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까? 삼상2:1-10 한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였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했을 뿐 아니라, 브닌나라는 첩이 아들을 낳고 한나를 조롱하고 격동시켰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실로에 있?성막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엘리 제사장은 탄식하며 기도하던 한나를 보고 술 취한 여자로 오해합니다. 이 때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삼상1:15-16).” 한나는 기도 응답으로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서원대로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찬송을 부릅니다. 이 찬송은 한 개인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부르는 찬송이고, 나아가서 장차 메시야가 와서 하실 일을 찬송하는 예언적 찬송입니다. 우리에게도 한나와 같은 은혜의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영혼의 노래가 있기를 원합니다. 1.교만과 오만은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거리가 먼 사람부터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은혜의 반대편에 선 사람은 교만하고 오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은혜 대신 심판 밖에 받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풍성하다 할지라도 그에게 임할 은혜는 물 한 방울 만큼도 없습니다. 3절을 봅시다. “심히 교만한 말을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오만하고 교만한 자가 누구입니까? 먼저 브닌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브닌나는 엘가나의 첩으로 아들을 낳은 여자입니다. 브닌나는 아들을 낳고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한나를 무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공공연히 한나의 심정을 격동시켰습니다. 브닌나는 한나에게 원수 같은 여자였습니다. 한나는 브닌나를 대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브닌나의 행동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자기가 아들을 낳은 것이 마치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자랑합니다. 사실 브닌나가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나 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왜 나에게 아들을 주셨을까 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진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한나를 위로하고, 한나를 존중하고 가정을 평화롭게 해야 했습니다. 한나는 엘가나의 부인이고 자신은 첩에 지나지 않이 때문입니다. 브닌나는 한나에 대한 긍휼이 없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장차 하실 일도 몰랐습니다. 무지하고 악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이라는 훌륭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브닌나는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사무엘 같은 아들을 주실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브닌나는 영적으로 장님입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오늘은 있지만, 내일에 대해서는 어두운 자였습니다. 내일 일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교만하고 오만한 말을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입니다. 장래의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지금이 안전하고 만족하다고 인간이 교만할 것이 없습니다. 교만이나 오만이 어디서 옵니까?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크고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은 작아 보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높고 깊습니다. 그런데 무능하고 무지한 인간은 쉽게 판단합니다. 조금만 가지면 우쭐댑니다. 평생 이 재물이 나와 함께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작은 성공에도 흥분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해서 굉장한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지렁이와 같습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라고 하십니다. 안개와 같고 하루살이와 같습니다. 지렁이 같은 인간이 남을 멸시하고 잘난 척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각이나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그 내면적인 동기까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교만과 오만으로 하나님을 심판을 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나발이라는 사람은 다윗을 조롱하고 멸시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나발은 부자였습니다. 양의 털을 깎는 잔칫날인데, 다윗이 보낸 사람들을 손님으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모욕을 주고 돌려보냈습니다. 모욕도 보통 모욕이 아닙니다. 다윗을 사울왕을 대적하는 반역의 자식이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패거리라고 능멸하였습니다. 얼마나 악한 말입니까? 다윗에게는 얼마나 억울한 말입니까? 다윗은 사울왕에게 반역하지 않았습니다. 위기에 있는 나라를 구한 충신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나발의 가축을 지키는데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나발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나발은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도와주는 것 없이 무고한 다윗을 해쳤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가진 것이 좀 있다고 교만하지 맙시다. 하루아침에 독수리 날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다 날아갑니다. 교만과 오만의 대표적인 사람이 하만입니다. 그는 페르시아의 왕 다음 가는 권력자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만에게 절하는데 한 사람 유대인 모르드개가 절하지 않았습니다. 절이라는 것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야 받는 것입니다. 아무나 이유 없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나를 신으로 섬겨달라는 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앙심을 품었습니다. 모르드개만 아니라 유대인 모두를 멸절시키려는 실로 엄청난 음모를 꾸몄습니다. 하만은 천하가 자기 손에 있어서 자기 맘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높이 세운 나무에 자기가 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다. 권력이 있으면 하나님 보다 높습니까? 권력은 봉사하라고 하나님이 맡긴 것입니다.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남을 섬기고 돕는데 써야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에 이스라엘의 한 장관도 교만하고 오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합니다. 내일이면 사마리아성에서 양식을 먹으리라. 당시 사마리아성은 아람 군대의 포위로 심한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을 잡아먹는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내일이면 양식을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장관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할렐루야를 외친 것이 아니라 비웃었습니다. “하늘의 창을 낸들 그런 일이 있으리요.” 하나님이 못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죄짓는 일 외에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날 밤 아람 군대는 환청을 듣고 혼비백산해서 도망갔습니다. 양식을 먹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루 만에 기근은 사라졌습니다. 교만하여 비웃던 이스라엘의 장관은 하루 만에 죽었습니다. “네가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먹지는 못하리라”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백성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들 하나 낳고 이렇게 교만하고 오만합니까? 돈과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었다고 이렇게 교만하고 오만합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비웃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교만하고 오만한 자는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은혜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2.하나님은 온 우주만물과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십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화복과 온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4절).” 활은 용사의 능력을 과시하는 도구입니다. 활은 용사가 믿을 만한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을 것은 자신의 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믿었던 활이 꺾어집니다. 산산이 부서지고 깨집니다. 다시는 소생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파멸당합니다. 반면에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띱니다. 활을 가진 용사들에게 무참히 짓밟히던 자가 다시 일어서서 출정 준비를 합니다. 힘이 없고 연약한 자가 힘을 회복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강한 용사라도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자는 망하고, 약한 자라도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자는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강한 자이고 승자가 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5절).” 앞에서는 용사를 이야기 하다가 여기서는 양식을 이야기를 합니다. 힘만 아니라 경제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호구지책으로 품을 팔며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고달프고 비참한 일입니다. 한 때 유족하던 자라도 하나님이 치시면 품을 팔아야 하고, 주리던 자도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풍족하게 누립니다. 우리의 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 엘가나와 두 아들과 함께 양식을 위하여 모압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었습니다. 과부 며느리만 남은 가난뱅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과부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나오미가 온다고 반가워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자신을 희락이라는 뜻의 나오미가 아니라, 괴롭다는 뜻의 마라로 불러달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낮아질대로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결말에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을 높을 수 있는 만큼 높였습니다. 룻이 보아스라는 유력한 친족과 결혼함으로 잃었던 조상의 유업을 회복하였고, 다윗의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6절).” 죽음의 심지도 하나님이 뽑습니다. 아합왕이 전쟁터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위장했지만, 한 병사가 아합왕인지도 모르고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죽었습니다. 그것은 병사가 쏜 화살이 아닙니다. 우연히 쏜 화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쏜 죽음의 화살입니다. 그것을 누가 피할 수 있습니까? 사울왕은 다윗을 죽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잡듯이 다윗을 추격하였지만, 하나님은 끝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하나님의 생명싸게 속에 숨겨 두셨습니다. 살려고 해도 죽고, 죽고자 해도 삽니다. 생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가롯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반면에 극악한 핍박자였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누가 사도의 반열에 설 것입니까? 누가 배교자이고 누가 순교자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말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음부에 던질 자를 음부에 던지고, 하나님은 천국의 복락에 참여시킬 자를 반드시 천국의 복락에 참여시킵니다. 죽고 사는 것, 구원받고 안 받는 것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7-8절).”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은 이십에 노예로 팔린 불쌍한 소년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빈핍하여 거름더미에 처한 자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높이 세우셨습니다. 히브리 노예 소년을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로 목동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아무리 보아도 이스라엘의 왕이 될 모양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골리앗 앞에서도 높이셨습니다. 사울왕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왕위를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사사 입다는 첩의 자식이었습니다. 서자는 기업이 없다고 집에서 추방당한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이 암몬의 침략을 받고 어려울 때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름을 받아 금위환향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서자도 이스라엘의 사사로 높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를 얼마나 귀하게 보시는지 모릅니다. 연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무지한 자를 들어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누가 은혜를 받을 사람입니까? 가난한 자입니다. 죽게 된 자입니다. 멸시 천대받는 자입니다.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당신의 자녀를 결코 외면하시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3.어떻게 은혜를 체험합니까? 하나님은 누구에게 적극적으로 은혜를 주십니까?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간절히 찾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가난하고 병들었다고 다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중에도 심령이 악하고 강퍅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굶어죽어도 하나님 없다 하고, 병들어 죽어도 하나님 없다 합니다. 열 번 백 번을 망해도 하나님을 원망하면 하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버림 받고, 하나님께도 스스로 등을 돌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가난할 때 하나님을 찾는 사람, 병들었을 때 하나님을 찾는 사람, 실패했을 때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질 줄 아는 사람,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 것을 잃어도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는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것이 오히려 복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당할수록, 힘이 들면 힘이 들수록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나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찾고 간절하게 부르짖은 것이 아닙니다. 남편 엘가나를 원망했습니다. 아들이 없다고 첩을 둔 것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한나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남편의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가정은 불화합니다. 세상의 무엇으로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상처를 날마다 더 커집니다. 브닌나에게 대해서는 감정이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멸시하는 브닌나에 지지 않았습니다. 한나도 감정과 혈기로 브닌나를 대했습니다. 한나는 자존심과 혈기, 육체의 소욕으로 똘똘 뭉친 세상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태의 문을 열고 닿는 분이 하나님이신 줄 일찍 깨닫지 못했습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알았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알고 행동으로 실천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지만, 한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한나처럼 문을 닫아 놓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은혜 주시려고 문을 두드리십니다. 지금 마음의 문을 엽시다. 한나는 인간적으로 버틸 만큼 버티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드디어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실로의 성막에서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0-11).” 하나님께서 한나의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의 멸시와 천대를 제거하셨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 중에도 온전치 못한 피조물이고,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피조물입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보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무릎입니다. 기도하는 손입니다.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때 기다렸다가 은혜를 주십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우리의 원통함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쏟아 부읍시다.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자를 귀찮게 여기지만,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무엇이든 고치고 해결하십니다. 우리 앞에 은혜의 보좌가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히 나아갑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속죄함 받은 것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 오직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모양입니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무릎 꿇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왜 지금을 말세라 합니까? 교회는 옵니다. 그러나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교인은 교인입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세상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자기 힘이나 꾀로 해 보다가 안 되면 주저앉습니다. 쉽게 포기합니다. 이것이 말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원하는데, 은혜를 간구하지 않는 것이 말세입니다.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으면 생사화복의 주인이시고,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7-8).”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까? 누가 은혜 체험의 찬송을 부를 것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