과 마음을 다한 정성의 예배를 원하시고 몸과 마음을 다한 충성을 원하십니다.

 

영적 예배라는 말은 온전한 헌신과 봉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예배라는 것이 단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만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하여 있는 현장에서 우리의 부패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그곳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예배의 생활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릴 산제사는 우선 찬미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을 벌려 하나님께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생활이 바로 산제사입니다. 찬미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기적을 체험하고 억눌린 현실에서 구원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찬양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온몸과 전 삶을 통해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산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말씀에는 또 한 가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는 \"흠이 없는 것\" \"부정한 것이 없는 것\"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세속에 물들지 않은 진실 되고 거룩한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는 두 가지 원리

본문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세대를 본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도가 믿음의 순수성을 세상에 다 빼앗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 발목 잡혀서 믿음을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적극적인 의미로서 \"하라\"는 말씀인데 본문에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음은 행동을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부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모든 행동지침들이 지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마음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고 지키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마음을 새롭게 하고...\" 라고 한 것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의미합니다. 결심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겠다고 의지적으로 결심하고 힘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심 3일이라도 좋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먹으면 3일 동안이라도 새로운 생활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예 새로운 마음을 먹지 않으면 언제나 그는 세속에 물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가까이하는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의지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맥스웰 말츠가 말하기를 새로운 습관 하나를 형성하는 데는 최소한 21일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의지력이 필요합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품은 마음이 사흘을 못 간다는 뜻으로, 결심이 굳지 못함을 빗대어 이르는 말입니다. 작심삼일을 극복하는 방법은 삼일에 한 번씩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삼일에 한 번씩 작심하려면 변화를 추구하는 이유를 자꾸 의식해야 합니다. 의식을 깨도록 도와주는 것이 독서입니다. 예를 들어 계속해서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기 위해서는 말씀 묵상의 중요함을 쟁점으로 다룬 책을 가까이 두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독서를 통해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면서 영혼이 살찌고, 의지력이 강화됩니다. 변화에 대한 끝없는 도전과 자극을 받게 됩니다. 영성 회복을 위한 독서를 통해서 의지력이 강화되면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이 됩니다. 우리 전존재를 변화시키는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성경입니다. 영적 독서는 하나님의 말씀뿐만이 아니라, 신앙도서나 번역서 등의 책을 읽고, 되새김질하는 과정까지가 해당됩니다.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루이스(C.S. Lewis 1900-1963)는 \"우리는 지금 알과 같은 존재들인데 그냥 무한정 평범한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알은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무한정 보통의 알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화되거나 썩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말은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는 \"하면 좋은 것\"(Nice to Do)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Survial Issue)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사회가 변화되어한다느니 국가가 변화가 되어야 한다느니 혹은 교회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변화의 우선순위는 나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 주위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변화의 출발점은 바로 나 자신부터 입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행복한 삶을 위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날마다 반복적이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몸 관리를 소홀히 하면 건강은 점점 나빠져 갑니다. 자동차 관리를 게을리 하면 상태가 나빠져 갑니다. 텔레비젼만 오래 보다보면 멍청한 상태가 되어갑니다. 무엇이든지 소홀히 하면 그 상태가 점점 나빠져 갑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요,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라고 또한 가족이라고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돈독하다고 생각하고 사랑과 관심으로 돌보지 않으면, 나중에는 냉랭한 껍데기만 남고 형식적인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반복적인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료함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삶에 사람들은 따분함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고 그저 마음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것은 무료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져 있고 그 안에 안정이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는 흥미롭지만 불안정하고 생소합니다. 사람들은 안정 속에 변화를 원합니다. 익숙해진 습관,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데 이것을 개혁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을 쇄신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것은 반복적이며 모든 일은 무료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을 의미 있게 보내자면 개혁을 하고 쇄신을 해야 합니다.

(1) 자아의식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자아의식은 어떠한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능력이 없으며 큰일을 할 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 자아의식을 쇄신하여 긍정적 자아의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2) 가족과의 관계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 가족과의 관계는 이 세상 모든 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다른 관계에 아무리 힘을 기울여도 참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관계보다도 가족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족과의 관계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여기에도 엔트로피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오늘날은 가족들이 한 집에서 살 뿐 각기 자기 생활에만 몰두하여 가족 사이의 유대관계를 강화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 여러분은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어떤 것을 먼저 하는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먼저 하고싶어 하면서도 실제는 \"긴급한 일\"을 먼저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긴급한 일이 중요한 일이라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하지는 않으면서도 긴급한 일을, 긴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보다 먼저 하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가족과의 관계를 위한 일은 긴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3)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타성이 붙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타성이 되면, 무료하면서도 변화를 거부하게 됩니다. 타성이 된 신앙생활은 형식적이 되고 율법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아의식을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가족들과의 관계를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가족인 교인들과의 관계를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돈으로가 아니라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기도 드립니다. 주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제 안에 영적이고 고상한 습관들이 형성되게 하소서. 날마다 내면의 은밀한 죄와 싸워 승리하게 하시며, 오늘도 만나는 사람, 해야 할 업무를 대할 때 주님이 주시는 신선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