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의 의미

종려주일의 의미(누가복음19:28-40)

      복된 종려주일 아침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며 오늘 메시지를 나눕니다.  오늘 맞이한 종려주일은 우리가 기쁨으로 맞이하는 축제의 날입니까?  아니면 슬퍼해야 할 날입니까?  다음 주일 맞이하는 부활절은 성탄절과 더불어 분명 큰 축제의 날인데, 오늘은 어떤 날입니까?  중세의 로마카톨릭교회는 종려주일을 슬픈 날로 기념한 반면, 희랍(그리스)정교회에서는 축제의 날로 보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 날을 어떻게 보내야겠습니까?  오늘은 기쁘면서도 슬픈 날입니다.




      기쁘면 기쁘고, 슬프면 슬픈 것이지 기쁘면서 슬픈 날이라니요?  이것이 종려주일이 의미하는 독특성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종려주일의 이런 양면성을 맛볼 수 있습니다. 




      먼저 종려주일이 기쁜 날이 되는 것은, 이 날은 우리 주님의 승리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입성하신 장면을 누가가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산󰡕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왕이 행차하는 곳마다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이 동행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당시에는 오늘처럼 카메라나 캠코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마가가 먼저 기록한 것을 보고 보충하며 주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줍니다.(그래서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 하지요!)




      먼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두 제자들을 보내어 주님이 타실 나귀 새끼를 풀어오는 장면이 독특합니다.  여기에 왕이신 주님의 권위가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건너편 마을에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면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왜 나귀 새끼를 끌고 가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답변까지 미리 주셨습니다.  두 제자가 실제 그렇게 했을 때, 놀랍게도 나귀 주인이 아무런 대구 없이 나귀를 끌고 가도록 허락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그의 신적인 전능하심을 이미 나타내 보여주셨는데, 여기서는 그의 신적인 전지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더불어 왕이신 그의 권위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납니다.(주께서 쓰시겠다는 한 마디에 순종하는 신비로운 모습...)  이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 사실을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기 전,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걸치고 주님이 그 위에 타시게 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과 마태복음 21장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그들의 옷을 벗어 주님이 오시는 길에 깔고 또 종려나무를 깔고 그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호했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본문 37절에는 사람들이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요란법석을 떨며 왕이신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찬송 내용은 38절,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이 왕이라고 선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주님을 왕으로 추대하며 대대적으로 환영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시편118편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메시야 만세를 외치며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환호하며 맞이하는 사람들이 못 마땅했던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이 사람들을 조용히 좀 시키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셨습니까?  40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지금은 조용하고 침묵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영접하며 축제를 벌여야 하는 때임을 주님께서 분명히 하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종려주일은 슬퍼해야 할 날이 아니라 분명히 축제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3년간 힘써 하신 사역들이 열매를 맺어 인기절정에 이르렀고, 주님이 드디어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시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41절,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사역을 하시는 동안 두 번 우셨는데, 한 번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이고(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의 비참함을 보시고-죄의 결과!, 더불어 자신을 유독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 앞에 슬퍼하시며!), 두 번째가 오늘 본문에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며 자기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왜 우리 주님께서 자신을 이토록 환영하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까?  주님은 불과 며칠을 가지 못해, 이 환호의 소리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음성으로 바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그토록 품고자 하셨지만(암탉이 제 새끼를 품는 것 같이...), 예루살렘은 끝내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고 인격을 지니신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종려주일에 유대인들은 주님을 뜨겁게 환호하여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그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대적으로 집결하였고, 메시아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 환호는 일주일도 가지 못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왜 예루살렘 사람들은 불과 일주일도 못 되어 이처럼 상반되는 자세를 취하고 말았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본 것은 정확하였습니다.  주님은 구약성경의 예언에 하나도 어긋나지 않게, 그의 탄생부터(이사야7:14) 시작하여 오늘 예루살렘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기까지(스가랴9:9) 메시아 사역을 정확하고 빈틈없게 감당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완전한 인생을 사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까? 




      지난 부흥회를 인도하셨던 백경홍 목사님께서 광주의 어느 교회 목사님을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얼굴도 모르는 분인데...  그 교회가 장년만 3,000명이 출석한다고(호남을 대표하는 교회, 일명 광주의 소망교회...)...  목사님께서 총회장을 해도 하셨을 분인데...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평생 성실하게 목회만 하셨다고!  사람이 틈이 좀 보여야 하는데, 그 분은 설교면 설교, 인격이면 인격 어느 하나 흠이 없는 귀한 목사님이라고...  이 시대에 보기 힘든 목사님이신데, 알고 보니 제 신대원 동기의 아버님이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메시아 사역을 완전하게 감당하셨고, 사람들도 그가 메시아인줄 알았습니다.  문제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인류의 죄로부터 건지실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당시 그들이 무거운 식민통치로 고통당하던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해방자였습니다. 




      그들이 듣고 본 예수라면 과연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정치적 메시아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께서 백마를 타고 입성하시지 않고,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말았습니다.(주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신 것이지, 정복자가 아니심을...)  그들의 이 잘못된 메시아관은 이후에 그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가 180도 전환될 것을 충분히 예고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종려주일은 축제의 날이 아니라 슬픔의 그림자가 보인 날입니다.  겉으로는 대단한 축제가 이뤄졌지만, 속으로는 위대한 메시아를 죽이고자 하였으니 이 얼마나 슬픈 날입니까?




      예루살렘에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을 전혀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엔도 슈샤쿠가 󰡔침묵󰡕에서 묘사한 것처럼 주님은 그저 침묵 속에서 무력한 모습으로 개처럼 죽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린 해방자의 모습은 간데없고 무력한 모습만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참 신비롭습니다.  사람들의 무지와 잘못과 실수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이뤄가셨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으나, 그들의 일그러진 메시아관으로 인해서, 그들의 손에 메시아가 죽임을 당하심으로 그 사명을 끝내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대대적인 환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소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당장의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소해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에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참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부응하여 그들의 요구를 듣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르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3주간 존 비비어의 순종 시리즈를 나누며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되, 주님과 같이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장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사명을 잊지 않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시대, 새 역사가 열렸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저주 아래 아니고(율법의 시대는 가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시대(은혜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종려주일을 통하여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과 순종을 본받아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종려주일의 참 의미를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종려주일과 고난 주간의 주님을 보면서 김동진 곡의 「목련화」가 떠오릅니다.  겨우네 힘겨운 세월을 보내고 봄을 알리는 순전한 꽃을 피는 목련화를 보면서, 작가는 목련처럼 아름답고 값있는 인생을 살겠다는 결단을 노래합니다.(노래로...)  봄을 알리는 꽃을 보고도 이처럼 결단하는데, 우리가 종려주일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더욱 아름답고 값있는 인생을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