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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요17:11-19)
오늘의 말씀 요약: 하나님께로 가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이듯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고 보전되기를 기도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으로 보내셨듯이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심으로 저들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하십니다.
이제 한 주간 후에는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수난주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하나님께 드린 중보기도입니다. 죽음의 고통과 고난의 쓴잔을 앞에 두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과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를 깨달아야겠습니다.
본문1절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이 끝나고 이제 십자가의 고난을 받을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자신을 위해 힘과 용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 중심적인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속사역이 완성되면 예수님은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무기력한 죽음이 아니라 영광을 나타낸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경우도 똑같습니다. 주님의 순종의 삶을 따르므로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시고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우리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1. 성도의 보전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본문 11절에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라고 했습니다. ‘보전하다’는 굳게 붙잡다. ‘보살피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간구는 세상의 악과 오염으로부터 성도들을 굳게 보호하며 안전하게 보살펴 주실 것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육신의 건강이나 부귀영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님의 중보기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굳게 붙잡아 주십니다. 낙심의 자리에서 건져주십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도록 하십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중보기도만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주님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라고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우리도 악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둘째, 주님과 언제나 함께 해야겠습니다. 12절에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셋째,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해야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호와 도우심이 날마다 시간마다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호를 받기위해 우리를 위해 지금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맡겨주신 성도의 직분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 날마다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2. 성도의 거룩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본문 17절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거룩은 세상과 분리된 삶, 죄악과 분리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 안에서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맞게 거룩하여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만이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3.성도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본문 21절에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 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하나가 될 것을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그 근거는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에 의해서 간구하셨습니다. 교회의 일치, 성도의 일치는 제도적이거나 조직적인 차원에서가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외형적 일치보다 영적 연합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 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됨으로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 하나님, 한 예수님, 한 성령님, 한 신앙, 한 세례로 우리는 한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서로 연합될 때 한 지체가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로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가 될 때 세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사랑을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게 하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 곳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증거요 사탄이 바라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서 떠나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감동시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우리의 말로만이 아니라 진실로 사랑하고 서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믿음으로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의 온전함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23절) 그럴 때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영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주안에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하나가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천상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 마귀와 싸워 이기도록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말씀 안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안에서 믿음으로 서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소원일지라도, 그것이 입술의 고백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의 피어린 펌프질을 통해서 기도의 실천에 마음을 쏟고 피를 적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순례길이 무릎으로 걸어간 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엎드리신 곳에서 우리도 엎드리고, 주님이 흐느끼신 곳에서 우리도 울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들과의 하나 됨을 지켜가고 있습니까? 진정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내 안에 세상과 하나가 된 곳은 없습니까?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구원을 허락하심에 감사합니다. 세상이 저를 미워해 핍박할 때, 주께 속해 있음을 깨달아 감사하게 하소서.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20-23)
인생은 만남이고 만남은 곧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하나 되는 것이 축복이고 행복이다.
만남도 중요하지만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갈라지는 데서 옵니다.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갈라지는 데서 영적 비극이 초래되었고 아담이 하와에게서 갈라지는 데서 가정의 비극이 초래되었으며 가인이 아벨에게서 갈라지는 데서 사회의 비극이 초래되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 가정과 사회의 모든 문제도 서로 갈라지는 데서 초래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고 자식이 부모와 갈라지며 남편이 아내와 갈라지고 아내가 남편과 갈라지는 데서 모든 비극이 초래됩니다. 동서와 남북의 갈라짐이 우리 민족의 근본적인 비극일 것입니다. 갈라짐은 곧 죄요 멸망입니다. 하나 됨은 곧 구원이요 생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존재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리고 인간의 피와 살을 서로 나눔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갈수록 존재가 충만해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질수록 비존재가 된다.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요점은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오고 오는 수많은 신자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드린 대제사장의 기도는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였습니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21).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이 기도를 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5).
왜 예수님께서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렸습니까?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갈라놓았고 우리를 서로 서로에게서 갈라놓았는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원상 복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셨고 성자 예수님도 그것을 원하셨고 성령님도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고후5:19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기를 원하셨다고 했습니다. 엡2:13에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갈4:3에 보면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살리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기쁘게 만드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를 서로 서로 하나 되게 하시는 데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 됨의 상징입니다. 수직적인 하나 됨과 수평적인 하나 됨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우리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기도가 아직도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이 기도 때문에 기독교의 역사에는 놀라운 하나 됨의 운동이 때마다 일어나곤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예루살렘교회의 태동은 하나 됨의 운동이었습니다. 행10장의 고넬료 집의 부흥도 하나됨의 운동이었고 행13장의 안디옥 교회의 부흥도 하나 됨의 운동이었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도 실상은 하나 됨의 운동이었습니다. 주님의 애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남편과 아내가 눈물로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부모와 자녀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화목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가정과 사회와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의 운동이 새롭게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비결 세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창2:18에 나타난 창조의 비결입니다. 즉 우리의 존재가 \"서로 돕는 배필\"이란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서로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존재가 나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쉽게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을 모두 \"내 탓이라\"고 돌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바로 나 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도와 가며 살아 가야할 지체들입니다.
요17장에 나타난 구속의 비결입니다. 여기 \"우리와 같이\" 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우리를 구속하고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에 있어서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자기와 화목시키기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신 것처럼, 아들이 세상을 아버지와 화목시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것처럼, 그리고 성령께서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서 죄인들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내어 주면서 하나 되라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모델로 삼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자신을 내어 줄때, 자신을 희생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했습니다. 주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한가 될 수 있고 부모와 자녀가 하나가 될 수 있고 상전과 종이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 소리 때문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리시고 기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 소리를 듣기 때문에 하나 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고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기도는 기어코 응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와 소원이 우리 가운데 그대로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생동하는 교회,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교회, 연합운동을 펴 나아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를 위한 주님의 기도(요17:20-26) 447장
[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믿는 자들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 안에 거하도록 간구하십니다.
모두가 하나 (17:20~23) 교회가 하나 될 때 세상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열두 제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제목은 모두가 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가 되시고, 교회가 하나가 되며, 하나 되신 하나님과 하나 된 교회가 다시 하나가 됩니다.
그분의 영광과 사랑 속으로 (17:24~26) 연합과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의 종착점은 천국입니다(14:1~3). 모든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일어나십니다.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비전에 사로잡힌 의연한 걸음이셨습니다. 결국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교훈하여 주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셨고,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도 말씀하셨으며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고 하셨고,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부며, 알을 달라 아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1-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기도하라는 교훈을 주셨을 뿐 아니라 늘 기도하셨고 심지어는 십자가상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7장은 기록에 남은 가장 긴 예수님의 기도문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예수님의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멜랑히톤(Melanchthon)은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드린 이 기도보다 더 높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들린 적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죤 칼빈(John Calvin)은 \"이 기도는 예수의 설교에 권위를 주는 인장(印章)이다.\"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그 울리는 소리는 단순하나 그 깊이와 넓이의 풍성한 것은 이를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벵겔(Bengel)은 \"이는 성서 전체 중, 말씀은 가장 쉽고 뜻은 가장 깊은 장(章)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보통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려 집니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희생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자신과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지낸 것처럼 우리의 완전하신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는 1)주님 자신을 위하여(1-5)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고, 2)제자들을 위하여 (6-19)\"제자들이 하나 되고 하시고,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3)온 교회를 위하여 (20-26)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과 제자들과 온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폭이 넓었습니다. 우리도 기도의 폭을 넓게 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본문 20절에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제자들이 나가서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당시는 몇 시간 후면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이 다시 회복 될 줄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할 자라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목숨 걸고 전한 말씀, 복음을 통하여 오고 오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될 것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발 앞에 닥친 문제를 위하여서 기도할 뿐 아니라 먼 장래를 내다 보시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온 교회를 위하여 드린 예수님의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첫째 기도 제목은 \"하나 되게 하옵소서\"입니다.
21-23에 보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21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절),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이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전 세계의 교회가 하나의 교회가 되기를 위하여 하신 교회입니다. 초대교회 안에서도 이런 분열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 서신을 보면 하나가 되라는 권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를 들면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으로 목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실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전도를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열하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평안하고 하나가 되면 전도가 잘 됩니다.
둘째 기도 제목은 \"나의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입니다. 본문 24절에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신 말씀은 요17:1-2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임하여 주신 사명, 곧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승리자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신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배의 삶, 선교하는 삶,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중보기도: 중보기도는 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인 기도입니다.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하는 기도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을 위한 기도의 측면도 놓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의 핵심 가치는 이웃을 위한 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본회퍼를 히틀러와 투쟁한 민주 투사로만 기억하지만 사실 놀랍게도 그는 아주 깊은 영성의 세계를 지녔던 사람입니다. 공동체와 기도의 영성을 강조했던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보기도란 개인과 공동체가 날마다 스스로를 정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목욕과 같다.”
목욕이나 샤워를 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시원하지 않습니까?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들을 쏟아 붓고 기도하다 보면 우리 마음에 거룩한 쾌감이 찾아듭니다.
중보기도는 바로 마음의 깨끗함과 회복이라는 축복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중보기도 사역이란 무엇일까요? 중보기도 사역은 주님이 친히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사역입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같이하자고, 더불어 하자고 우리를 초청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사역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 사역은 성도들이 첫째로 감당해야 할 사역입니다. 중보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 「세상을 끌어안는 중보기도 파티」/ 이동원
요 17: 20 만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건넛방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듣는다면 백만 적군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시간 역시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도하는 그곳에 언제나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아버지께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며 언급하시는 오늘, 그분의 말씀을 주의하여 들으십시오.
인생은 만남이고 만남은 곧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하나 되는 것이 축복이고 행복이다.
만남도 중요하지만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갈라지는 데서 옵니다.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갈라지는 데서 영적 비극이 초래되었고 아담이 하와에게서 갈라지는 데서 가정의 비극이 초래되었으며 가인이 아벨에게서 갈라지는 데서 사회의 비극이 초래되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 가정과 사회의 모든 문제도 서로 갈라지는 데서 초래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고 자식이 부모와 갈라지며 남편이 아내와 갈라지고 아내가 남편과 갈라지는 데서 모든 비극이 초래됩니다. 동서와 남북의 갈라짐이 우리 민족의 근본적인 비극일 것입니다. 갈라짐은 곧 죄요 멸망입니다. 하나 됨은 곧 구원이요 생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존재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리고 인간의 피와 살을 서로 나눔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갈수록 존재가 충만해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질수록 비존재가 된다.”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요점은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오고 오는 수많은 신자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드린 대제사장의 기도는 \"저희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였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렸습니까?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갈라놓았고 우리를 서로 서로에게서 갈라놓았는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원상 복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를 서로 서로 하나 되게 하시는 데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 됨의 상징입니다. 수직적인 하나 됨과 수평적인 하나 됨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우리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기도가 아직도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이 기도 때문에 기독교의 역사에는 놀라운 하나 됨의 운동이 때마다 일어나곤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예루살렘교회의 태동은 하나 됨의 운동이었습니다. 행10장의 고넬료 집의 부흥도 하나됨의 운동이었고 행13장의 안디옥 교회의 부흥도 하나 됨의 운동이었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도 실상은 하나 됨의 운동이었습니다. 주님의 애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남편과 아내가 눈물로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부모와 자녀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화목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가정과 사회와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의 운동이 새롭게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을 모두 \"내 탓이라\"고 돌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바로 나 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도와 가며 살아 가야할 지체들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내어 줄때, 자신을 희생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했습니다. 주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될 수 있고 부모와 자녀가 하나가 될 수 있고 상전과 종이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였느냐(요18:28-40) 217장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고 왔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그분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자, 무리들은 예수님 대신에 강도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칩니다.
1분 1초를 다투는 현대사회에서, 떨어지는 모래로 시간을 측정하는 모래시계란 단순히 장식품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엉성한 모래시계가 주는 교훈만큼은 그 어떤 첨단 시계보다 더 지대한데 그것은 모든 시간에는 끝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밧데리가 장착되어 있는 현대시계는 언제 그 밧테리가 다 소진되어 초침이 멎을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래시계는 아래쪽에 쌓인 모래를 통해서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그리고 위쪽에 남아 있는 모래로는 남아 있는 시간을 한눈에 식별케 해 줍니다. 그렇기에 떨어지는 모래는 단순한 모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살아 있는 시간인 동시에, 지나간 모든 과거의 축적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을 모래시계로 비유할 줄 안다는 것은 크나 큰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손목시계의 초침은 쉬지 않고 끝없이 회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역시 끝이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끝을 알 수 없는 손목시계가 아닙니다. 분명히 그 끝이 있는 모래시계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래쪽 모래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위쪽이 늘어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흘러가는 시간은 단순한 시간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남아 있는 내 인생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내 생명 그 자체인 동시에, 이미 지나온 내 인생의 실상이요 실체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만 매 순간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진리 안에서 바르게 행하는 자가, 모든 지금의 총집합인 자신의 인생을 바르게 세울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생이 끝나는 순간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께 묻겠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 질문을 받고서 그 동안 무엇을 했었는지 선뜻 기억할 수 없는 분이 있다면, 사람마다 그 이유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그 이유가, 여러분의 인생을 끝없이 돌아가는 손목시계로 착각하고 아무 의미 없이, 생각도 없이 살았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인생이 정녕 모래시계임을 깨달아, 그 모래시계의 끝을 보면서 그 동안 떨어지는 모래를 진리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담아 바르게 가꾸어 보내었더라면, 그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았었는지는 답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지 않은 분들이, 나는 그 동안 이런 일들을 했었다고 정확하게 기억하며 답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인생이 모래시계임을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모래시계요, 떨어진 모래는 소멸되어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산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쌓여진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떨어지는 모래를 바르게 가꾸어야만 이미 떨어진 모래 역시 바르게 축적되어 바른 인생이 구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동안도 살았던 사람이라면 최소한, \'나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만 그동안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바르게 행하려고 노력했다\'라고 대답할 수는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빌라도 총독은 꼭두새벽부터 유대인들이 끌고 와 십자가에 처형해 달라고 고발한 예수님을 자신의 공관 안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b)\"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스스로 유대인의 왕으로 자칭하며 로마 황제에게 맞서려는 행악자로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34)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네가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이 빌라도 자신의 판단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유대인들의 고발내용을 전한 것인지를 물으셨습니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정치적 왕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대답은 \'아니다\'이어야 했고, 후자의 경우라면 종교적 메시야를 뜻하기에 그 답변은 \'맞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본문 35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빌라도는, \'네가 왕이냐\'는 자신의 질문은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단순히 유대인의 고발 내용에 기인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가 도대체 무엇을 하였기에 유대인들이 모두 널 죽이려 하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질문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 이것은 곧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한 순간의 질투심을 억누르지 못해 동생 아벨을 들로 끌고 가 쳐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씻고 되돌아갔습니다.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지 생각조차 하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충분하고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카인을 찾아오시어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나님의 그 질문 앞에서 카인은 비로소 인류 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한 피를 나눈 형제를 쳐 죽인 부끄러운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았지만, 그것은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하나님의 이 질문 앞에서 카인은 남아 있는 여생만큼은 바로 가꿀 수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셨던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 모든 인간을 향하여 매순간마다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묻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참된 신앙 유무 여부는 오직,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여기에서 \'하다\'는 동사 poyeo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첫째 행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질문의 의미는 네가 진리를 행하였느냐 아니면 죄를 행하였느냐는 뜻인 것입니다. 둘째는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네 인생을 진리의 전으로 만들었느냐 아니면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느냐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네 삶으로 이룬 것이 진리의 열매인가 아니면 죄의 열매인가 하는 뜻입니다. 넷째는 좇는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지금 좇고 있는 것이 진리인가 아니면 허망한 욕망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베푼다, 혹은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지금 누구에게 무엇인가 나누어주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 안에서의 생명인가 아니면 죄악 속의 죽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질문 속에는 이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을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주님께서는 세속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 오셨음을 밝히시는 답변입니다. 본문 37절이 이렇게 계속됩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주님께서는 진리의 왕이요, 바로 그 진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어 그 진리를 삶으로 증거하셨다는 것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진리만을 행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의 당신의 인생을 오직 진리의 전으로만 가꾸셨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인생으로는 진리의 열매만을 결실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만 좇았다는 고백입니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진리 안에 있는 참 생명만 나누어 주셨다는 답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첫째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당신의 이 땅에서의 삶은 마치 모래시계처럼 반드시 끝날 때가 있다는 것과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둘째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난 뒤에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셋째, 그러므로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당신의 시간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엮어가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 흘러내린 그 분의 삶은 축적된 진리 그 자체였고, \'네가 무엇을 행하였느냐\'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하여, 나는 진리를 위하여 났고, 진리를 위해 이 세상에 왔고, 진리를 삶으로 증거했었노라고 거침없이 답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고 있는 빌라도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지금 진리를 심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진리를 잘 알아서입니까? 주님의 답변을 다 들은 그는 본문 38절을 통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을 정도로 진리에 대하여는 무지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빌라도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자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진리를 못 박는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여러분이 좇고 따르고 행했던 것이 진리였습니까? 아니면 죄와 욕망이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진리의 전으로 가꾸었습니까? 아니면 강도의 굴혈이 되게 했습니까? 여러분의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있다면 생명의 열매입니까? 아니면 죽음의 씨앗입니까? 우리는 이 사순절 아침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인생은 손목시계가 아니라 모래시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사람만 인생에 끝이 있음을 알고 끝을 대비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나간 나의 모든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다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실 첫 질문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일 것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때에만 진리를 행하는 삶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가서 보여 드릴 수 있는지 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결코 아닙니다. 작가 가브리엘 엑셀(Gabriel Axel)은 “그날 하나님 앞에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진리를 위하여 스스로 포기했던 것과 남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되돌려 받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위해 선택치 않은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진리를 행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진리에 따라 나눌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리는 사유 속에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세히 보십시오. 우리 인생이 지금도 모래시계 모래처럼 흘러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윗부분이 점점 더 비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고 나누어야 할 것을 나누는 자가 되십시오. 그 때에만 우리의 모래시계가 다하는 순간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날을 위해 오늘 아침에도 묻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이제껏 남이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처럼 진리와는 무관한 어리석은 삶을 사느라 참으로 귀한 시간들을 덧없이 많이 버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어 또 불러주시사 우리의 인생이 모래시계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미 흘러내린 시간과 남아 있는 시간을 확연하게 보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흘러내린 시간은 소멸 되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축적됨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셨사오며 성령의 조명아래서 지금도 계속 흘러내리는 우리의 시간을 오직 진리로 바르게 엮어가게 하옵소서. 진리를 위해 버려야 할 것을 미련 없이 버리게 하시고, 진리를 따라 베풀어야 할 것을 기꺼이 베푸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모래시계가 다하는 순간 기쁨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이야말로 우리를 바로 세우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가장 위대한 사랑의 고백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아멘.
영원한 장소, 예수 그리스도
인간은 누구나 무의식 속에 ‘장소’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병리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원초적으로 장소를 상실한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장소를 원하고 있으며, 또한 그곳에 애착을 가지고 뿌리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삶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해 가는 데 있어서는 특정한 생활공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공간은 가정, 사귐, 직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인간에게 장소에 대한 향수가 없어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또 어떤 사람은 숨기거나 다른 것으로 대치하고 있을 뿐 완전한 장소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완전한 장소에 대한 향수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 대한 향수입니다. 인간은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누구나 실낙원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장소를 잃어버린 인간이 어디서 다시 진실 된 장소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참된 장소를 찾을 수 있는 곳은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나약성과 죄인 됨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장소입니다.
요 18: 36 예수님의 왕권과 통치는 이 세상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속한 그리스도의 나라의 목적과 원리, 방법은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게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려는 욕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일을 하면서 세상의 방법대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충성심은 하나님 나라에 우선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저희에게 하늘로 이어지는 계단이 되어 주셨습니다. 자신을 비우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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