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치지 않는 은혜 왕상17:8-16 성경에 나오는 많은 선지자 중에서도 엘리야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우상숭배와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 그가 감당한 사역은 참으로 괄목할 만하다. 그는 막강한 권력으로 우상종교를 전파하는 왕후 이세벨과 대항했고,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홀로 맞대결을 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권능이 크심을 당당하게 증명해 보였다. 그런 엘리야 선지자의 활동을 잘 알고 있는 성도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그 종들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별로 크지 않은 것 같다. 온 몸 온 열정을 다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겨우 한 끼분의 식사를 공급하실 뿐이다. 그것도 까마귀를 시켜서 혹은 가난한 과부 집에서 얻어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든 것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주시려면 한꺼번에 몽땅 주시지 왜 그렇게 찔끔찔끔 인가?\" 투덜거리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말로 하나님은 손이 작으신 분이실까? 아까워서 한꺼번에 다 주시지 못하고, 자꾸 양을 줄이시는 분이실까?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은혜의 크기 사랑의 넓이를 찾아보기로 한다. 1. 사르밧으로 가라. 엘리야는 참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일하게 된 사람이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인정받고 대접받는 지위로 기대할 수 있겠지만 엘리야의 경우는 그 정 반대였다. 온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당시는 아합왕을 필두로 해서 하나님보다는 우상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우상숭배를 죄로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엘리야로서는 왕을 비롯해서 온 백성에게 그들이 즐겨듣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했으며, 그들의 면전에서 잘못을 지적하는 악역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7:1절에서도 아합왕에게 대 놓고 하는 말이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난 다음 정말로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기를 3년 6개월 동안 지속되었을 때, 그 원성은 모조리 엘리야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엘리야의 별명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로 통했다(18:17). 이스라엘 전역에 가뭄이 계속되고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까 당연히 양식을 구하는 일이 어려워져 기근의 고통이 말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 고통의 원흉으로 지적되어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던 엘리야로서는 호구대책이 더욱 지난한 일이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디 가서 양식을 구하겠는가? 누가 그를 도와줄 수 있었겠는가? 그럴 때에 하나님은 비상수단으로 그를 먹이셨다. 아시는 것처럼 까마귀가 때가 되면 먹을 것을 입에 물고 엘리야에게 날아왔다. 17:6절을 보면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라고 쓰고 있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애쓰시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말씀이다. (비둘기도 아닌 까마귀를, 끼니를 잘 맞추어서) 까마귀를 보내시는 하나님이 더 고생인가? 그것을 받아먹는 엘리야가 더 고생인가? 그러나 그 일도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까마귀를 보내는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계속되는 가뭄에 시냇물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밧으로 피하도록 명하셨다. 드디어 오랜 가뭄으로 펄펄 먼지만 날리는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잡히기만 하면 죽이겠다고 벼르는 왕의 지명수배를 피해 국경너머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질리도록 물렸던 까마귀의 시중도 그만 받아도 되었다. 그러나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시돈 땅 사르밧에 도착했을 때 ,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역시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거기 가서 만난 사람은 전혀 그럴 준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 사람 역시 엘리야의 양식을 공급하기에 넉넉하지 못한 처지에 있었다. 오히려 엘리야가 그 가난한 과부의 양식을 해결해 주는 것이 선지자다운 책임감이라 해야할 상황이었다. 차라리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를 받아먹는 것이 나을 뻔했다. 하나님은 엘이야에게 \"가라. 준비가 되었다.\"고 말씀하셨고, 엘리야는 그 말씀을 믿고 왔는데 실상은 더 어려운 것이고 말았다. 이 지점에서 신자는 믿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비로소 교회에 출석하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가정의 분위기가 더 엉망이 되어 버린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모처럼 하지 못하던 기도생활을 시작했다. 잘 풀려 나아갈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달라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역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아끼고 아껴서 헌금을 드리고 시간을 쪼개어서 헌신까지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가까운 사람들까지 조소하는 것이다. 거기까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면 모든 결정은 끝난 것이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결재가 나버린 일이라는 의미이다. (군대의 휴가는 정해진 서열대로다. 그런데 이제 막 전입해온 신병이 휴가를 떠난다고 준비를 한다. 알아보니 이미 사령관의 결재가나 버렸다. 중대에서는 아직 아니었지만 그의 휴가는 실현되었다.)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시기에 미래를 말해도 \'~할 것이다.\'가 아니다. \'~하게 했다.\'라도 표현하신다. 하나님에게서 미래는 과거보다 더 확실하기 때문이다. 2. 먼저 나를 위하여 사르밧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신 과부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12절 \"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먹고 그후에는 죽으리라\" 시쳇말로 혹 떼려다가 하나 더 붙이고 마는 꼴이 되었다. 기근을 피해 살길을 찾아왔다가 얻어먹기는커녕 엉뚱한 사람 장례까지 치러야할 판이 될 뻔하였다. 양식이라고는 달랑 한 끼니 분이 전부라는 것이다. 아끼고 아꼈지만 이제는 그거라도 아들과 함께 나눠먹고 죽겠다는 것이다. 과부는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한끼 남은 식량으로 마지막 떡을 만들어 먹고 죽을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선지자가 무엇을 해야 옳다고 하겠는가? 여러분 같으면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엘리야가 그 난처한 처지에 있는 과부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 13절 \"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런 몰염치의 말이 어디 있는가? 선지자 정도라면 자기 비상식량이라도 풀어서 보태주었어야 할 텐데 \"먼저 내 떡부터 만들라\"니?! 14절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이런 비양심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의 약속이 있었기에 그것을 믿는 엘리야 선지자가 자기에게 먼저 떡을 가져오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여인이 믿음으로 응답할 차례이다. 금가루처럼 아껴왔던 이 양식을 선지자에게 나눠 줄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귀한 양식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아들과 자기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아울러 양식이라는 물질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진 약속을 의지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우리도 여기서 좀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굶주린 시대였다. 그러기에 양식의 가치는 어느 시대보다 훨씬 높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양식을 나눠주려기 보다는 움켜쥐려고 애써야 하루라도 더 살아 남을 수 있는 그런 상황 속에 있었다. 그럴 때 무엇을 붙잡는 것이 가장 복된 길이겠는가? 이 여인이 엘리야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로지 양식으로만 삶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얼마동안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며칠을 더 버틸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상황에서 양식의 양이 많고 적음을 그다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열흘을 더 사는 것과 백일을 더 사는 것이 그렇게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인의 선택해야할 정말 소중한 사실은 통에 남은 가루에 삶을 걸 것인가? 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삶을 걸 것인가 이었다. 또 하나님께서도 엘리야를 통해서 그것을 요구하시면서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절박한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뵙는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나를 따르라.\"였다. 주님께서 사람들이 드리는 헌금을 평가하실 때에도 기준은 같다. 과부의 두렙돈을 가장 많은 헌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평가를 내리신 이유는 그것이 그녀의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이다. 헌금은 하나님이 돈이 부족해서 만드신 제도가 아니다. 믿음을 보시기 위해서이다. 마음을 보시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물질을 의지해서 사는지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는지 그것을 평가하시는 것이다. 만일 헌금이 돈만을 내놓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려울 것도 없다. 시간을 내놓는 것보다, 몸으로 헌신하면서 땀을 드리는 것보다 돈으로 때우는 것이 훨씬 쉽다. 극단적으로 목숨을 내놓겠느냐? 돈을 내놓겠느냐면 그까짓 돈을 애지중지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군다나 헌금에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생각할 때. 헌금보다 더 확실한 투자가 어디 있는가? 그러니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헌금보다 더 쉬운 믿음의 실천은 없다. 또 그것이 결국 내가 물질을 의존하는가? 하나님을 의존하는가를 나타내 보여준다. 본문의 과부에게 요구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하루만 살다 끝내려면 구태여 하나님의 약속을 들먹거릴 필요도 없겠다. 당장 배부르면 그만이지 내일 죽을 것인데 무슨 미래의 약속인가? 우리가 이 세상으로 인생이 다라고 생각한다면 물질에 소망을 두고 그것으로 힘을 삼는 것도 현명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기근은 하루 이틀로 끝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시 비를 내리시기까지 계속 될 것이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버틸 수 있겠는가? 바닥난 가루통으로 3년6개월을 버틸 수 없는 것처럼 물질의 소유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의 미래에 보장이 못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현명한 판단이 가능해 진다. 3. 줄어들지 않는 양식 여인은 마지막 가루를 퍼다가 떡을 만들었다. 마지막 떡이었다. 엘리야 선지자에게 먼저 대접했다. 다음의 끼니를 때울 양식은 더 이상 없다. 거기서부터는 하나님의 책임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약속하신 것을 믿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삶을 보장하는 양식이 통 안에 남아 있는 가루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장하신 말씀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결과는 믿음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 한 끼니의 분량밖에 없었던 가루통이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그치지 않고 어김없이 채워졌다. 이것을 어떻게 사소한 은혜, 찔끔찔끔 주시는 은혜라고 말해야 하겠는가? 나는 자상한 은혜라고 표현하고 싶다. 한꺼번에 3년분의 양식이 아닌 한 끼니씩의 양식을 공급하심이 얼마나 적절한 은혜인가? 그들이 얼마나 신선한 빵을 먹게되었겠는가? 가루통을 열 때마다 얼마나 가슴 벅찬 체험이었겠나? \" 아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고 오늘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셨구나? 한끼니, 한 끼니가 다 소중하고,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겠는가? 그 오래된 기근 속에서 한끼니 한 끼니가 다 감사가 아니었겠는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덧입고서도 얼마지 않아 잊어버리는 우리들의 습성인데. 매일매일 그치지 않는 은혜를 체험하게 해 주셨으니, 하루라도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으니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큰가? 그 은혜 안에 살았기에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하고 죽음 없이 하늘로 들려 올림을 받지 않았겠나? 여인은 \"이제 한끼 밖에 없다. 이것 먹고 죽자\"고 했는데 하나님은 일부러 엘리야 선지자를 그 여인에게 보내시고 약속을 주시고 믿음을 일으켜 죽에서 건져내셨으니(눅4:25,26) 얼마나 큰 은혜인가? 오늘 당신이 예배의 자리에 있는 이유를 알겠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한 계획인줄 짐작하는가? 이미 당신을 향해 부으시기 시작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쳐지지 않음을 확신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