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세상을 변화 시키소서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욘4: 5-11 행10: 34-43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교단들과 교파들이 함께 하는 세계교회협의회 제9차 총회가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 폰티피칼대학에서 지난 화요일에 시작되어 이번 주 목요일일까지 장장 10일간 열리고 있는 데 그 주제가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 세계교회협의 총회는 1948년에 창립된 개신교 최대의 기구인데 7년에 한 번씩 총회로 모입니다. 여기에 모이는 분들은 120여 국가에서 347개 회원교회의 정식 대표들 700명을 비롯하여 기타 전문위원, 기관 대표, 옵서버 등등 약 4000여명이 모입니다. 저는 1983년에 카나다 밴쿠바 총회에 참석을 했었는데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쓰는 낱말 중에는 빛, 사랑, 생명, 용서, 자비 등등이 있는데 이 모든 좋은 말들을 포괄하는 낱말이 “은혜” 입니다. 은혜는 믿음의 중심에 있고 복음의 중심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에 은혜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이 바로 은혜라는 말속에 있습니다. 은혜를 영어로 grace라고 하는데 라틴어 gratia에서 나왔습니다. gratia란 로마를 정복한 자들이 피정복자들을 넓은 운동장에 모아놓고 투우 등 재미있는 경기를 보게 하고는 점심에 나눠주는 음식입니다. 공짜로 주는 음식입다. 피정복자들이 이 공짜 그라시아 점심을 먹으면서 정복당한 원한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했습니다.



이 단어를 기독교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짜 선물을 의미하는데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은혜에는 인간 쪽의 노력이나 수고나 공로는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은혜의 주입니다. 인간의 잘 잘못과 상관없이 내리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바로 은혜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은혜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오늘의 구약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느웨성은 이방나라입니다. 요나서에 기록된 대로 인구 12만 여명이고 걸어서 그 도시를 다 보려면 사흘 길이라고 했으니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 백성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요나를 파송하여 전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 자신은 그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아마도 이방 나라에 대한 무시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백성들이니 하나님의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그 도시로 가서 전도하고 싶지 않아서 스페인으로 도망을 가려다가 결국 고래 뱃속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깊이 참회하고서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받고 니느웨 성으로 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의 전도를 받고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들이 참회하게되었고 니느웨성은 벌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요나는 매우 섭섭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까봐 자기는 도망을 했었다고 본심을 털어놓았습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벌을 받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들이 망하는 것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요나의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은 박 넝쿨로 그의 머리를 가리게 하여 뜨거운 태양의 열을 피하게 하였다가 벌레를 보내 그 박 넝쿨을 쏠아 먹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태양이 맏바로 머리에 쏘여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자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까지 떠들어댔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합니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 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 니느웨를 어찌 네가 아끼지 않느냐?” 라고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성을 용서하시고 살려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의 하나님은 은혜의 주입니다. 인간 요나는 마지못해 전도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죄를 지은 그 도시 사람들이 그 죄 값을 치러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큰 성의 수많은 생명들이 너무나 귀중하여서 은혜로 저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관심 하였던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요나와 같이 이른 바 선민들에게만 관심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신약은 더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기독교의 복음인 은혜가 뚜렷하게 부각됩니다. 예수님의 탄생, 공생애, 죽으심, 부활하심 모두가 인간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최고의 사건들입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에서 보시는 대로 사도 베드로가 처음에는 이방 사람 고넬료의 방문 요청을 거절할 수 있었을 정도로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 번의 환상을 통하여 베드로의 마음을 바꿔 주셔서 결국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가서 세례를 주기까지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습니다(43절)” 라고 설교하는 도중에 모든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은혜란 이토록 차별이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편지들 초두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라고 선언하면서 은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편지의 처음에만이 아니라 편지의 끝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라고 글을 마감하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큰 선물이 우리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임을 힘주어 강조하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에는 은혜가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우리 인간들의 깨어진 심령들이 치유되고, 강팍한 마음들이 부드러워지며, 딱딱해지고 메마른 영혼들이 풍성해집니다. 교회는 이 은혜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거기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곳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우선되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성과가 돋보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철저하게 하나님 쪽에서 오는 은혜만이 넘쳐나야 합니다.



바울이 처음 시작되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율법의 종교를 경계하면서 은혜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교의 성전에서나 공회에서는 율법이 우선되었습니다. 법이 우선되니 인간의 행위가 문제가 되었고 인간의 행위가 우선적으로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위선과 가식과 형식이 앞서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우선 두다 보니 자칫 속은 빈 껍데기 신앙을 갖게 되곤 했습니다. 사람의 눈에 잘 보이게 하기 위한 외적인 장식에 관심을 쏟다 보니 형식적인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는 멀리 사라져버리곤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마음과 영혼 깊은 곳에 죄악들은 더욱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들을 덮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더욱 위선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율법주의를 경고하면서 은혜의 공동체를 이룩하려고 노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은혜의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든지 영접을 받았습니다. 죄인들이 환영받았습니다. 노예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몸을 파는 여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무시 받고 멸시받던 사람들이 영접을 받았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교회였습니다. 이제까지 율법의 멍에아래에서 짓눌렸던 사람들이 참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사람의 행위, 공로, 노력에 의하여 평가되던 율법주의 교회가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영접되고 받아지는 은혜의 공동체가 기독교입니다.



사도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전하던 하나님의 은혜는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는 것”(고후12:9)입니다. 율법은 강한데서 온전하여 지는 것이지만 은혜는 약한데서 온전하여 집니다. 인간의 강함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약함에서 넘쳐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이 자기 몸에 있는 가시 때문에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쳐주지는 않으시고 그대로 그 가시를 가지고 있게 하셨는데 이유는 그것이 “은혜” 가 되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율법아래에서는 죄인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죄가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곳은 은혜아래에서 만입니다. 율법은 죄를 용납하지 않지만 은혜만이 죄를 받아줍니다. 율법에서는 죄인은 죽습니다. 하지만 은혜아래에서는 죄인은 삽니다. 로마서 5:20절에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 선포입니까? 율법은 죄를 절대로 덮지 못합니다. 오직 은혜만이 죄를 덮어줍니다. 은혜의 공동체인 교회만이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바로 여기가 은혜의 동산입니다. 그 어떤 죄인도 받아드려지고 용서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주신 비유 중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들어 와서 기도하기를 계명을 잘 지켰고 십일조를 했고 금식을 했다고 자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율법적으로 말하면 거의 완벽한 기도요 완벽한 삶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세리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오면서 감히 하늘 쪽으로 머리를 들지도 못했고, 머리를 숙인 채로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사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리의 기도에 응답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비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함에서 스스로를 망쳤던 둘째 아들, 마침내 그가 아버지의 앞에 나타났을 때 아버지는 그를 무조건 품에 안고 입을 맞추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소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행위에 따라서 갚지 않으시고 용서와 사랑으로 모든 죄악된 과거를 덮어주시는 은혜의 종교를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율법과 행위 위주의 유대교와 새로 탄생하는 은혜의 종교 기독교와의 차별화를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맏형은 유대교적인 사고와 발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교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맏형은 자기 동생의 과거의 행위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쪽에서는 무조건적인 용서인데 반하여 둘째 아들 쪽으로 보면 뜨거운 참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고백할 때 은혜는 내립니다. 우리가 약할 때 은혜가 넘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성자기 된 다음에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이번 총회에 내 건 주제: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는 이 죄악 된 세상이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변화될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 의 지구촌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죄악들을 보고서는 이 땅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간구 하여야 합니다. 그 은혜가 이 지구촌에 넘쳐날 때 이 땅에는 변화의 역동적인 힘이 생깁니다. 인간의 공로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 땅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들입니다.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우리는 모두는 벌 받아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탕자들입니다. 하기에 니느웨성의 백성들에게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지구촌의 인간들의 행위들을 보면 벌받아야 합니다. 이 한반도 같은 핏줄의 남북의 백성들의 저토록 완악하고 서로 싸우는 모습은 무서운 벌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살길은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야 우리 모두는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이 변화되어 축복된 지구촌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