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혜의 기회 왕하5:9-14 □장마가 끝나자마자 불볕더위가 시작되었고 연일 열대야가 계속되어 밤잠을 설치게 하고 있다. 소낙비라도 시원스레 내려주었으면 좋으련만 잔뜩 찌푸려진 하늘이 엉뚱한 곳에만 비를 뿌려대고 있다. 소낙비라는 것이 그런 특성을 가졌다. 먹구름이 지나가는 곳에만 비가 뿌려지고 나머지 이웃 동네는 쨍쨍 하늘이 맑아 무지개만 구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그 장소에 있으면서도 물방울 하나 맛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엎어진 그릇이 그렇다. 마당 한 가운데 엎어져 있는 그릇은 그렇게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그 속은 전혀 물기를 머금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동일한 장소에서도 소낙비 속에 엎어진 그릇과 같은 현상은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신령한 은혜를 실감나게 맛보는 현장에 있으면서도 메마른 장작처럼 우두커니 남겨진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오는 전장에서 경험하는 일이라면 대단한 행운이라고 하겠지만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가 쏟아 부어지는 현장에서 경험하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 불행한 경우는 없다.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아주 낮아져서 우리에게 오시는 만큼 우리도 굳어진 생각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누리는 체험을 반드시 가져야할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우리와는 전혀 다른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수준, 경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풍족하게 누린 것은 아니다. 애석하게도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은혜의 한 가운데 있었으면서도 전혀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나게 체험하는 데 상당한 방해요소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나아만이라는 사람의 경험을 살펴보면서 그가 어떻게 여러 방해요소들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는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의 장단점을 잘 분석해 보기 바란다. 그에게 본받아야 할 믿음과 버려야할 믿음 아닌 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찾아보기 바란다. 그의 신분은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이었다. 당시 아람은 이스라엘을 지배할 정도의 강대국이었다.(지금의 시리아 지역에서 발흥 앗수르를 물리치고 승승장구) 나아만은 바로 그 앗수르를 물리치는 전쟁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은 아주 돈독한 것이었다. 탄탄한 지위, 보장된 장래가 그의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을 그는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1절은 그가 가지고 있던 또 하 나의 실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다른 조건들은 모두 그를 더 큰 성공으로, 더 촉망받는 미래로 이끌어주는 아주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에게 발병한 문둥병 모든 호조건을 깡그리 무너뜨리며 매우 좋은 기회들을 몽땅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최악의 것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승리, 그의 지위,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은 부럽기 그지없는 것이었고, 그런 것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하고 하는데 손색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원치 않는 질병, 문둥병이 그의 발목을 비틀어 쥐고 있었던 것이다. 문둥병이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는 자기 병을 고쳐보려고 백방의 노력을 다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것도 문둥병을 치료하는데 효험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 나아만 장군의 집에 이스라엘 땅에서 데려온 어린 여종이 하나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를 만나신다면 아마 문둥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강대국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그 어린 여종 말을 귀담아 들어야 했을까? 다른 이야기라면 씨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종이 무슨 말을 했는가?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기회라고 하겠는가? 그 말을 전한 사람이 누구인들 문둥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듣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내가 나아만이라면 이것저것 따질 필요도 없이 곧장 사마리아로 달려갔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분이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아주 가까이 있는 분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그래도 장관이 체통이 있고 위신을 지켜야지 어떻게 계집종의 한마디에 수선을 떨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라면 조금 심각하다. 문둥병으로 시달리는 나아만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해서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아직 자기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 깊고 신중한 통찰에 이르기를 바란다. 잠자고 있는 믿음, 무감각 무의식에 빠져 있는 영혼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기를 바란다. 우리가 만약 우리 영혼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체통이나 위신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데 방해받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나아만은 자기의 상태를 알았다. 얼마나 심각한 질병에 매여 있으며, 그 치료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비록 어린 여종의 말이었지만 “사마리아의 선지자에게 가면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무시하거나 흘려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여종의 말이었지만 그에게는 기회의 말로 들렸던 것이다. 반드시 붙잡아야할 기회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걸음이지만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로, 사마리아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람의 군대장관이 자기를 찾아오자 이스라엘 앙은 기겁했다. 그만큼 나아만은 대단한 존재였던 것이다. 드디어 나아만 장관이 사마리아의 선지자 집 앞에 도착했다. 그 행렬의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9절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의 왕도 기겁해서 맞아들일 정도였으므로 선지자도 그에 못지않은 환대로 맞아줄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선지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사람을 보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전갈만 보낸다. 참고 참으며 선지자의 집 앞까지 찾아갔던 나아만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최소한 얼굴을 대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상처에 손을 얹어 안수는 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뭐라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 우리나라에 요단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좋은 강들이 부지기순데 그 고랑 물에 몸을 씻으라니!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말이 되는가? 돌아가자!” 나아만에게 최대의 위기가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은혜를 기회를 아주 놓칠 뻔 한 위기가 온 것이다. 누구든지 그렇다. 자기가 기대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마음이 상하고 감정이 폭발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감정에 얽매이기 시작하고 그것이 폭발하도록 방치하면 일을 그르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이 구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 분노가 폭발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분노가 우리를 다스리도록 방치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나아만이 왜 그렇게 흥분하고 분노를 폭발시키게 되었던가? 선지자의 태도가 자기가 기대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분노를 드러냈다는 것은 정당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나아만이 어떤 입장으로 선지자를 찾아갔는가? 군대장관으로서인가? 문둥병자로서인가? 그가 치료를 목적으로 선지자의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간 것이라면 치료의 방법은 누가 선택해야 하는가? 병원에 갈 때 벌써 자기가 처방을 내리는 환자라면 얼마나 웃기는 사람인가? 가장 지혜로운 환자는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고분고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가장 빠른 치유를 맞보게 될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좀 못 마땅해도 이런 저런 지시를 군말 없이 따르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은혜를 베푸신다. 하마터면 나아만은 문둥병을 치료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뻔 했다. 아니 그 자신의 생각과 행동대로만 끝났더라면 기회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수행한 종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13절. 여러분 주인이 종의 충고를 듣기가 쉬운가? 어려운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하인들의 조언을 듣기가 쉬운가? 어려운가? 나아만이 자기 종의 말을 듣고, 그 말대로 따르는 것이 쉬웠겠는가? 어려웠겠는가? 방금 전에 나아만은 극도로 흥분해서 돌아가자고 명령했고 자기는 벌써 몸을 돌려 떠나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들의 조언은 나아만이 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아만의 걸음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나아만 장관이 자기의 감정과 자시의 선택을 버리고 종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나아만처럼 해야 한다. 감정과 분노의 포로가 된 자기 고집을 내세우고 그것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아만처럼 되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람이어야 한다. “감정이 내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내 방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방식을 따르겠다.”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나아만은 어떻게 했는가? 14절. 자기에게 주어진 은혜의 기회를 백분 활용하는 사람이 맞보는 체험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다가마는 법이 없으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다가 마는 일이 많다. 우리는 그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까지 중단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대강 알고, 대충 믿는 데서 만족하지 말라. 이번 전인치유수양회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 각자가 수양회에 반드시 참석하고, 충만한 은혜를 실감나게 체험하기 까지 방해가 되는 요소를 지혜롭고 단호하게 극복하라. 수양회의 마지막 시간까지 간절히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은혜를 사모하며 마음을 집중하여 성심으로 임하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시며, 약함을 강하게 하시며, 질병을 건강으로 회복하시고, 여러분의 영혼을 말씀과 성령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눅4:27은“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고 밝혀준다.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나아만에게 뿐만 아니라 나머지 문둥병자에게도 완치의 기회는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치료받은 사람은 나아만 뿐이었다는 것이다. 왜? 그 기회를 붙잡아 활용한 사람이 그 한 사람 뿐이었기 때문이다. 전인치유 수양회는 우리가 차별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기회다. 여러분 모두가 이 기회를 붙잡는 분들이 되기 바란다. “모든 성도가 회복되며, 치유함을 받았더라.”는 기록이 우리 교회역사에 남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