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
삼하9:1-8





하나님의 법정

장차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소자 아이에게 물 한 그릇을 준 그대에게 상급을 주노라! 병든 이를 찾아보고 위로한 그대에게 상급을 주노라! 외로운 이에게 말동무가 되어준 그대에게 상급을 주노라! 우리가 행한 작은 행위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 상받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다행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엄한 벌을 받을 사람도 많습니다. 양심 불량, 약속 불이행, 폭언과 폭력, 무지, 무관심, 냉담, 책임 소홀, 변명 등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 과연 누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앞에 우리는 한 사람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 같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는 공의가 있어야 합니다. 거짓말 한 사람보고 거짓말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남을 해롭게 한 사람보고 해롭게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는 죄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마지막에는 죽을 일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과분한 대접이나 호의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받을 것보다 훨씬 후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심판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고, 은혜의 길을 열겠습니까? 누가 대신 돈도 갚아 주고, 벌도 받고,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겠습니까? 누가 이 일을 하겠습니까?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남을 위해 대신 죽을 만큼 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의 은혜가 큽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희생합니다. 불구덩이에도 들어갑니다. 자식 아픈 것도 대신하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어머니는 예전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자식 출산하는데 소극적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무조건 희생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도 있다고 합니다. 내 자식을 은혜로 품는 것이 힘들다면, 나와 상관없는 남을 위해 죽기할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능력이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타락하여 심판을 받아야 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여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심판 대신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정에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3절).” 므비보셋이 누구입니까? 사울의 손자이고,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푼 은혜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6절).” 재산을 회복하고, 신분을 회복하였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아들처럼 대우해서 궁궐의 식탁에서 함께 먹게 하였습니다. 조상의 밭을 돌려주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무슨 큰 공로를 세우면 재산과 신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공로도 없는 죽을죄만 지은 사람에게 재산과 신분을 회복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재산과 신분을 회복한 것이 은혜입니다. 왜 은혜라고 합니까? 공의로 판단하면 불합리한 일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죽으려한 사울의 손자입니다. 원수의 손자를 찾아서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 반대로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세상의 관습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윗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사울왕의 후손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어야 합니다. 전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회복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므비보셋이 무슨 비상한 재주나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절뚝발이입니다. 어려서 급히 피난 가다가 유모가 그를 떨어뜨려서 절뚝발이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모양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과 신분을 회복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이 처세술이 뛰어나서 먼저 다윗을 찾아서 용서를 구하고, 충성을 다짐하면서 은혜를 구한 것도 아닙니다. 므비보셋이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면 다윗을 먼저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먼저 므비보셋을 수소문해서 찾았습니다. 금방 한 약속도 어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배신하는 것이 허다합니다. 변명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20년 전에 요나단과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켰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은혜을 증명합니다. 무조건적으로, 주권적으로, 선택적으로, 언약에 근거하여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므비보셋은 누구 때문에 은혜를 받았습니까? 아버지 요나단이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라. 누가 살고 죽든지 우리는 생사 간에 운명을 같이 한다.” 두 사람은 언약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고, 요나단은 죽었습니다. 서로의 언약대로 왕이 된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돌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므비보셋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언약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그 혜택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과분한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죄 사함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원수되게 합니다. 파멸의 죽음의 근본 원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한 것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죄의 사실은 인정되지만 정죄되지 않습니다. 죄의 형벌은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신 형벌 받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됩니다.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고, 가진 것이 많은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전에는 사단의 종이고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방영된 후에 우리 사회에 신데릴라 열풍이 불었답니다. 진정한 신데릴라는 재벌의 2세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되고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은혜가 무엇입니까? 신분과 재산의 혜택을 누립니다. 법적으로 하나님의 호적에 등재되었습니다. 누구도 법적인 신분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실제적인 혜택도 누립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푸른 초장으로 생명 시냇가로 인도하십니다.

육신의 필요만 아니라 영적 필요도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합니다. 기도 응답이 풍성합니다. 찬양이 풍성합니다. 입을 열면 예수님 믿으라고 전도합니다. 눈을 감으면 선교에 대한 열망이 생깁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영적으로 풍성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고, 아름다운 모양도 없지만, 예수님 때문에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육 간에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서 살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심판을 이기고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길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내 행위의 온전함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백번 노력해도 백번 실패합니다.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탄식했습니다. 율법과 행위로는 은혜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자랑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내 힘과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 내게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도울 수 있는 시간과 물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도울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 양심, 내 의지인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치매가 무서운 병입니다. 그분들이 무슨 죄가 많아서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치매가 걸리지 않은 것도 은혜입니다. 느브갓네살왕이 교만할 때 하나님이 그를 낮추셨습니다. 정신병자가 되어서 들에서 짐승과 함께 이슬과 풀을 먹고 지내게 하셨습니다. 정신이 온전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려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8절).” 므비보셋은 자신을 죽은 개라고 합니다. 개가 천하지만 죽은 개는 가장 무가치하고 천한 것을 말합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왕께서 생각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 므비보셋의 마음과 얼굴의 표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감격과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할 때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눈에서 나오는 눈물도 있고,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그냥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데 어떻게 감정적인 반응이 없겠습니까? 회개의 눈물과 다른 눈물이 있습니다. 은혜의 눈물, 감격의 눈물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이 찬송을 부르면 자주 눈물이 납니다. 내가 잘나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구나! 나 같은 죄인도 구원하시는구나! 내 힘으로 살아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셨구나! 깨달을수록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은혜에 감사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신학대학원 들어갈 때 집안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취직을 해야 하는데, 목사가 힘들다는데, 장로로 봉사해도 된다는데...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라틴어와 헬라어를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아 있기 어려운 심정이었습니다. 막상 입학시험을 치고 합격자 발표가 있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이제는 내 길을 가게 되었구나! 저는 늘 부르는 찬송 중에 460장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나를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면 힘들고 금방 주저앉습니다. 대학부를 지도할 때도 매주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대학생에게는 할아버지 목사의 찬송처럼 들렸을지 몰라도, 저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신앙고백이 담긴 찬송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의 엄한 심판대로 했으면 남아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한 심판은 누구에게나 임합니다. 시간문제입니다. 지금 임할 수도 있고, 다음에 임할 수도 있고, 마지막 날에 임할 수도 있습니다. 순서의 문제는 있어도 누구나 동일한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은 부러워 할 것 없습니다. 오래가지 않습니다. 심판이 미루어진다면 더 엄하고 큰 심판이 임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좋아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가까지 온 것이 은혜입니다. 앞으로도 은혜 밖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시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습니까?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주동자입니다. 멀리 다메섹까지 믿는 자를 잡으러 간 극렬한 핍박자입니다. 자신의 말대로 죄인의 괴수입니다. 이런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로마까지 가서 순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장 말 안 듣고 그리스도에게 적대적이었던 바울을 죽도록 충성하는 증인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도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요나단이 아니었으면 사울왕에게 잡혀 죽었을 것입니다. 왕이 되고 나라의 기초를 세운 다윗이 요나단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아들을 찾아서 은혜를 베풀고 싶었습니다. 예루살렘 궁궐을 짓고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컸습니다. 베들레헴의 목동으로, 위에 형님들이 일곱이나 되는데 어떻게 막내인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전을 짓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다윗에게는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연하지!” 라는 말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과분하게 대접해서 된 것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는 것이 당연하다면 죽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월급 봉부 받아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회사가 서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사업을 붙들고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바람부는 대로 날아갑니다. 아침에 집을 나간 식구들이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식탁에 함께 앉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안 돌아오는 식구도 많습니다. 언젠가 다 흩어집니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내일이라도 남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훔치는 도둑이 있습니다. 교만이 도둑입니다. “내 힘으로 했다” “내가 제일이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은혜가 떠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잘 봐 주셨습니다.” 이래야 은혜가 넘칩니다. 은혜의 끝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왕국입니다.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순간 은혜가 끝납니다. 은혜가 끝나면 심판이 임합니다. 어느 농부가 소출이 많아서 창고를 증축했습니다. “이만 하면 몇 년 동안 잘 먹고 잘 살겠다” 하고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밤에 네 영혼을 데려 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은혜를 간직하고, 어덯게 하면 이웃과 함께 은혜를 나눌 것인가를 생각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훔치는 도둑이 있습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어떻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칩니까? 죄를 더 지으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죄를 회개하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집 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습니다. 죄가 컸지만 회개할 때 은혜가 넘쳤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은혜로 받아서 잔치까지 베풀었습니다. 집에서 열심히 일한 큰 아들을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범생에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모범생은 모범생입니다. 은혜를 모릅니다. 사고도 치고 문제도 일으키지만 회개하면 은혜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간증하는 분들은 대개 이런 분들입니다. 지난날 문제가 많거나 죄가 많은 분들입니다.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더라도 회개하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죄 없다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없습니다. 죄가 있어도 좋고, 죄가 많아도 좋고, 죄가 커도 좋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면 큰 은혜가 임합니다. 회개할 줄 모르고, 양심에 화인 맞으면 은혜를 거두어 가십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는 큰 죄를 짓고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0-11).” 은혜를 도둑맞은 분들은 은혜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왕노릇 하는 삶

우리가 사는 세상에 여러 왕들이 있습니다. 흑암이 왕노릇 하는 곳이 있습니다. 불의와 압제가 득세합니다. 뒷골목의 강패나 조폭의 세계입니다. 공공연히 왕따가 자행됩니다. 학교만 아니라, 이웃이나 직장에서도 집단 따돌림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인정과 관습이 왕노릇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인심 좋은 동네나 고향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웃사촌입니다. 이웃을 사랑합니다. 도둑이 어디 있습니까? 죽 한그릇도 나눕니다. 미풍양속으로 법입니다. 눈빛만 보아도 서로를 알고, 어른들 그림자만 보아도 고개 숙이고 인사합니다. 도덕과 양심이 살아 있습니다.

법이 왕노릇 하는 곳이 있습니다. 대개의 사회 질서는 법으로 유지합니다. 세금도 내고, 군복무도 해야 하고, 의무교육도 해야 합니다. 법을 지켜야 합니다. 고소 고발이 산더미처럼 쌓입니다. 감옥에 죄수들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알지도 기억도 못하는 법들이 많은데, 법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은혜가 왕노릇 하는 곳입니다. “은혜로 합시다” 하면, “찬성이요” 하고 화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 큰 차이가 없습니다. 개인의 스타일이나 정보나 대화의 부족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합시다. 내가 은혜를 받은 것처럼, 상대방을 은혜로 대합시다. 피차 은혜로 받으면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나 실력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 은혜로 서로를 대합시다. 율법은 죽고 은혜가 왕노릇 하도록 합시다. 나의 고집과 판단은 죽고 은혜가 왕노릇 하게 합시다. 은혜가 법이 되게 합시다. 은혜가 상식이 되게 합시다. 은혜가 체질이 되게 합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 찬송이 교회에 울려 퍼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