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비의 소리를 들읍시다

큰 비의 소리를 들읍시다/왕상18:41-46/어린이,학생설교/2002-02-07

큰 비의 소리를 들읍시다
왕상18:41-46





어느 지방으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한 여자 손님이 껌을 씹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소리를 크게 내는지 차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 쪽을 쳐다보며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바로 옆자리에 있는 중년 남자가 헛기침을 하면서 특히 눈총을 줬지만, 눈을 지그시 감은 그녀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요란한 껌 소리를 냅니다. 운전 기사도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렸는지 차안의 거울로 자꾸만 뒤를 보더니 드디어 한 마디를 했습니다.

\"아주머니, 껌을 씹더라도 이 자동차 엔진 소리보다는 조금 작은 소리로 씹으시죠.\" 차안에는 폭소가 터졌고, 그 여자 승객은 무안해하며 껌 씹는 소리를 그쳤습니다. 차안은 다시 조용해 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여자 손님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담배를 계속 피워댔기 때문이었습니다. 참다 못한 여자 손님이 아까 씹던 껌을 손바닥에 탁 뱉더니 그 남자에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이것 좀 드시지요.\" 의아해 하는 남자 승객에게 여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댁의 입에서 나온 연기를 아까부터 맡아왔으니 이제는 당신도 내가 씹던 껌을 한 번 씹어 보시지요.\"

세상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듣기 싫은 소리도 들을 때가 있고 보기 싫은 것을 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들리는 것, 보이는 것 모두가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성공은 무슨 소리를 듣고 무엇을 보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참된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할 것이요, 진실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하며 삽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듣지 않아야 할 소리를 들은 것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 양쪽 다 중요합니다마는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보지 않는 것 보다 듣지 않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보는 것은 내 의지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이 더 강합니다

.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눈을 감아 버리든지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리면 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은 문제가 달라집니다. 귀를 막아도 소리가 들립니다. 일단은 듣고 마음으로 정리를 해야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좋은 소리에 귀기울여야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땅에는 소리도 참 많습니다. 수많은 라디오 전파소리, TV소리, 신문에서 외치는 소리, 쏟아지는 잡지에서 들리는 소리 등 소리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소리는 많지 않습니다. 몇 해 전에 흥행했던 우리 영화 중에<서편제>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가 충격을 준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딸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아버지가 자기 딸에게서 한 맺힌 소리를 만들려고 일부러 눈이 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딸은 자기 아버지가 자기 눈을 멀게 한 것을 알고도 아버지이기에 용서합니다. 그러니 한 맺힌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한 맺힌 소리가 나오지 않으니까 아버지가 \"내가 너를 한 맺힌 소리가 나오게 하려고 일부러 한약을 보약이라고 속여 눈이 멀게 하였는데 한이 맺히지 않느냐?\" 라고 오히려 야단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리다운 소리를 만들어 보려고 일생을 바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영화였습니다. 물론 소리다운 소리를 만들어 보겠다는 그 열망이 이해되었고 이 점을 어필해서 그 영화는 감동을 전하려 했습니다만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하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좋은 소리, 아름다운 소리가 무엇이길래 만들고 듣기 위해서 애씁니까? 이처럼 듣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듣는 것을 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로마서 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청각은 인간만이 가진 것이 아니라 동물들도 예민한 청각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은 동물들이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성도들은 모든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 분별하며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까?

우선은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로마서 2:15절에 \"이런 일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했는데 양심의 소리는 진실한 소리요, 정의의 소리요, 선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진실을 촉구하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디모데전서 1: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좌선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소리인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육 주도적인 사람이 있고, 늘 하나님의 이끄심에 자기를 전적으로 맡기는 영주도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작은 속삭임에도 귀기울일 줄 아는 예민한 영적 귀를 가진 자는 언제나 영주도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삶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순간순간, 상황마다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목동이 양을 훔쳤다는 죄로 고소를 당해 법정에 끌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목동은 한사코 자기는 양을 훔친게 아니라 잃어버렸던 자신의 양을 찾았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담당 판사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난감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판사는 양을 잃었다고 고소한 원고에게 밖으로 나가 양을 부르라고 지시했습니다. 원고는 양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양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목동에게 밖으로 나가 양을 부르라고 지시했습니다. 목동이 양을 부르자 양은 반갑게 뛰어나갔습니다. 양은 목소리로 자기주인을 알아봅니다. 양은 주인의 목소리가 아니면 절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양으로 비유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참 목자 되시는 주님의 목소리만 따라가나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분명히 알아들으십니까 ? 그리고 그 목소리만 따라가고 계십니까 ?

오늘 본문에는 남이 듣지 못한 소리를 들은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엘리야입니다. 무슨 소리를 들었나요? \"큰비의 소리\"입니다. 3년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던 이스라엘에 빗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들녘이 타들어 간 지 오래고 땅바닥은 거북이등처럼 갈라지고 마실 물마저 고갈되었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낄 정도입니다. 이때에 들리는 빗소리는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90년 만에 최대의 가뭄을 겪고있습니다. 정부에서 가뭄 대책비로 3차례에 걸쳐 무려 3,783억 원이나 지원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지내고 있지만 아직도 빗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시원한 큰비의 소리가 들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성경의 엘리야를 통해서 우리도 큰비의 소리를 들었으면 합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왜 가뭄이 왔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에 왜 가뭄이 왔습니까?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육적 가뭄 이전에 그들의 영적 가뭄이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인 바알이 자연을 지배하여 절대적으로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으로 믿었습니다. 때에 따라 비도 내려주고 적당한 햇빛도 주는 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어리석은 우상숭배입니까? 모세는 신명기11장16,17절에서와 28장23,24절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사실을 우상을 숭배하는 아합과 그의 백성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하여 왕상17:1에서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전후로 정말 비가 내리지 않아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아무튼 영적 가뭄,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영적 가뭄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 나라가 얼마나 영적 가뭄에 빠져있습니까? 우상과 미신이 판을 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운 현실인데 공교육기관인 초등학교교정에 단군상을 세우겠다고 난리인가하면 이것을 못하게 한다고 목사와 장로들을 감옥에 가두고.... 하나님 앞에 엄청난 득죄를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비를 내리시는 분도, 가뭄을 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고 내 삶의 풍요를 위해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으로 흥청망청 할 때 우리에게는 어김없이 가뭄이 옵니다. 영적 가뭄이 오고 그로 말미암아 육적 가뭄도 아울러 찾아옵니다. 그 때는 어찌할 것입니까? 가뭄은 극복이전에 예방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신문을 보니까 가뭄이 와서 모두가 죽느니 사느니 하는데도 목욕탕에서는 물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몸에 비누칠 할 때도 꼭 물을 켜놓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를 밀 때도 꼭 수도꼭지는 켜놓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평소에 그러는 사람이 가뭄 때인들 그 버릇이 고쳐지겠습니까? 그리고 \"물 좀 아껴 씁시다.\"라고 한마디할라치면 기분 나쁜 듯이 쳐다보기는 왜 쳐다봅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국가적 재해를 선포하고 성금을 모으고 양수기 보내기 운동을 하는 일들이 얼마나 바보 스러운 일로 여겨지겠습니까? 참으로 문제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큰비가 내립니까? 무엇이 3년6개월의 긴 가뭄을 일시에 해소시키는 큰비를 맛보게 했습니까? 바로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엘리야의 신앙입니다. 엘리야가 보여주는 신앙의 절정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엘리야가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하는 말속에서 우리는 그의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가 무슨 천둥번개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의 귀로 하나님의 약속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왕상18:1을 보게 되면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엘리야는 이 약속의 말씀을 보일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년반 동안의 가뭄은 바알이 비를 내리지 못하는 무능력한 신임과 동시에 능력 있는 하나님을 온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선포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보세요, 이것을 깨달은 엘리야가 기도하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요 성경을 보게되면 참 묘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꿇어 엎드려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는 자세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것을 기도의 모델로 여겨 억지로라도 엘리야적 자세를 취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보이는 자세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이 자세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왜 엘리야가 이렇게 기도했느냐하면 주위에 보이는 것들을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하겠다는 의지적 자세입니다. 다른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에서도 가능성을 볼 수 없고 기대도 걸지 않겠다는 확고부동한 신앙고백적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큰비의 소리가 들리기를 원합니다. 아니, 반드시 들어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하여야할 것입니까? 무능력한 바알에게 비는 <기우제>가 필요한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음성을 듣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엘리야가 가뭄이 오래 되에 산천 초목이 다 타버린 갈멜산 위에서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귀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눈이 열려 있었던 사람입니다. 손바닥만한 구름 조각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도무지 비가 올 것 같은 징조가 아닙니다. 먹구름이 몰려 온 것도 아니고 동풍이 불어 온 것도 아닙니다. 손바닥만한 구름 속에 무슨 비가 들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를 보세요 그 작은 구름 속에서 큰비를 보았습니다. 아합왕에게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타고 빨리 내려가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갈멜산 아래로 흐르는 기손강이 넘쳐흐를지도 모르니까 서둘러 피하라는 확신에 차있는 자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그렇습니다. 기대하는 사람은 구름 한 조각에도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깨달음이 없으니 그 이루어짐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보여주는 신앙의 그 결국이 어떻게 기록되었습니까?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45절입니다. 과연 큰비가 내렸습니다. 3년6개월 동안의 기나긴 가뭄이 해갈되는 큰비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큰비의 소리를 들어야 할 때를 우리는 지나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 시대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비의 소리를 들려 주셨는지 모릅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전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엎드리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음 때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더 이상 바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오늘 엘리야처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얼굴을 무릎사이에 묻고 기도함으로 큰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