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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렘29:11-20)
사람은 누구나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무수한 만남의 기회를 가지게 되고 우리의 삶은 이 만남을 통해서 결정되고 형성되어 나가게 됩니다. 물론 사람마다 타고난 고유한 본질이 있지만 그것은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개발되고 함양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도 좋고 재능도 뛰어난데 시대를 잘못 만나서 빛을 보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품이 고상하고 외모도 곱고 아름다운데 사람을 잘못 만나서 한평생 고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자기 자식이 친구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범죄와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되었노라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좋은 사람 만나서 인생길이 활짝 열리고 평안과 풍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모든 만남은 서로에게 풍요로움과 기쁨을 안겨줄 수 있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쁜 영향을 주는 만남은 멀리해야 합니다.
사람은 한 평생 동안에 네 번의 중요한 만남을 갖는다고 하는데 그 것은 부모님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네 가지 단계의 만남을 꼭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모든 인간들이 꼭 가져야 할 중요한 만남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만남이요. 가장 영광스럽고도 위대한 만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자기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끝내는 철저한 자기 한계의식을 깨닫게 되고. 아울러서 무분별한 욕망 추구에서 나타난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불안과 두려움과 허무감 속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무한하시고 절대적이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비로써 한계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 속에 들어가게 되며. 절제하지 못했던 자신의 욕망을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며. 지나간 날의 모든 죄악을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의 삶이 놀라운 변화를 얻게 되며. 새로운 차원의 삶의 단계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완전 성결하시며. 영원무궁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며. 우리 인간들을 무한히 사랑하셔서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만남 자체가 은혜와 영광이요. 큰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나주신다
본문 말씀에도 보면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전심으로 찾고 찾는다는 말은 열심히 찾는다, 부지런히 찾는다,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찾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나 당신을 전심으로 찾고 찾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도 우리를 만나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써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며. 우리의 삶이 참으로 복된 삶이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찾아서 꼭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아 29장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편지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11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이 표현은 본문에서 자주 나오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니 순종하고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 그러므로 내 말을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12-14절까지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이제 바벨론의 포로에서 다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이방 문화에 젖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7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열방 중에서 저주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이유가 19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듣지 아니하며 듣지 아니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러한 환난은 누가 생각하던지, 재앙이었습니다.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는 그것이 재앙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렘29:11-14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전혀 다른 시각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이요 심판이라고 하는데 선지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재앙이라고 보는데 오히려 평안이요 장래에 더 큰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내일의 소망이다.
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말씀은 \"미래와 소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의 비슷한 말을 겹쳐 씀으로 하여 내용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개정된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정확히 번역하였습니다.
11절 이하 14절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대하시는 하나님이시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복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희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밝은 앞날을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재앙이라고 생각하면 재앙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망으로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시42:5에 \"내 영혼아 !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때리시는 중에도 결코 때리시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때리시는 것은 사랑하시기에 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렘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좋은 일을 준비하는 하나님은 기도를 원하고 있다.
12절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미래와 희망이 되십니다. 우리 성도들을 위하여 좋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에게 와서 기도하라고 하시고 그러면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허락 받은 은총의 선물이고, 내일을 준비하는 계획서요, 감추어진 비밀병기인 동시에 하나님의 보물창고를 여는 만능키이며,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비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좋은 계획을 세우시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 없이 잘 되어지면 자기가 잘나서 된 줄 알고 교만해지는 것을 보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거룩한 소원을 두고 행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힘
기도는 영혼의 양식이고 기도는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입니다. 기도는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며 일방적이지 않고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 속에는 소망과 감사가 동시에 있습니다. 또 기도는 나만이 아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월남 전쟁이 치열할 때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전투 중에 일개 분대가 고지에서 고립되었습니다. 산 속에는 거의가 길도 없고 가시덤불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래서 작전 할 때면 헬기로 고지에다 렌딩시켜 주고는 합니다. 일개 분대 14명이 고지에 고립되어 식량과 물이 다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거의가 탈진되어 자칫하면 모두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참고로 사람은 사십 일간 음식을 먹지 못하면 살 수 없고 물은 삼일 간 마시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호흡은 8분을 버틸 수 없습니다. 그 때 마침 대원들 중에 군목(군인목사)도 함께 있었습니다. 군목이 자기의 수통을 열어보니 물이 약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물로는 대원들의 목을 축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군목은 잠시 눈을 감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린 다음 자신부터 물을 마시고 돌려 줄 터이니 모두 나누어 마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부터 꿀꺽 꿀꺽 마시고는 돌렸습니다. 대원들도 모두 소리 내어 꿀꺽 꿀꺽 마시고는 돌려졌습니다.
이윽고 그 수통은 군목에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군목이 수통을 들여다보니 이상하게 물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사실은 군목이 먼저 물을 마시는 척 하면서 목구멍으로 소리만 꿀꺽 꿀꺽 낸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대원들도 모두 물은 마시지 않고 소리만 꿀꺽 꿀꺽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이후부터 모두가 목이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들은 그렇게 거의 이틀을 버티고 있다 마침내 구출되어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힘은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만일 기도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기도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항상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믿음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고달픈 십자가를 무겁게 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십자가가 마치 그분의 선물인 양 감사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래서 행복합니다.
돈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요 건강하다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감사할 줄 알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축복은 감사의 기도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병들어도 은혜로우며 가난해도 감사드리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분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감사할 것이 없다고 해도 감사하다고 외쳐 보십시오. 믿음의 축복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꿈을 꾸면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여 부르짖으면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들으신다고 하셨고, 호소를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은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인 헨리 드러몬드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서 보낸 10분은 전 일과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루를 보람 있고 훌륭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까? 하루를 시작하면서 10분간 엎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헌신하라고 하신다.
렘29:13-14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좋은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 주시지 아니하시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간절함을 원하고 있습니다. 간절할 때에 무엇인가 이루어지지, 뜨뜻미지근하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만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만다는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만나주신다는 신뢰심도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 좋은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내일의 소망이십니다.
두 번째 좋은 일을 준비하는 하나님은 기도를 원하고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 좋은 일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헌신하라고 하십니다.
간절히 찾아 만나라고 하십니다. 바른 신앙으로 회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참 좋으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하고 있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속에 뛰어 드시고, 그 뜻을 이루어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절에 “그런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 찌어다” 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기간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벨론에서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죄악의 자리에서 떠나고, 세상의 자리에서, 정욕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또한 안일한 자리, 나태한 자리에서 떠나 본향을 향한 순례의 길을 계속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본향을 향한 순례자의 삶입니다. 바벨론의 정착화의 위기에 빠져 안주하지 말고 나아가야 할 것이며 특별히 십자가의 순례의 길에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순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교인이 사순절을 맞이하여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좋은 일을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깊이있게 만나시고 작정한 기도의 헌신과 함께 응답을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조건(요 15:11-17)
하나님은 인생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축복스러운 이름들을 주셨는데 그것은 가정의 경우 아버지, 어머니, 아들과 딸, 형과 동생, 누나, 오빠 같은 이름들입니다. 이런 이름들이 가정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선생님, 제자, 선배, 후배, 교수, 학자나 박사, 사장, 회장 등등의 이름인데 그 중에는 ‘친구’라고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친구라는 말은 사회적 피조물로서의 인간 상호관계를 성립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이름입니다.
런던 타임즈가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현상 모집을 한일이 있는데 이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1, 2, 3등 세 대답입니다. 3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친구란 기쁨을 더해주고 슬픔을 나누는 자이다” 기쁠 때 만나면 기쁨이 더 커지고, 슬플 때 만나면 슬픔이 반으로 감해지는 자, 기쁠 때에 만나면 내 기쁨을 함께하고 기쁨을 극대화 해주는 사람 그가 친구입니다. 또 2등으로 당선된 것은 “친구란... 한 보따리의 동전이다” 그저 내 모든 사정을 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바로 그가 친구입니다. 그리고 1등으로 당선된 대답. “친구란 온 세상이 나에게서 떠날 때 다 나를 버릴 때 내게로 오는 자가 진정한 친구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웹 박사는 이 친구의 정을 지속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내가 남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면서 내 먼저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때만이 또 다른 사람도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실인데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비밀이 있지만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또 비밀이 없어야만 친구입니다. 이 사이만은 완전한 진실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거짓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만이 친구의 정을 지속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되며, 세 번째는 평등의식입니다. 봉건주의적 행복관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친구가 없습니다. 너와 나는 똑같다. 지위가 높든 낮든, 학벌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건 적건, 심지어는 남녀 어른 상관없고, 문제는 나와 너는 똑같다는 평등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친구가 있습니다.
스티븐 존슨 박사는 이렇게 친구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 금방 부를 수 있는 친구, 당장 달려올 친구가 있는가? 없다면 당신은 친구가 없는 사람입니다. 또 내가 함께 기뻐할 사람이 있는가?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내가 기쁜 일이 있을 때 찾아 가서 붙들고 이야기하면 그래 그래 그거 참 좋겠다. 아무 시기나 질투가 없이 내 기쁨에 동참해 줄 사람이 있는가? 그래야 그가 친구입니다. 그러나 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는 친구가 아닙니다. 또한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선뜻 내게 돈을 빌려주고 만일에 저가 없으면 믿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돈을 꾸어서라도 빚을 갚아주고 내 어려운 사정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친구가 없는 사람이요, 당신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하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을 지금 최고로 최고의 지위로 우대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했는데 친구란 누군가가 먼저 주도적으로 출발을 해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내게 친구 되어 주기만을 바라고 기다리면 죽을 때까지 친구 못 만납니다. 내가 좋은 친구가 먼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주도적으로 내가 너를 사랑했다. 택했다. 먼저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친구에 관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친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첫째는 음식과 같은 친구로 매일 빠져서는 안 되고, 둘째는 약과 같은 친구로 이따금 있어야만 하고, 셋째는 병(病)과 같은 친구로서 이를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자기 선언을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15). 여기 ‘친구’라는 말은 ‘필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육적인 우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저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였습니다(요 11:11). 이때에도 필로스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사로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낼 때는 ‘필레인(filein)’도 사용하고(요 11:3) ‘아가판(ajgapa\'n)’도 사용하였습니다(요 11:5). 이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우정의 친구인 동시에 또 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대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친구 예수’의 참된 우정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찾아주신 친구 예수
구약성경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친구, 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였고. 이사야 41장 8절에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하였고, 역대하 20장 7절에 “주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아브라함 편에서는 상상을 불허하는 하나님 편에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아브라함을 자기의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어찌 아브라함 편에서 ‘하나님은 나의 친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편에서 나사로를 가리켜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먼저 불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 편에서 우리를 자기의 친구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편에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자신의 친구로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요?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의 친구 예수
누가복음 7장 34절에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15장 2절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일 뿐 아니라 죄인을 영접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죄인의 친구 되신 예수는 죄인과 함께 먹을 뿐 아니라 죄인의 집에 유하기 위해 들어가셨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막 2:17). 바로 여기에 예수의 매력이 있고, 특이성이 있고, 유일성이 있고, 독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죄인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목숨을 버린 친구 예수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친구, 영원한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 죄 값인 사망을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우리가 그와 함께 하거나 가까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친구로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막 10:45).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친구로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실로 값비싼 예수의 목숨이 지불된 결과, 우리는 그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친구가 되는 데는 예수의 목숨이 지불되었습니다. 그 값은 은이나 금이 아니고,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친구가 되는 조건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4절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였고, 15절에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주님과 우리 성도들과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 우리는 \"그의 양\"이라고 했고,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예수님은 \"남편\" 우리는 \"그의 아내\"라고 했으며 예수님이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불러주실 때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아무나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였는데 즉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는 사람만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천국 시민처럼 살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5,6,7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천국 시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본문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의 명령입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을 순종할 때 주님의 친구로 삼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로 불러주신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친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줍니다. 친구는 친구가 외로울 때 위로해 줍니다. 친구는 친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여 줍니다. 친구는 자기의 하는 일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친구라고 불러주신 아브라함에게 비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8:17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친구인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택하여 주신 이유
본문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택하여 주신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게 하려는 이유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옥토에 뿌려진 씨앗처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태3:8에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은 계속적으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추수하면 추수한 알곡을 다 먹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종자를 남겨 둡니다. 아무리 어려운 때에라도 종자 씨는 먹지 않아야 봄에 다시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한 번 맺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성령의 열매가 항상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도 한 번 전도하여 열매를 맺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계속적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교회가 계속하여 성장하고 성숙해가야 합니다.
기도응답을 받게 하기 위함
우리를 친구로 선택하여 주신 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이루어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친구가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14:13-14에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줄곧 같은 학교를 다녔던 죽마고우였습니다. 군대에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월남전이 터졌습니다. 둘은 같은 부대원이 되어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숱한 전투를 치루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던 중 종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그 와중에 두 친구 중 한 명이 돌격 중에 적탄에 가슴을 맞고 한참 격전 중인 한 가운데 지점에서 쓰러졌습니다. 부상을 입고 헐떡이는 것을 본 다른 친구가 뛰어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소대장이 팔을 붙잡았습니다. \"김 일병, 저 애는 살려봤자 전투불능 상태야. 그리고 우리가 진격이나 퇴각할 때도 그는 짐만 될 뿐이야. 게다가 너까지도 위험해? 어줍잖은 감상은 집어치워.\"
그러나 그 친구는 신음하는 친구를 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소대장의 팔을 뿌리치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정점을 향해 뛰어나갔습니다. 얼마 후 그는 피범벅이 된 친구를 등에 업고 참호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등에 업혔던 친구는 이미 죽어 있었고, 업고 온 친구 역시 여러 곳에 총탄을 맞아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소대장이 소리쳤습니다. \"내가 뭐랬어? 네 친구는 죽었어. 너 역시 큰 부상을 입지 않았나. 우리 소대의 전투력 손실도 마찬가지야! 그런 무모한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이득을 줄 수 있어?\" 소대장의 다그침에 친구는 희미한 미소로 대신했습니다. 그리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큰 이득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말하더군요. `네가 올 줄 알았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친구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친구로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의 오심입니다. 그가 보혜사로 오셔서 조금도 비밀이 없이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요 16:12, 13).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16:14).
친구 예수! 그는 먼저 나를 찾아주신 친구입니다. 그는 의인의 친구가 아니라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죄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 우리를 죄 없는 친구로 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영원한 친구가 되는 비결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친구 종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구, 예수님과의 친구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친구 종교입니다. 말하자면 멀리 떨어져 있는 종교가 아니고, 가까이 있는 종교입니다. 함께 생각하고, 함께 말하고, 함께 행동하는 친구 종교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친구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30배, 60배, 100배로 확대되고 확산되는 우주적 종교가 된 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의 모든 백성을 친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친구 예수, 영원한 친구 예수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죽음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요1:29-34)
오늘의 말씀 요약: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합니다. 또한 그분 위에 성령이 임함을 보고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 이를 증거하기 위해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난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1:29-30)
사람들이 보기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원칙으로 본다면 사실 예수님이 요한의 대선배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보다 먼저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입니다(8:58). 그래서 요한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 갇혀 들어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는 대속적 어린양입니다(사 53:6~7). 동시에 예수님은 출애굽의 구원을 상징하는 유월절 어린양입니다(19:31~37). 최고의 존재이신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주는 이 (1:31-34)
세례 요한은 자기보다 먼저 존재했던 성육신하신 예수님께 세례를 줍니다. 그때 요한의 눈에는 하늘에서 비둘기가 내려앉듯이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이 보였습니다. 요한에게는 일찍이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성령이 머무는 그 사람이 앞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미리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받는 세례는 죄를 씻기 위한 회개의 표징이었으나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바로 직전에 언급된 어린양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를 갖습니다. 후에 바울이 해석한 것처럼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인류를 대표하는 죽음의 예식을 가지신 것입니다(롬 6:3~4).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며 죄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을 향한 삶을 구현시키십니다.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헌신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목표로 살아갑니까? 혹 나의 지위와 권리를 주장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날마다 내 안에 머무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 저의 죄를 대속하시고 새 생명 주심에 감사합니다. 제게 주신 새 생명으로 이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밀알이 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소개한 세례요한의 증거입니다. 세례요한은 주로 유대 광야와 요단강을 무대로 하여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한편 땅에 떨어진 사회 정의, 도덕을 재건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한 선지자였습니다. 특히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그 분이라야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보다 먼저 출생했고 유대 민중들 앞에도 먼저 데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예수님을 앞세우고 증거했습니다. 30절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내 뒤에 오는 사람이란 나보다 늦게 출생했다는 뜻입니다. 즉, 나이가 손아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분이 나보다 앞섰다고 했고 나보다 먼저 계셨다고 했습니다. 마3:11절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막1:7-8절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증거 속에서 참 선지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주의 종은 예수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아비종은 예수님을 이용하거나 예수님을 팔아서 자기를 높이기 마련입니다.
세례 요한이야말로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인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 예수님보다 경험이 많다는 것, 예수님보다 추종자가 많다는 것,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것 등 얼마든지 교만하고 거들먹거리고 예수님을 낮추고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조건들이 많았습니다만 요한은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어떤 분이 41일 금식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보다 하루라도 더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부흥사는 자신이 일생동안 동원한 집회 인원의 수가 예수님보다 많다고 떠들고 자랑합니다. 통일교 교주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실패자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을 낮추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간에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며 참된 주의 종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씀은 구약에 그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규례 가운데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 어린양이어야 하고 둘째, 흠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리다는 것은 물들지 않았다. 깨끗하다.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속죄를 위한 제물이 어린양이어야 하고 흠이 없어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흠도 없는 순결한 어린양이시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요한의 증거 속에서 몇 가지 뜻을 찾아봅시다.
1. 세상에는 죄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죄의 오염은 대기오염이나 환경오염과는 비길 수가 없습니다. 대기나 환경오염은 인간의 육체를 병들게 하고 환경을 파괴하지만 영혼과 인격과 환경과 세상과 가정 등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어디든지 죄가 있습니다.
2. 이런 세상을 위해 오신 예수님은 세상에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빌2장에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동등한 신분을 포기하고 자신을 낮춰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과 마주 앉아 구원얘기 영생얘기를 주고 받으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 그 예수님은 오늘도 세상의 예수로 살아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33년 동안 살다가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예수님이라면, 그래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예수님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역사의 현장과 사건의 현장에 직접 가셔서 직접 문제를 풀어 주셨고 사건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오늘도 세상의 예수로 나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인간은 짧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이 우리 삶에 있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윈 사람들의 고통, 남편과 아내 먼저 세상 떠나 보내는 슬픔, 자식들을 먼저 가슴에 묻어야하는 아픔, 시댁과의 관계, 친정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사이의 복잡 미묘한 관계들로 인한 어려움들, 사건, 사고 순간들 사업의 어려움, 직장의 갈등, 진학의 고민, 결혼의 위기 앞날에 대한 두려움들 머리가 쭈뼛한 순간들, 시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 속에 살아갑니다. 이러한 인간의 잡다한 삶 속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세상을 살아 계시고 있습니다. 문제 속에 함께 하시고, 아픔 속에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요한이 증거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은 곧 내 죄의 짐을 지고 가시는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내 슬픔, 고통, 절망, 좌절, 아픔, 질병, 죄, 내 죽음까지를 온통 걸머메인 예수님, 그분께서 순간순간 나와 함께 계시면서 나에게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세상의 예수 그분이 나와 여러분의 주님이심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복음의 릴레이가 시작됩니다(요1:35-42)
오늘의 말씀 요약: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들은 그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좇습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가서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시몬에서 게바라 고쳐 주십니다.
게바라 하리라(42절)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사명을 주심을 의미한다.
두 제자를 보내는 세례 요한 (1:35-39)
본문에서는 세례 요한의 사역의 특성이 다시 한 번 부각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제자가 다른 지도자에게 가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기보다 큰 분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냅니다.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또 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으면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소개하는 요한복음의 기록자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고, 또 다른 한 제자는 요한복음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이 두 제자를 움켜쥐고 예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요한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람’이라는 칭찬은 이 일에도 적절한 것 같습니다(눅 7:28).
시작되는 그리스도 증거의 고리 (1:40-42)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을 소개받은 안드레는 바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았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형 시몬에게 이 귀중한 발견을 전하고 그를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초대 교회의 핵심 지도자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게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십니다. 게바는 ‘바위’ 또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입니다. 이 이름의 뜻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베드로”(페트로스)입니다. 메시아는 이처럼 계속 이어지는 증거의 고리를 통해 전파되었습니다. 또한 ‘랍비, 메시아, 게바’ 등의 아람어와 히브리어가 계속 헬라어로 번역되어 표현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이는 본서의 주 독자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히브리권에서 헬라권으로 번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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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의 믿음
장애가 있는 사람을 상점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5킬로미터 정도를 운행하거나, 고통을 겪는 부부를 야외로 데리고 나가 식사하기 위해 한가한 주일 오후를 희생하는 것 같은 사소한 일들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희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당신의 기쁨을 방해할 수도 있고 믿음을 깊게 할 수도 있다. 만약 자기 포기와 희생정신을 기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회나 상실감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다. 존 칼빈은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무거운 짐, 아니 ‘죽음과 연관된’ 짐처럼 여겨졌던 진리들이, 실상은 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는 결코 ‘평범한 위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동참하도록 초청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기 때문에 그 신앙 안에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제일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할 때까지 그리고 우선순위를 올바로 설정할 때까지,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가끔 하나님께 괴로움을 느끼거나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 허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희생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우리가 여기 있다는 마음 자세만 가진다면, 다른 모든 것은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상 주시는 믿음」/ 게리 토마스
한절묵상: 요1:38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은 주님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교회를 다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떡을 위해 예수님을 찾다가 나중에는 전부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좇는 사람은 결국 떠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왜 예수를 좇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의 사심(私心)을 넘어서는 큰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혹시 내 속이 좁아 대의(大義)를 놓치는 경우는 없습니까? 이 증거의 고리를 이어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나는 이 증거의 바통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두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라고 물어 셨습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고전 1:22절 이하의 말씀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의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자 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느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 기적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에 따르면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반드시 기적이 있어야 하고 기적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실 때는 두 가지 기적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하나는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이었고 하나는 모세의 손에 문둥병이 발했다가 깨끗하게 낫는 기적이었습니다. 그 모세는 애굽에 가서도 하나님 살아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리게 한 사실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걸어갈 때도 순간순간 하나님의 기적을 보면서 걸어갔습니다. 저들은 늘 기적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생수, 만나, 메추라기, 단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을 추구하는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엔 반드시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뒤따라 다녔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고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고 풍랑이 잔잔해 지고 문둥병이 주님을 통해서 회복되는 엄청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정말 기적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굉장히 좋아 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지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기적을 찾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장애물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나무위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하였는데 십자가에 죽은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인류의 메시아가 될 수 있습니까?
유대 사람들의 율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가 없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일까요? 헬라의 철학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세계는 악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는 선하다고 생각 했습니다. 우리 몸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선하고 육신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은 육신의 감옥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을 괴롭히며 죽여야 영혼이 육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영의 세계를 동경하고 찾아 간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보이는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올 수 가 있겠습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더럽고 죄 많은 육신을 뒤집어 쓸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있습니까?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에겐 실로 어리석은 이야기였습니다. \" 유대인들은 표적(기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 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자 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렇습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또한 그것은 헬라의 모든 지혜를 뛰어넘는 구속의 지혜였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유대인중의 유대인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였으며 사울왕가의 후손이었으며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율법적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랍비였습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는 어릴 적부터 전통적으로 헬라철학을 공부하면서 자라온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기적도 지혜도 마다하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사도 바울은 그 예수그리스도가 너무 너무 귀했습니다. 너무 너무 좋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섬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인생을 걸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만을 따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그리스도만을 따르겠다고 외쳤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찾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찾았는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찾습니까? 돈과 인기와 권력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추구하면 할수록 저들 가슴속에 공허한 여백을 메꿀 수 없어 갈증과 공허를 안고 지치고 쓰러져 갑니다.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시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현대인들은 가슴에 공허한 여백을 메우고자 저마다 샘을 팝니다. 그러나 그샘이 어쩌다가 돈의 샘이 됩니다. 권력의 샘이 됩니다. 인기의 샘이 됩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려 하나 가지면 가질수록 참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그 물을 마셔 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돈과 인기와 권력은 참된 만족과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라고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 너희가 무었을 찾느냐?\" 여러분은 유대인들처럼 기적을 추구할 것입니까? 헬라인들처럼 지혜를 추구 할 것입니까? 현대인들처럼 돈과 인기와 권력을 추구할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나도 인간인지라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지혜를 추구하며 고상하게 살고 싶습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해서 큰소리치며 살고도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인기를 받고도 싶습니다. 권력을 휘두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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