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창20:1-8

거듭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창20:1-8





인간이 얼마큼 변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 믿고 변할 수 있다고, 아니 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그 변화가 얼마나 완전하고 안전성이 있을까요?
\"믿음보다 성품이 좋아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이 좋다고, 은혜 받았다고, 변화되었다고 해도 성품까지 완전히 변화되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할 수 있지만, 성품은 그렇게 잘 변화되지 않더라는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그가 변화된 사람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실수는 12장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실수입니다. 장소와 사람만 바뀌었지 똑같은 잘못을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애굽 땅에서, 바로에게 거짓말을 했는데, 오늘은 그랄 땅에서 아비멜렉에게 똑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믿음이 약해서, 아직 초보신자였기 때문에 실수를 했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변명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그의 신앙생활은 이미 2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여러 차례 환상도 보았고, 꿈도 꾸었고, 직접 사람의 모습을 하고 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도 만났습니다. 믿음의 결단과 용기로 네 나라 연합군을 물리치고 포로로 잡혀갔던 조카 롯을 구해왔던 전쟁영웅이기도 했고, 조카 롯을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를 했던 기도의 용사이기도 했습니다. 20여 년 전 애굽에서 실수했던 때와 지금은 너무나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가 처음 믿음생활을 시작할 때 했던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게 왠 일입니까? 아브라함. 그가 변하지 않은 것입니까?

한 청교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번의 놀라움의 순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 번은 처음 예수를 믿고 나서 나의 그 모든 죄를 값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해서 온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진홍같이 붉은 죄를 눈과 같이, 양털처럼 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해 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 앞에 우리는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앞에 우리는 감격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놀라움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놀라움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어느 날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구원받고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 아직도 버티고 있는 끈끈하고 끈질긴 죄성을 발견하는 그 순간에 옵니다. 아직도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이 더러움의 현장에 그대로 머물러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이 죄악의 깊이 앞에 한 번 더 놀랍니다. 바로 여기 인간이 가진 죄성의 깊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선택된 사람이요, 그는 선지자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그리스도인 중에 그리스도인입니다. 직분으로 말하면 장로 중의 장로입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 내면에, 그를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죄성이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다 변해도 결코 잘 변하지 않는 죄의 쓴 뿌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끝까지 따라 다니는 죄성이 있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다 이런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죄성에서까지 해방되고 자유롭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까지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뿌리깊은 죄성의 쓴 뿌리를 캐내기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죄성의 깊은 뿌리는 하루 이틀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어린 시절에서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 죄의 쓴 뿌리는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자존감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고, 열등감, 자학, 불안. 이런 것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가 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까? 왜 이런 실수, 이런 죄를 저질렀습니까?

첫째로 열등의식을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에 대해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사라의 미모에 비해 자신이 가진 것이 없습니다. 사라를 지키고 보호할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라는 날씬하고 얼굴도 굉장히 아름답게 생겼는데, 아브라함은 키도 작고, 배운 것도 없고, 얼굴도 초라하기 그지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브라함의 열등의식에 작용했을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균형이 맞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자기 남편이 자기보다 너무 잘생겼다고 생각하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반대로 아내가 너무 잘생겼는데, 자기는 남편구실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의처증이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상태나 조건이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부증(疑夫症)이나 의처증을 갖는 것은 상태나 조건이 아니라 생각의 문제입니다. 열등의식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적인 문제는 치료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믿음을 가진 후에도, 다 해결되었다. 다 극복했다고 생각되다가도 심리 저 밑바닥에 있는 잠재적인 열등의식이 언제 발동할지 모릅니다.
뿌리깊은 인간의 약점. 약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그것을 확대하고 과장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해지는데, 그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믿음으로 변화된 삶을 살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것 때문에 넘어집니다. 그것 때문에 다시 죄 짓게 되고, 그것 때문에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숙해지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나아갑니다. 그런데 한번 추락하게되면, 한번에 떨어집니다. 겉잡을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쌓았던 경건, 훈련, 성장이 모두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브라함, 그는 분명 의인입니다. 믿음으로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직도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변화시키기 어려운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약점은 믿음으로도 안됩니다. 기도로도 안됩니다. 어쩌면 그 약점은 그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 약점이 육신의 어떤 질병이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 생활을 하면서 그 약점, 그 육체의 가시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그것을 놓고 세 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국 바울의 약점, 그의 가시는 자신이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이 약점이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본성의 한 부분입니다. 이런 약점과 결점을 가졌기에 그것이 \'나\'입니다. 그 약점까지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나\' 됨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그 약점을 때문에 고민하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그것까지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하나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그 약점 때문에 우리가 죄짓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그 약점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아내를 빼앗길 위험으로 그를 몰아 넣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약점, 열등의식이 우리를 죄의 자리로 끌어내리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 약점 때문에 자꾸 죄를 짓습니다. 사람이 악하다고 해서 여러 가지 죄를 다 짓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통해서 죄가 들어옵니다. 잘못하는 것을 보면 자꾸 그 약한 부분에 걸려 넘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술 때문에 실수합니다. 한 번 실수하고 나서 다시는 술 안 먹는다고 결심하고서는 얼마 후에 실수하는 것을 보면 또 술 때문입니다. 노름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는 노름 같은 것은 안 하겠다고 손가락을 자르고서도, 발가락에 그것을 끼우고 또 합니다. 여자문제로 말썽을 부리는 사람은 계속 여자문제가 따라 다닙니다. 도벽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어떤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을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죄를 지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찾습니다. 우리의 약점이 원수 사단에게 노출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10장 12절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서서 길을 가고 있다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고 죄지을 가능성까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쓴 뿌리는 아직도 우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우리는 의인이지만 동시에 아직도 죄인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의인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죄인이다 는 사실도. 역설입니다. 죄인이면 죄인이고, 의인이면 의인이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 얼마나 모순된 말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그 분간부터 우리는 교만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죄인이라고만 생각하게 되면 심한 열등감과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의인과 죄인. 이 둘이 역설적으로 긴장관계에 있을 때, 그 사람이 우월의식에 사로잡히지도, 열등의식에 사로잡히지도 않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당신 의인입니다\". 그러면 \'아멘\' 하세요. 그리고 만약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아멘\' 하세요.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함 받았기에 의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아직도 죄의 쓴 뿌리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이 둘을 모두 인정하는 삶. 그런 사람을 살 때 실수를 피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실수한 이유는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안전한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고있다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그에게 몰려오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사리 판단이 흐려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실수하게 된 것은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불안과 두려움은 이사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평소에 열등감이 있는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들을 과대 평가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훨씬 훌륭해 보입니다. 그들이 더 강하고,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그에 비해 자기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습니다. 메뚜기 사고방식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을 때,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꾼 같습니다. 이 10명은 가나안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은 크고 장대하고, 그들의 성은 견고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상대를 너무 과소 평가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새로 이사와서 환경도 낯설고, 사람들을 만나는데 모두 자기보다 더 나아 보입니다. 더 훌륭해요, 더 강해요. 그들과 경쟁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불안합니다. 두렵습니다.
잠언29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불안한 마음이 생겨 이렇게 거듭되는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라고 했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이런 말씀을 잊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두려움이 있습니까? 불안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불안과 염려와 걱정이 죄를 짓게 합니다. 실수를 만들어 냅니다.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수록 더욱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요새요, 방패요. 우리의 피할 바위 시요 산성이십니다. 진정한 안전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의 사망 원인을 조사한 결과 심장병과 뇌일혈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람이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기 때문이랍니다. 매일 사고와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INF다, 경제위기다.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무엇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불안 공포,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이 현대 한국인입니다.
아브라함은 불안, 두려움 때문에 실수했습니다. 우리도 지나치게 불안에 떨면 실수하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폴 틸리히는 \'인간의 유한성이 불안으로 경험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의 품에 돌아옴으로써 그 불안이 극복된다고 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십시오. 그분을 의지해야합니다. 그래야 불안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불안이 극복되어야 죄도 이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길을 걸어왔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랄이란 곳에 와서 믿음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전적으로 그분께 맡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이 불안합니다. 초조합니다.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실수의 자리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걱정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해 간 것입니다. 아니 지나친 두려움과 불안이 이런 일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냥 솔직하게 \'사라는 내 아내입니다\'. 이렇게 말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아내라 하지 않고 누이라고 하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꾀에 자기가 속은 것입니다. 문제를 피해가려고 했는데, 좀 쉽게 불안이라고 하는 문제를 풀어보려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큰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더 어렵게 했습니다. 그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벌써 두 번째입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참 안됐습니다. 눈을 훤히 뜨고 마누라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마누라를 누이라고 속였으니 마누라를 데리고 가도 항의할 말이 없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의 손을 떠난 것입니다. 아비멜렉에게 내 마누라 내 놓으라고 말 한마디 못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손을 놓고 자기 의지,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자기 방법대로 길을 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아브라함의 손을 놓지 않고 그들 붙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직접 나타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인은 남편있는 여자이니 그녀에게 손을 대면 죽을 것이라고 엄중 경고했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뭐라 말합니까? 4절을 보세요.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아비멜렉의 말이 너무 당당합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정말 아비멜렉에게는 잘못이 없습니까? 남의 여인인지 모르고 그랬더라도 죄는 죄입니다. 모르고 했다고 다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비멜렉이 자신은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사실 그가 가까이 하지 않은 것입니까? 아니지요.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셔서,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해서 못한 것입니다. 6절 하반 절을 보세요.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아비멜렉이 안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입니다. 안한 것하고 못한 것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하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못하게 막았습니다. 잠언16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아비멜렉이 아무리 계획을 꾸며도, 그가 아무리 무엇을 하고자 해도 그것을 하도록, 그 계획을 이루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자기의 꾀로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려 했어도 결국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문제의 해결 자이십니다.
못난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그토록 그를 사랑하고, 여러 약속과 여러 역사와 기적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생각,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그런 못난, 믿음 없는 아브라함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직도 옛날의 쓰디쓴 죄의 깊은 뿌리, 열등의식, 메뚜기 사고방식, 두려움, 공포, 불안. 이런 것들로 가득한 아브라함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 더 나아 보입니까? 도덕적인 면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 여러분에게 누구 편을 들어주겠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둘 중 누구를 택하겠습니까? 아브라함보다는 아비멜렉이 더 나은 사람 같아요. 모든 면에서 아비멜렉이 더 훌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을 편드시지 않고 아브라함을 편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 어떤 면으로도 나은 것이 없습니다. 단하나 있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나아서, 더 훌륭해서, 어떤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이면, 무조건 사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무조건적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있습니까?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못났는데, 이렇게 믿음도 없는데, 이렇게 열등의식, 불안, 두려움으로 가득한 사람인데, 하나님은 스스로 그런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봅시다. 아브라함이 선지자 자격이 있습니까? 마누라가 남의 남자 품에 가서 몸을 버리든지 말든지 자기 안전만 먼저 생각하는 이기주의적이고, 비겁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선지자는 무슨 선지자입니까?
그런데 그런 그를 선지자라고 불러주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선지자 대우를 받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직분을 받았습니까? 저도 스스로 내가 무슨 목사 자격이 있나? 자격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로님들도 장로 자격이 있습니까? 권사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우리는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너 목사다\'. \'너 장로다\'. \'너 권사다\'. \'너 집사다\'. 그렇게 불러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교회에는 없겠지만, 속으로라도 저래가지고 뭐 \'장로 한다\'고 그러지 마세요. 저게 무슨 권사라고,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우리의 기준에는 못 미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들에게도 많은 결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입니다.
실수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거듭해서 실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셨듯이, 그를 인정해 주셨듯이,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에 걸 맞는 능력을 주십니다.

여러분!
불안해 할 것 없습니다. 열등감 느낄 필요 없어요. 우리의 약점, 우리의 고치기 어려운 죄의 뿌리, 이런 것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십니다. 여러분! \'아버지\' 하고 크게 불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