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고인 줄 아노라 욘1:8-12
몇 년 전에 우리 나라의 달라 보유고가 바닥을 쳐서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외한이 바닥이 나도록 경제를 방치한 책임에 말들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경제를 운용해왔던 경제 주체들이 진지한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제 주체라면 제일 먼저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가 있을 것이고, 수장인 대통령을 비롯해 정권을 잡은 여당과 이를 견제하는 야당, 그리고 생산활동의 주역인 노동자와 사업가 등이 모두 포함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 때문에 경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단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하면 그 책임이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있습니다.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외한위기의 책임을 무한대로 지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과연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 소상히 알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어떤 일을 해결하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 해결의 열쇠를 찾는 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인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IMF 여파로 수많은 기업이 부도가 나거나 헐값에 매각되고, 실직자가 양산되고, 가정이 파탄되고,중산층이 무너지는 등 6.25이후 최대의 사변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환난의 주범과 원인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현정부 역시 경제난을 효과적으로 풀지 못한 실정입니다. 문제를 분명히 알아야 해답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르니 한번은 이렇게 했다가, 또 한번은 저렇게 했다가 갈팡질팡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얻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해결방안이 시원스럽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서는 풍랑에 만나 어려움과 불안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시원스럽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요나의 모습이 나옵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해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지만, 본문에서는 요나의 긍정적인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요나의 긍정적인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잔잔하던 바다가 왜 풍랑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알았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대가로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는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선원들은 값진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자신의 신들에게 살려달라고 구걸을 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누가 죄를 지었는가에 대해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터무니없는 제도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을 색출하는데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고 확신한 제도였습니다.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뽑혔습니다. 이에 선원들이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무엇 때문에 이 배를 탔는가?어떤 잘못을 저질렀는가? 이때 요나는 순순하게 대답을 합니다. 요나는 선뜻 자신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다고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배가 산산조각이 나도록, 그리고 제비를 뽑을 때까지 침묵한 요나의 모습에 분통이 터지기도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그리 쉽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사회를 보십시오. 내 탓이요 운동을 펼치긴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항상 책임을 남에게 미룹니다. 자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빠 때문이고, 남편 때문이고, 아내 때문이고, 자식 때문이고, 성도 때문이고, 목사 때문이고, 여당 때문이고, 야당 때문이며, 대통령 때문이라고 우깁니다. 서로 잘못을 전가합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요나가 보여준 행동은 참으로 시원스런 행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습니까?
1)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알 때에 잘못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요나가 잘못을 시인할 때에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은 때였습니다. 12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내가 아노라고 말합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내가 안다고 요나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잘못을 범했지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시인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사실 요나 자신이 잘못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많은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우리는 요나가 처음부터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게 상달하였느니라고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민족적인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니느웨 백성들이 하루속히 망하기를 바랐기에 요나가 니느웨 행을 거절하는 것을 별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간 배가 있었습니다. 욥바에서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갈 수도 있고, 걸어서 니느웨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시스행 배가 있었습니다. 평소 하나님께서 사람의 길을 인도하신다고 확신했던 요나는 다시스로 가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엄청난 잘못이다고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말씀에 순종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담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담아,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의 열매를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먹어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에게 심각하게 주의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부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분명히 경고를 했습니다.
(마 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위험이 닥칠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할 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에게 무엇을 부탁했습니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위험이 와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능력을 얻도록 기도하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명령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자신만만했습니다. 주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탁한 기도를 한시간도 드리지 못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자신의 말을 뒤집어 버립니다. 닭이 울기 전에 3번이나 부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경고나, 우리 예수님께서 주신 경고의 말씀을 우리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시합니다. 그리고 그게 심각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말씀을 거역하는 일이 심각한 잘못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요나와 같은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서 21:4절을 볼까요?
잠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마음이 교만한 것이 죄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진실로 겸손합니까? 진실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남들을 자신보다 더 좋은 분으로 여깁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이 한 일은 양심적이라고 생각하고, 남들이 한 일은 불량하고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말처럼 어떻게 벌든 돈만 많이 벌면 그게 선입니까? 요즘 사람들은 참으로 도덕이나 윤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만 된다면 자신의 행동이 비도덕적이든, 비윤리적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번 돈, 형통한 삶을 하나님이 인정합니까? 악인의 형통은 죄악이라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하게 사는 삶을 가리켜 죄악이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죄를 짓더라도 부자로 살겠다고 합니다. 돈의 가치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기에 악한 방법을 써서라도 돈을 벌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깊이 새겨듣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들어도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죄 인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때로 고난을 주십니다. 깨끗하게 살아가야 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할 백성이 제대로 살지 못할 때에 경고와 고난을 주십니다. 문제는 이런 고난을 당할 때에, 주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요나에게 그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대풍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무디어 둔감해질 때에 하나님은 영적 무감각을 일깨우기 위해서 때때로 고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불행한 자들입니다. 자신이 잘못해 놓고도 잘못한 줄 모른다면 진짜 불행한 자입니다. 만일 요나가 계속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요나만 수장되는 것이 아니라, 배에 탄 모든 선원들도 수장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습니다. 각종 죄악으로 배가 침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배가 침몰하고 있습니다. 침몰하는 원인을 몰라 엉뚱한 노력만을 퍼붓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침몰하는 배를 구하는 일입니다. 세상은 침몰하는 배를 구해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침몰선을 구해낼 수 없기에 구해낼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누가 합니까? 자신의 죄악을 깨닫는 자가 합니다. 잠자는 자는 침몰하는 현대인의 인생을 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깨어 있으십시오. 누구 때문에 사람이 침몰하는 가를 알아 그들을 도우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고백하기 힘든 상황에서 잘못을 시인하였습니다.
요나가 잘못을 고백한 시기는 자신에게 별로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불리했습니다. 우선 배에 탄 선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을 바다에 던진 뒤입니다. 바다에 수장된 물건들 중에는 아주 값비싼 것들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줄 귀한 선물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집에서 필요하기에 사온 필수품도 들어있었습니다. 또한 배를 이용하여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들은 시장에 내다 팔 값나는 물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며칠동안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래 장사하는 사람들은 1원을 가지고 싸웁니다. 그래야 장사를 잘합니다. 그런데 힘들게 번 돈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렸으니 그 기분이 오죽이나 했겠습니까? 더욱이 배가 이렇게 폭풍우를 만나게 된 꼴이 요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 그들이 어떤 기세로 달려들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잘못했다는 말을 하는데는 별로 시간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한 후에 일어나 엄청난 파문을 두려워해서 시치미를 딱 떼고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나가는 게 세상이 돌아가는 꼴 아닙니까?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보십시오. 이들은 분명 근대화를 거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 갖은 만행을 일삼았습니다. 10대에서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여인들을 무자비하게 납치하거나 유인해서 정신대로 보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확대를 위해 주변 나라를 침범했습니다. 남자들을 붙잡아서 강제노역에 동원하거나 징병을 실시해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힘이 세니까 우리는 이런 일에 별로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고 항변합니다. 오히려 당시 전쟁이 국제질서를 유지하는데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잘못을 인정할 경우, 후에 군사적인 팽창을 하기 힘들게 되고, 계속 제기되는 막대한 전후보상을 두려워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모든 일본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본인 목사는 과거 일본인들이 저질은 잘못을 사죄하는 뜻으로 한국의 교회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절하면서 일본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반성합니다. 이렇게 진실한 일본인들의 사죄는 날로 험악해져 가는 반일 감정, 그리고 일본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녹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못합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난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나 잘못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잘못을 했을 때에 솔직하게 잘못을 했다고 고백할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길에서 돌이킬 줄도 알아야 합니다. 솔직한 시인은 감동을 줍니다. 언 감정을 급속히 녹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다윗처럼 솔직하게 고백하십시오. 내가 주께 범죄하였습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면서 눈물로 침상을 적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다시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람에게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고백하십시오. 찾아가기가 어렵더라도 찾아가야 합니다. 요나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이 풍랑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라고 고백했습니다. 남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처한 어려움, 부담 보다 덜 할 것입니다. 비록 힘들더라도 요나처럼 나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보세요. 이렇게 요나가 잘못했다고 시인하면서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하니까 뱃사람들이 요나를 어떻게 했습니까? 살기 등등한 기세로 달려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선원들은 힘써 배를 저어 육지에 돌리고자 애를 썼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온 단어 그러나가 중요합니다. 요나는 배에서 추방당해 죽음을 각오했는데, 솔직한 고백을 듣고 뱃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뱃머리를 돌려 출항지로 되돌아 갈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요나를 출항지에다 내려놓아서 니느웨로 가게 했던 것입니다. 왜 뱃사람들이 요나를 그냥 놔 두었을까요?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니 닫혔던 마음, 폭발할 것 같은 분노심, 적대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 말 한마디에 천냥 빛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못을 해놓고 시인하지 않으면 감정이 상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잘못했다고 시인하면 껄끄러웠던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시원해집니다. 잘못했다고 고백하기가 두려워서 말을 못합니까? 일이 악화되기 전에 고백합시다. 이게 자신이 사는 길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잘못했다고 고백합시다. 우리 주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3)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잘못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지은 후에 잘못을 고백하는 일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맑아지고 깨끗해지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깨끗한 분입니다. 죄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 역시 자신을 닮아가길 원하십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아갈 때 기뻐하듯,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면 잠잠히 기뻐하는 분입니다.
♬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 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닮아가는 걸 기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잘못을 비는 요나의 모습이 나옵니다.
실상 잘못했다고 말하는 일은 격동이나 격분을 잔잔하게 합니다. 싸움을 멈추게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다투다가도 어느 한편에서 잘못했다고 말하면 그걸로 풍랑이 잠잠해집니다.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이 서로 싸우다가도 어느 한쪽에서 잘못을 인정하면 그걸로 풍랑이 잠잠해집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도 어느 한 나라가 잘못을 시인할 때에 긴장이 사라집니다. 보십시오. 지금 다시스로 가는 바다는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습니다. 10절에 보니,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배에 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조용하던 바다가 이렇게 풍랑을 일으키는 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이것저것 다 해봅니다. 그런데도 풍랑은 조용해지질 않습니다. 함께 배에 탄 요나는 이들이 당한 고통을 보고 마음이 움직입니다. 그래 이들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해서는 안되겠다. 이들이 더 이상 불안에 떨게 해서는 안되겠다. 그래서 잘못을 고백한 것입니다.
마음이 강팍한 사람들은 남이 당하는 아픔, 남이 겪는 고통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일본이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 잘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을 때에 누가 제일 크게 상처를 입을까요? 강제적으로 징용을 당해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나 정신대에 끌려간 분들입니다. 이들은 한평생동안 상처를 간직하며 살아가는데, 일본은 잘못한 일이 없다고 말하면 얼마나 큰 아픔이겠습니까?
이들에게 눈물을 흘리면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당신들을 괴롭힌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이런 말을 했다면, 얼어붙은 마음, 꽁꽁 언 마음이 살살 녹아내릴 것입니다. 고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이처럼 아름다운 일을 합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그는 어떤 벽을 넘기 위해서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임시 방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잘못했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여 곤란한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애씁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태도라 볼 수 없습니다. 요나는 당시 선원들이 너무 고통당하는 것을 알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환경을 모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때문에 일어난 어려운 여건을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잘못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체면이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뉘우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진정한 뉘우침은 남을 위해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이게 진정한 뉘우침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통 가운데 상당수는 남 때문에 일어납니다. 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차가 인도를 덮쳐서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태어날 때에 의사가 잘못 뇌를 건드려 뇌에 이상이 생긴 채 평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고통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내 탓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일이 이 지경까지 왔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타오르는 분노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인정하여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끼치는 성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탓을 인정하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내 탓을 인정하는 교회는 편안합니다. 내 탓이요라고 말하는 국가는 건강한 국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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