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2째주 설교 4편

\"사순절 둘째주일 설교 4편\"|주일낮설교
새생명축복 | 조회 298 | 10.02.26 17:27 http://cafe.daum.net/SermonSchool/HmtY/251 

잔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요2:1-12)

예수님의 손은 전능한 손

옛날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은 우습게만 느껴지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은 과거 신문에 실렸던 내용들입니다. “시속 30마일로 여행하면 누구나 질식하고 말 것이다”(1840년). “인간의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기계 조립은 불가능하다”(1901년). “달에 가겠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1926년).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이 모든 일들이 지금은 다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생각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기적은 우리 안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기적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필립 얀시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심지어 우리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안에 계신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고 있습니까? 당신 안에 계신 하나님을 얼마나 크고 능력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십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모두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가리켜「표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표적」이라는 말은『요한복음』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용어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적이라고 소개하거나 그냥 능력 혹은 권능이라고 했는데,『요한복음』에서는「표적(標蹟)」이라는 좀 생소한 말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사건을『요한복음』에서만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표적이란 말의 뜻은, 사건은 사건대로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의미보다는 그 사건 속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건 자체가 뜻을 전달하는 하나의 언어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본문의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인가?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있듯이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목적, 즉 주제(主題)가 있는 것이다. 그 해답은 본문 11절에서 밝힌 대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신가를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표적을 행하셨다. 이 표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나아가서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먹고 마시기 위해 가나 혼인 잔치집에 가신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고, 그리하여 그들로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 표적을 행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공식적인 자리에 취임하여 처음에 하는 일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앞으로 그 사람이 할 일과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처음으로 보여주신 사건은 가나 혼인잔치에 참석하셔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비난한 것처럼 술을 즐기고 포도주를 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을 데리고 먹고 마시는 잔칫집부터 가신 것이었겠는가?

성경에 보면 포도주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술 취해서 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경고를 하고 있지만, 포도주는 늘 기쁨과 환희에 대해서 상징적인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 시편 104편 15절에 보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전도서 10장 19절에서는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성경에 나오는 술이나 포도주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첫 번째 이적을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가? 거기에는 기쁨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잔치집은 모든 것이 풍성하다. 거기에는 음식도 많고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웃음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잔치 집의 풍성함과 기쁨이었다.

기독교는 잔치 집과 같은 종교이다. 흔히들 교회라고 하면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예배 중에는 몸이 굳어지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경건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가르치는 종교요, 그러기에 감사와 축제가 있고, 내일의 소망을 노래하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참회의 눈물이 있고, 엄격한 계율이나 절제의 생활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이적을 행하신 것이 가나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물을 가지시고 포도주를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혼인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사건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잔치를 회복시키시고, 기쁨을 회복시키시며, 기다릴 것이 있고 소망할 것이 있는 자로 우리를 고치시겠다는, 보다 깊은 뜻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비난하는 말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친히 당신을 혼인집 신랑으로 표현하시며,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라고 말씀하심으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삶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즉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요 환희와 축제의 종교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즐거워야 할 잔치 집에 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포도주가 모자랐다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잔치하는 날,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의 주식이 양고기였는데, 이 양고기를 먹을 때는 반드시 포도주를 곁들여 먹었다. 그런데 잔치 집에서 주 음료인 포도주가 도중에 모자랐으니 주인 측에서는 얼마나 당황했을까가 상상된다. 어쨌든 잔치 집에 포도주가 부족한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께 의논하였다. 잔치 집에 포도주가 모자라면 주인에게 가서 이야기하던가, 연회장에게 이야기해야 옳은데도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보고를 한다. 신랑도 아니고 잔치 집 주인도 아니고 연회장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한 것은 전후 문맥으로 보나 마리아의 믿음으로 미루어볼 때 그것은 예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혹 이런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문제까지도 마리아는 지난 30년간을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경험한 바에 의해서 예수님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믿었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예수님께 이야기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의 문제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부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을 예수님께 아뢰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하실 수 있는 해결자요 능력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포도주 사건은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의논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어떤 일이든지 상식적으로 스스로 판단해서 포기하지 말고 개인적인 문제까지도 예수님께 의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지극히 작은 문제까지도 관심을 가지시고 귀를 기울이시며 듣기를 원하신다. 상담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의논하며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오늘도 부족함이 없다. 비록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비록 건강이 부족하고, 비록 재물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할지라도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고 간증할 수 있다. 아쉬울 것이 없노라고 노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마리아가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말을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하셨는가? 4절 말씀을 읽어보자(요 2:4∼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우리들이 얼른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를 가리켜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말씀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씀은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는 말씀이다. 본래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여자여\'라는 이 말의 의미는 왕이 왕후를 부를 때 쓰는 용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이 말은 여자에 대한 최고의 높임말로 쓰여진 것이었는데,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다보니 이런 문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훨씬 이해하기가 쉬운 줄 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리아의 태도이다. 5절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일단 순종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먼저 순종해야 한다고 믿는데서 문제의 해결이 있다. 이적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직선적이고도 특별한 은혜로써 사람들에게 은사로 주시는 것이지만, 이 은사를 받는 그릇은 나에게 있어야 한다. 그 그릇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과 순종이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졌다. 예수님의 표적은 아주 간단하게 나타났다. 오늘 본문 6절 이하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마침 그 집에 커다란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셨다. 하인들이 물을 떠다가 아구까지 물을 채웠더니 이제는 떠서 갖다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물을 떠다 부으면서부터 불평을 했을 것이다. \"아니 포도주가 없다는데 물은 왜 갖다 부으라고 하지?\", \"그것도 어느 정도 갖다 부었으면 되었지 무얼 하려고 이렇게 아구까지 채우라고 하실까?\" 하면서 수군거리며 투덜댔을 것이다.

그러나 하인들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항아리마다 물을 아구까지 갖다 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물을 떠온 하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대로 순종했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그것도 보통 포도주가 아니라 아주 맛있는 고급 포도주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란다(요 2:9∼10). 이 사실은 처음부터 과학적인 사고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모르는 연회장이나 손님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연회장도 모르고 신랑도 모르는 그 사건을 누가 알았다고 했는가? 예, 물 떠 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다. 기적이란 이와 같이 순종할 때 나타나며, 믿을 때 나타나고, 말없이 봉사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수많은 이적 기사가 있지만, 거기에는 항상 그 기적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었고, 그 말씀을 받는 사람이 거기 또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였다. 오늘 우리들도 마리아의 이 말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는 말씀처럼 순종하여 기적을 체험하고, 능력을 받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란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풍성한가? 포도주가 넉넉한가? 아니면 문제가 있는가?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없나? 걱정하며 고민하는 일이 있는가? 예수님께로 나아오라. 그리고 \"주여, 나의 포도주가 떨어졌나이다\" 기도하시기 바란다. 신앙생활에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고, 오히려 힘이 드는가? 성령의 신령한 포도주가 없기 때문이다.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힘 있게 하는 성령의 포도주가 떨어진 증거이다.

예수님께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문제를 제기한 마리아와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한 하인들, 그리고 또 그 항아리에 부은 물을 다시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준 사람들, 모두가 기적을 가져오게 한 사람들이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잔치집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초청해서 함께 그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마리아의 믿음의 고백도 들을 수 있었고, 하인들의 순종도, 연회장의 기쁨도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곳에 안 계시고, 마리아가 아무리 믿음이 좋고 지혜롭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순종 잘하는 하인들이 부지기수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이런 표적과 기사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무미건조하던 인생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발견하고, 맛없고 가치 없는 생애가 비로소 아름다운 빛깔을 나타내는 포도주와 같은 인생으로 변하는 줄 믿습니다. 진정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의 왕좌에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진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날마다 풍성한 삶을 살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은혜와 기쁨이 더하고 축복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가나 혼인 잔치집의 기적이요 축복이다.

예수 없는 사람들에겐 진정한 미래가 없다. 소망이 없다. 해가 갈수록 실망이 더하고 슬픔이 더하고 허무가 더하다.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초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을 모신 심령과 가정은, 주님께서 계시기에 처음보다 나중이 점점 더 좋아질 뿐 아니라, 날마다 주시는 은혜와 각양 은사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을 살고, 훗날 우리 주님과 함께 햇빛보다 더 밝은 저 천국에서 살게 될 줄 믿는다. 나의 삶에서 가장 깊은 갈증을 느끼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삶의 필수 요소가 바닥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나의 삶은 예수님께서 만들어 내신 맛있는 포도주의 활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혹시 빈 항아리처럼 고갈된 상태는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진리 안에서 제 생을 새롭게 빚어 주시길 원합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진 제 삶이 가정과 일터, 사회를 새롭게 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다가오는 핍박 드러날 영광(요 16:1-15)

예수님이 사람들의 핍박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후에 오실 보혜사 성령님은 죄와 의, 심판에 대해 모든 것을 밝혀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성령 가운데 모성적인 일을 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모성적인 성령이 보혜사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뜻은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인데, 본문에 이러한 보혜사의 하는 일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번역을 달리 번역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눈을 떠서 새로운 것을 보게 합니다. 그 새로운 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실 시간을 얼마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사와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제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해서, 예수께서 하셨던 일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되어야 하겠기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중요한 내용은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과 그 보혜사가 오셔서 할 일에 대한 것입니다. 보혜사가 할 일로 죄·의·심판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의미한 사건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교회가 굳게 서 갈 수 있고, 복음이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고 능력 있는 복음으로 선포될 수 있습니다.

 

보혜사가 하는 일이 눈을 뜨게 하는 일이라고 할 때 여기서 뜨게 한다는 것은 태어남·자람·깨어남·갱신의 뜻이 포함됩니다.

 

먼저 보혜사는 존재의 새로 태어남을 통해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과 우리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하며, 우리의 내적 실체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씨앗을 주며, 우리 안에 새로운 나를 세우며,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삶의 현실을 갱신시킵니다.

 

보혜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다시 태어남은 하나님의 미래의 희망 속에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초인적 인간, 현세의 인간의 경험들을 초월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고난의 면제도 아닙니다. 그리고 아울러 희망과 함께 인간으로서 사랑과 고통, 삶과 죽음을 다르게 경험해 가게 됩니다.

 

보혜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다시 태어남은 자연 속의 봄을 연상케 합니다. 즉 모든 나무들과 식물들의 푸르름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이 다시 태어남은 영원히 사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과 시간의 만남입니다. 그 다음으로 보혜사는 다시 태어나게 함과 함께 자라게 합니다. 다시 태어남은 자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에서 도덕적 완성을 그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됩니다.

 

믿음에 있어서 성장은 인간의 삶에서 생의 계절에 상응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연령층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의 하나님 인식, 청년의 하나님 인식, 부모와 직업인의 하나님 인식, 노인층의 하나님 인식은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인식은 인생의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유아 시절의 하나님 인식은 신화나 동화에 등장하는 신비스러운 할아버지와 같은 분인데 그러한 하나님 인식은 교회에서 주일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많은 동화를 통해 형성된 하나님 상이었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의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 이야기,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 저에게 신비스러운 세계에 대한 많은 상상을 갖게 했습니다. 한편 그 이야기는 어린 시절 저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훌륭한 인물에 대한 동경 가운데서 기독교 성인들의 전기를 통해서 제가 만나게 된 하나님은, 유년기 때와는 달리 거룩한 성인의 상으로 저의 마음에 간직되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상은 청소년기의 유혹을 극복해 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정신적 방황과 고뇌 가운데서 하나님 인식은 고뇌하는 인간 실존에 개입하셔서 거듭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시는 도덕적인 하나님이었습니다. 생의 각 계절에서 달리 이해한 하나님은 각기 다른 분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의 삶에 현존해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단지 다른 생의 계절에서 부분적으로 경험한 하나님 인식의 파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생의 계절이 바뀜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새롭게 눈을 떠가도록 인도한 분이 보혜사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 없이 저는 저의 생의 변화와 함께 찾아오는 많은 생의 문제를 극복해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혜사는 생의 변화 과정 가운데서 진리의 뜻을 새롭게 조명하고, 재 구성시켜 믿음이 보존되게 합니다. 역시 보혜사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를 세워 가고 보존해 가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보혜사는 우상의 허구에서 깨어나게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그의 내면에 미개인이 있습니다. 옛날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인간의 직관만이 사용되었던 시기에는 이 미개인에 의해 인간의 삶 전체가 지배되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변은 전부 어떤 신비스러운 힘을 가진 신들의 조작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빌기도 하고, 산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큰 바위나 나무에게 안전을 기원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인간의 운명이 그 어떤 변덕이 많은 신적 존재의 수중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종족의 안전을 위해 알 수 없는 변덕자를 달래고 무마시키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바쳤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불안해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이 합리적 사고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연현상의 변화나 천재지변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미개인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인격 깊은 곳에 숨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미개인은 그 무엇인가 의지하고 붙잡는 것이 없으면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과학의 시대에 합리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도 불안하기 때문에 생의 깊은 소외감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신뢰의 대상으로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우상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재물을 가진 자나, 지식인이나 배우지 못한 자나 모두 우상이라는 허구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우상들은 이데올로기·돈·명예·성공·성·권력·인기 등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이러한 우상의 허구를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은 매우 지성적인 사람으로 합리적 사고를 한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실존적 불안이 더 크고 생의 소외감을 더 깊게 느끼게 됩니다. 특히 생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불안은 더 커집니다. 오히려 우매한 사람은 하늘을 믿던가 별이나 해, 달 같은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지적인 사람만큼 실존의 불안을 덜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은 인간을 우매하게 만듭니다. 우상은 눈을 어둡게 해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상은 허구의 유토피아를 지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보혜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미개인의 눈을 뜨게 해서 진정 의지하고 신뢰하고 섬겨야 할 대상을 바로 보게 하고, 인간의 인격에서 분리되어 있는 합리적인 것과 직관적인 것을 통합시킵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위대성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 오랜 옛날인데도 그들은 우주 삼라만상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것을 통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보혜사는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합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향락과 쾌락의 우상에 사로잡혀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현실을 넘어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을 본다는 것은 보혜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참된 비젼은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을 넘어서 볼 수 있게 하고 현실에서 그것을 위해 창조적 활동을 하게 합니다. 그 비젼은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젼은 보혜사를 통해 갖는 새로운 안목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은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의 세계밖에는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으로 가득 찬 그 시대에서 소아시아 각 지방을 다니면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우상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보혜사는 인간이 우상의 허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보혜사는 본래의 뜻이 인간을 어두움에서 빛이 있는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말에 일치합니다.

 

끝으로 보혜사는 우리를 갱신시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배터리가 다 소진되면 더 이상 목적한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때는 배터리를 재충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우리의 삶을 계속 고갈시키고 소진시키기 때문에 영적 충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갈 때 창조적 삶은 불가능합니다. 영적 고갈은 허세·과장·수다스러움·절망·비관을 느끼게 합니다. 생을 어둡게 단정 지어 가게 합니다.

 

보혜사는 우리에게 참된 힘을 공급해 줍니다. 그 힘은 창조력· 어두움을 이길 수 있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믿음·희망·사랑입니다.

 

보혜사는 우리를 갱신시키기 위하여 매개체를 사용합니다. 어떤 때는 조용한 장소, 어떤 때는 좋은 신앙 서적, 깊은 기도, 영적인 교제, 선포되는 말씀, 예배, 성만찬 같은 매개체를 이용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갖고 다시 세상에 나아가서 힘 있게 살아가게 됩니다. 보혜사 자신이 신비스러운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혜사는 우리를 그러한 길로 인도해 갑니다.

 

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에게 조그마한 격려와 위로를 주어 생을 다시 시작하게 한 사람이 있어도 평생에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새로운 시작이 있게 했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고, 우리를 깨어나게 하고, 우리를 갱신시켜 가는 분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분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보혜사가 바로 우리에게 그러한 분입니다. 그는 우리를 영원한 곳으로까지 인도할 것입니다.

 

보혜사는 하나님의 희망의 계획 가운데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창조적 일을 수행해 갈 것입니다. 그 창조적 일이란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 자라게 하는 일, 깨어나게 하는 일, 갱신입니다. 우리 역시 보혜사와 함께 매일 매일 그 일에 동참해 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새 창조에 동참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절묵상: (요 16: 7) 우리가 소망을 걸고 있는 분이 우리를 떠나실 때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우리가 그분을 더 깊이, 더 풍성하게 알 수 있도록 다시 영으로 돌아오실 계획이 없었다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크리스 티그린/ 복음주의 작가

나는 늘 깨어 기도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하나님을 향한 그릇된 열심 때문에 믿는 자들을 어렵게 만든 경우는 없습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불순종의 삶이 순종의 삶으로 변화됨을 믿습니까? 내 영혼은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고통을 넘어서는 기쁨 (요16:16-24)

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제자들은 큰 슬픔과 근심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그들에게 기쁨이 더욱 클 것이라는 소망을 주십니다. 또한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무엇이든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떠남의 슬픔, 재회의 환희 (16:16~22) 예수님이 떠나시고 나면 제자들은 큰 감정적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사실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면 보지 못하겠으나 다시 잠시 후에는 볼 수 있으리라’(16절)는 말씀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일을 도모한 세상에는 기쁨이 되겠지만 제자들에게는 애통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애통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말할 수 없는 환희로 바뀔 것입니다. 산모가 새 생명을 보는 순간의 큰 기쁨으로 해산의 고통을 말끔히 잊어버리듯,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22절)라는 말씀은 부활의 사건을 넘어 성령의 강림까지 염두에 둔 이중적 암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슬픔은 큰 기쁨을 전제합니다.

 

고장 난 장난감을 가지고 아이가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이젠 필요 없어, 다른 것 사줘\"하고 집어 던졌을 때 이때 엄마가 금방 새것으로 사준다면 그 아이의 잠재의식 속에는 모든 문제를 안 되면 쉽게 포기하고 다른 것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반면 엄마가 그것을 고쳐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했다면 그 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놀면서 \'내가 슬퍼하던 문제가 엄마의 손에서 다시 기쁨으로 바꿔질 수 있구나\' 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근심의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서 기쁨의 문제로 바꿔 주시는 분이십니다. 근심의 사람을 기쁨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시고 육신의 사람을 \'너 쓸모 없어\'하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쳐서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제자들과 같이 여러 종류의 근심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부간의 불화로 가족모두의 근심이 되기도 하고, 직장을 그만둬야하는 위기에 근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근심과 염려와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어떤 것이 여러분에게 근심을 가져다주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여러분의 맘을 흔들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근심의 문제가 도리어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그들의 근심이 무엇이었습니까? 요한복음 16:5-6절에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굴색이 변하고 맘에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도대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는 말씀이 무엇이뇨,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은 무엇이뇨\" 하고 서로 문의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왠지 불안해했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근심\'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의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시기전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그것은 육신적으로 큰 고통의 문제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그 고통의 정도가 곡하고 애통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애통해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같이 옷 벗기시고 수치와 조롱을 다 당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위에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곡하고 애통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들은 십자가의 고통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맘이 무디어 졌습니다. 하나의 지나간 사건으로만 기억하고 있진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은 애통할 것인데 \"세상은 기뻐하리라\"는 것입니다. 요15:18-19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지실 때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곡하고 애통해 했으나 마귀는 자기세상이 온줄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마귀의 권세인 죄와 사망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이라면 십자가는 또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결정적인 승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전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은 조롱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더니 꼴 좋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하고 패배한 것 같으나 궁극적인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요16:33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도리어 기쁨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 곁을 떠나셔야만 했을까요? 왜 우리들에게 삶에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걸까요? 오늘본문에는 21절에 보니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을 통해 비유로써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그 첫 번째 이유는, 잠간의 근심과 고통이 위리에게 기쁨을 더해주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새 생명을 낳기 위한 예수님의 영적진통이었습니다. 이 고통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 모릅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애 낳아봐야 그 고통 말할 수 있다고-\' 아내들이 큰소리 칠 때가 이때인 것 같아요.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가 누릴 부활의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마귀의 핍박 속에서 살아가지만 십자가 뒤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주님처럼 십자가지고 영적해산의 고통을 능히 감당케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가셔야만 했던 이유는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6:7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보혜사가 오시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시려고 떠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우리 속에 영원토록 거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면 그는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 연약할 때 우릴 도우십니다.

 

세 번째 이유는,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22절 말씀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여기에서 \'너희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세상의 기쁨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기뻐하고, 남의 기쁨을 빼앗아서 기뻐하고, 속여야하고, 쾌락을 날마다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 기쁨은 잠깐입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마침표는 죽음이요 심판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인 것입니다. 우리가 누릴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도, 알 수도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우리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은 오늘날 우리의 근심을 세상의 것들로 대체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오신 성령을 통하여 신령한 기쁨으로 변화 시켜 주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주님은 \"조금 있으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어떤 근심이 문제가 있습니까? 삶에 어떤 아픔이 있습니까?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조금 있으면\"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줄 믿습니다.

 

요 16:23a :우리는 심장이 뛸까 말까, 우리 머리카락이 자랄까 말까를 묻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육체의 생명의 법칙이 그 모든 것을 행하게 하는 까닭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그 참 생명 속에 거하는 사람에게도 더 이상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 없어집니다. 주님의 그 영원하신 생명, 그 온전한 생명의 힘과 법칙이 우리를 친히 교정하고 바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게 있는 슬픔과 근심에 어떤 기쁨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까?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요16:25-33)

오늘의 말씀 요약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예수님의 떠나심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또한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날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시며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 설교의 마지막 말씀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내다보면서 큰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초기에서 지금까지 그의 사역은 제자들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로 설명되었습니다. 여기에 비사라는 말은 비유를 말합니다. 비사란 \"알쏭달쏭하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이것은 수수께끼처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르는 그들도 예수님께서 제사장과 서기관에게 고발당하고 유대인들에게 고발당하고 식민지 통치자인 빌라도에게 넘겨주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체포될 시간이 임박해 옴에 따라서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그 사역을 정확히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와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갑자기 떠난다는 말씀에 말할 수 없는 근심과 걱정에 사여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존재의 근원을 말씀하시므로 평강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요14: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한 것처럼 사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의 소원을 밝힘으로써 제자들을 위로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또한 큰 기쁨과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 때 비로소 가슴에 감격과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체포되기 직전에 이 말씀을 하게 된 이유는 예수님만이 그들에게 기쁨과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근심과 걱정을 물리 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다름이 없다고 봅니다. 우리에게 순간순간 다가오는 불안과 초조 절망은 하나같이 우리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불안과 절망은 바로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가 누구인줄 알 때 해결이 되고 기쁨과 평화와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구주를 생각할 때 그리고 그 분을 사랑하고 믿을 때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밝히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간이 다급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바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며,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보다 더 큰 위로의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도 별수 없는 인생인지라 늘 넘어지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찬송가의 가사처럼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습니다. 예수의 복음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며 예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하게 되니 이보다 큰 위로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각각 제 갈 길로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취할 행동이 어떠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하나같이 충성을 맹서하고 죽을지언정 주를 따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로마군병에게 체포되었을 때 제자들에게도 검거령이 내릴까봐서 모두가 비겁하게 도망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철저히 배신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말은 주와 함께 따른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환난 곤고가 오고 죽음이 온다면 우린들 별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평소에는 큰소리치고 담대한 신앙을 갖는 것 같아도 막상 내가 손해 봐야 하고 나의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는 모두가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할 위인들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배신을 아셨기에 십자가의 고통 못지않게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고난이 있고, 그 고난을 통해서 깊은 신앙의 자리에, 깊은 은혜의 자리에 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제자들이 다 도망간다 하여도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어린양이요 구주이므로 인간이 배신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도움은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족한 것입니다.

우리도 인간의 배신을 당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배신할 때 그 인간적인 고뇌와 외로움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다 나를 버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것은 곧 승리의 삶이요 이기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 때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배신과 고독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더 많이 깨닫게 될 줄 믿습니다. 반대로 천만인이 나를 지지해 주고 나를 칭찬해도 하나님이 버리시면 그것은 바로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인생은 모두가 자기 편의를 따라서 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면 주께서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말은 하지만 하나님을 붙들기보다는 사람을 붙들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늘 낙심하고 실패 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바로 사람보다 하나님 붙들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하신 모든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면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하려고 한 것입니다(33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너무 너무 사랑하신 것입니다. 깊은 좌절과 허무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끝까지 마음을 쓰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이 평화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실낙원에서 평화를 잃어버린 인생에게 골고다에서 평화를 찾아서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다락방 설교의 결론입니다. 33절 후반 절에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환난이 따른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이 말씀은 어찌 보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매력 없는 말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달프고 힘든 세상에서 예수 믿으면서 까지 환난을 당한다니 그것이 얼마나 매력 없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이유는 예수 때문입니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그는 창조주요, 구속주요, 심판 주이므로 사람들이 그에게 나오기를 거절합니다. 예수 때문에 환난을 당해 봐야 예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예수 때문에 욕먹어봐야 예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여기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주는 환난 때문에 두려워하고 포기하고 세상이 주는 핍박 때문에 주눅이 들지 마십시오. 세상이 핍박할수록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수록 우리의 신앙이 더욱 굳어지고 확신에 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도리어 담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환난을 인해야 우리는 연단하게 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을 통과한 쇠라야 단단해 지는 것처럼 환난을 통과한 믿음이라야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욕하고 천대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두려워말고 담대하면 하늘의 상급이 크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그의 설교를 끝맺음합니다. 얼마나 웅장하고 위대하신 선포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확신의 보증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 시달림을 받아도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서늘하게 하고, 감격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무력도, 폭력의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미움과 증오에 대항하여 사랑과 용서와 희생으로 세상을 이기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이겼으므로 우리도 그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는 가운데, 한마디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는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이 모든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셨습니다. 어떤 때는 나를 위로해 주거나 도와주는 사람 한 명도 없이 혼자 버림받은 것 같은 상태에서 시험과 환난을 당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그 모든 환난 가운데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실패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환난의 파도가 몰아치고 음부의 권세가 나를 뒤엎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기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능히 이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만민을 구원하셨고 만민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 세상이 죄악으로 타락하고 사단으로 가득 찬다 해도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표현되지 않은 마음속의 고민과 의심을 알고 계셨을 뿐 아니라 잠시 후 그들의 상황을 알고 계셨고, 그런 행동들이 그들을 얼마나 한평생 고통과 죄책감에 빠지게 할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미리 말씀해 주실 것이며 미리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힘들어하는 문제를 말씀을 통하여 정확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사막을 여행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가 걸어온 사막 길을 되돌아보니 예수님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자기의 발자국만 보였습니다. 왜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그 발자국은 네 발자국이 아니고 나의 발자국이라\"고 하시며 우리가 큰 환난을 당할 때, 사막과 같은 길을 걸어갈 때는 우리의 손을 붙잡고 가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안고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의 손목을 잡고 해변가를 거닐었습니다. 크고 작은 네 개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보이다가 갑자기 작은 발자국이 사라졌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가다가 어린아이를 업고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는 주께서 붙들고 가시지만, 아주 쓰러지면 업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계십니다.

출19:3,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업어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환난 많은 이 세상에서 오늘 주신 이 말씀으로 큰 위로를 받으시고 항상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게 하옵소서. 도리어 예수 때문에 욕을 먹게 하시고 예수의 복음 때문에 환난을 당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세상이 우리를 무시하고 욕할 때 도리어 사랑과 용서로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속병이고,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남아 적막한 밤에 당신을 숨 막히게 하는 불안입니다. 그것은 옛 노래를 듣거나 옛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를 훑고 지나가는 예리한 격통입니다. 기력이나 열정이 쇠할 때까지 우리를 조용히 소진시키는 미세한 스트레스입니다. 무엇보다 외로움은 완성을 향한 갈망입니다.

이 원치 않는 갈망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음식, 술, 일, 마약 할 것 없이 우리는 무엇으로든 그것을 채우려 합니다. 때로 공상의 세계나 새로운 도시, 사업, 교회, 관계로 달아납니다. 외로움을 자살로 해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외로움은 우리 모두가 부딪히는 위기입니다. 여러분은 외롭고 혼란스런 감정의 미로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준비가 되었는가요? 새 삶과 새 희망을 위해 하나님이 여러분을 준비시키는 중임을 알겠는가요? 그분은 절대 여러분을 버리거나 떠나시지 않습니다. 손 내밀어 그분의 손을 잡고 외로움의 거인을 쓰러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경험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직접 하나님께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이 특권임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그 특권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습니까?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그 사실로 인해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가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어려움 중에도 늘 곁에 계셔서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치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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