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은혜


생명은 은혜
신6:4-9, 요3:16





우리는 부활절을 맞으며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고히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산 자는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은 변화력을 갖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분해 되고 몰락된다고 지난번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생명은 발전합니다.

위로 향해 자랍니다. 우주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산․물․흙․돌 등은 죽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생명은 끊임없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위로부터 온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시 생성하고 끊임없이 발전합니다. 만물이 하루가 다르게 주기적으로 생성․발전한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화분에 심어진 꽃나무를 보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꽃이 피어 있는 걸 보게 됩니다. 봉오리로 있었던 것이 피어서 꽃이 된 것입니다.



봉오리가 막 터져서 꽃으로 피는 데는 몇 시간 걸립니다. 봉오리가 터지면서 꽃으로 피는 동안, 그 봉오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천천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몇 시간 동안 봉오리는 분명히 조금씩 움직이면서 꽃으로 변한 것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피어나는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카메라로 초고속 촬영을 해보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봉오리가 터져 꽃잎이 활짝 퍼지는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주를 살펴봐도, 우주는 그 먼 옛날 있던 그대로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그 동안 어떤 별은 탄생하고 어떤 별은 없어짐으로써 끊임없이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해서 성장하고, 사멸해 가는 것입니다. 지구에 관해서 한번 관찰 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지구에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남아메리카&

#8228;북아메리카․오세아니아의 6대 대륙이 있고, 태평양․인도양․대서양이라는 바다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부터 이렇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먼 옛날에는 육지와 바다의 모습이 지금과 달리, 에리아․앙가라․곤두아나 대륙이라는 삼대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증명된 것이고, 세계지도를 자세히 보면 그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서쪽 해안의 모양과 남아메리카의 동쪽 해안의 모양이 거의 서로 맞물리는 모양으로 되어 있고, 또한 북아메리카 대륙의 동쪽과 유럽의 모양도 거의 서로 맞물리는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거에는 이것들이 붙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이처럼 지구는 변해왔으며 지금도 땅이 바다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고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서해안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으며, 동해안은 조금씩 융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올라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지구도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화해왔고 지금도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생한 발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생물의 경우에도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이 먼 옛날부터 그대로 존재해 왔던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생물과는 다른 과거의 생물이 환경에 따라 변화함으로써 오늘날의 생물로 된 것입니다.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생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생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차 진화하여 공룡과 같은 커다란 생물이 되었습니다. 공룡과 같은 파충류 중에서 어떤 것은 시조새라는 것으로 변화하였는데 이것이 새의 조상입니다. 이 시조새는 파충류에서 변화한 것이기 때문에 세 개의 발가락과 날카로운 발톱, 긴 꼬리, 얄팍한 가슴뼈 등 파충류와 비슷한 점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변화에 의하여 오늘날 같은 새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라는 생물은 모두 변화의 산물이며, 이러한 변화는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면, 본래 육식동물이던 고양이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잡식성으로 변해 밥과 같은 식물성 음식도 먹게 된 것이 그 일례입니다. 인간은 이 같은 우주 변화에 순응하면서 만물을 지배하는 생명의 힘이 부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생성․발전하고 변화하는 우주 속에 잠재되어 있는 위대한 힘을 개발하고, 만물의 주어진 각각의 본질을 발견해내면서 이것을 살피고 활용함으로써 물질과 마음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생명의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경륜을 깨우치게 됩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현재는 과거와 똑같을 것이고, 미래도 현재와 같이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물이 발생하거나 본래 있던 사물이 변화하여 다른 것으로 되는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사물이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화해왔고, 현재도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화해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는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처럼 생명은 끊임없이 약동하고 발전함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삶에 생명을 주는 종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셔서 어느 종교도 기독교만큼이나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고 용의주도하게 생명을 연관해오는 종교는 없습니다. 시간 속에서 시작과 끝을 생명으로 이어오면서 역사를 이루어가는 생명의 섭리는 오직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뿐임을 고백합니다. 기독교는 무덤 없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무덤을 보여주는 종교가 아니고 삶을 보여주는 종교입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굳어빠진 교화나 교리를 펼치는 신앙이 아니고, 죄로 물든 죄인을 찾아 자유롭게 해방시켜 생의 희열을 맛보게 하는 삶을 주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가난한 자, 병든 자, 눌린 자, 고통당하는 자, 옥에 갇힌 자, 박해받는 이에게 찾아가, 굳어진 위엄과 경건으로 다스리지 않고 자유와 해방과 희망으로 새 승리를 주는 생명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회칠한 무덤을 쳐부수고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은 곧 예수와 함께 어둠과 부패와 절망을 타파하고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로마군인들은 예수를 무덤에 넣어 돌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명에 의해 솟아나왔습니다.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이 아니라 저 남산의 한 개나리처럼 고요한 대지에 움터 새싹이 나온 것입니다.

생명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생명을 느낄 수가 있고 살아봄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생명은 그 나타난 현상을 관찰함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은 삶으로 말미암아 더욱 두드러지게 알게 됩니다. 생명의 신비는 어떤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보는 데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어머니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어머니 예찬의 시를 쓰고, 읽고 감상함으로 어머니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머니를 뵙고 모시고 섬기고 삶을 통하여 정을 나누고 대화하고 희로애락을 같이하는 감격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신비가 심장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어머니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생명의 만남입니다.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그 생명은 변화력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스스로 생명의 길을 찾습니다. 한 생명의 곡식 한 알이 흙 속에 몸을 던져 그 생명을 모험하여 변화과정을 밟습니다. 그 한 알의 밀알은 등이 터지고 가슴이 찢어지고 속에 감추었던 생명력이 움터납니다. 거기에 다른 싹이 나고 뿌리가 나고 흙에서 영양을 빨아들여 그것이 잎이 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됩니다. 이렇게 생명은 싹이 나서 섭취하며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어 영화로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어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혈기의 몸을 심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천 년 이천 년 영원토록 억 배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씨는 그 속에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생명이 각기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콩의 씨는 콩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호박씨는 호박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콩씨에서 팥이 나오거나 호박씨에서 콩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각기 그 종류대로 씨가 생기고 그 종류대로 열매 맺게 하였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속죄사랑의 씨앗입니다. 그리스도는 위에서 오신 성자이십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역사 안에 심어진 한 알의 씨앗입니다. 씨는 열매를 목표로 합니다. 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묻혀 죽습니까?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한 위대한 재창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모습의 씨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화신이므로 말씀의 씨앗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씨앗입니다. 이 하늘생명의 씨를 우리는 땅에 심어야 합니다. 말로 심고 글로 심고 몸으로 심어야 합니다. 씨앗운동은 인간과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항상 있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현재화 운동’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입니다. 이 현재화운동은 곧 우리교회의 주제대로 ‘신지 민중화(信之 民衆化)’ ‘망지 역사화(望之 歷史化)’, ‘애지 인간화(愛之 人間化)’라고 우리 서울 교회는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늘생명의 씨앗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자신을 속량 제물로 죽음에 내어주는 죽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이런 죽음에 우리가 동참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활과 영생의 씨앗으로서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생명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함에 주의해야겠습니다. 죽음이 생명과 반대된다는 것은 호흡이 멈추는 것, 모든 활동을 잃어버리는 것,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지는 모든 능력을 상실하는 것 등에서 나타납니다. 성서는 죽음을 하나님과 떠나는 것, 즉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국 생명이 죽음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성서는 죽음을 생명에 의하여 극복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더라도 부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것을 증거하였고, 믿는 자는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구원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생명은 인간에게 주어진 은혜이며, 반드시 줄거운 마음으로 행동하도록 주어진 것으로, 미움과 악한 것들을 미워하고 대항하여 싸우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생명은 주어진 것이지만 그러한 그 목적이나 이행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생명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요 동시에 인간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즐기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고, 삶의 목적이행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생명은 예수에게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는 육신이 갖는 생명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만, 이 육신의 생명이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는, 연속되었을 때,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서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 생명은 육신의 생명을 말하는 것인데, 보통 목숨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이 목숨은 이례적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는 이것을 인정하시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신 일이 여러 번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목숨을 사랑하기보다는 영생을 위하여 미워하기를 바라는데 이 미워함은 고난․희생․죽음까지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워함은 존재론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목적 실천에서 나타나는 역동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영생의 운동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생명이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생으로 나타나기 위하여 우선 믿음을 갖도록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기 위하여 육신의 생명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육신의 생명이 믿음을 가질 때, 영생을 맛보게 되고, 영생으로 연결되고 결국 연속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예수로부터 죽어야 산다는 사실을 여러 번 설교에서 강조되어 알게 되듯이, 우리는 예수로부터 죽어야 삽니다. 영생은 내세와 관계된 것이며 믿는 자가 기본적으로 얻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영생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계명을 지키되 가난한 자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주고 예수를 따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명을 지키되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이웃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생을 얻는 자에게 계명을 사랑의 정신으로 지키되 구체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면서 그걸 지키도록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서 분명하게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생명을 어떻게 할까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하나는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삶의 실천을 이행한다는 것, 그 책임의 소재를 묻고 있다고 하는 것, 그리고 한 생명의 변화와 발전, 그리고 그것은 거듭남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익히 설교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이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삶을 실천하는 과제는 인간이 생명을 얻고 지키게 하는 것으로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생명 속에 그 단어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날 생(生)’자 생은 생으로서, ‘명할 명(命)’자 명은 명령으로서 ‘삶은 명령’이라는 뜻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생명의 삶은 예수가 보여주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교훈을 남겨 친히 본이 되어주셨습니다. 삶 속에서, 진리 속에서 이를 실험해 보이셨고,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되셨습니다. 예수는 사생활․공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진실에 두고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늘 자신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는 짧은 생활이 우리의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으로 이어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예수가 그렇듯이, 자신을 내보이는 진실한 삶의 자세가 우리의 선행이 되어야겠고 삶의 현장에 의미부여를 갖는 뜻있는 생활이 주어져야 합니다. 삶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인생은 태어나는 일입니다. 태어남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왜 태어나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존재의 의미, 자아확립, 자기실현을 놓고 참으로 태어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사는 일입니다. 살아가는 일입니다. 어떻게 살아갈까, 가치관의 문제가 제시됩니다. 사람은 자기 나름의 책임을 가지고 살기 시작할 때 참인생이 된 것을 확인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나눔의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이 살리는 삶인 것을 깨닫게 되는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생명은 귀합니다. 그리고 신성합니다. 이 생명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각 사람의 고유한 몫입니다. 이 생명을 거룩하고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참사람과 참하나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난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생명은 그 자체가 목적일 뿐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다시금 인간이 존귀하게 대접받는 인간다운 사회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려면, 모든 법질서와 윤리질서 및 사회질서가 인간의 생명의 불가침, 불가양도적인 권리를 승인하고 이를 신성시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종합적으로 얻습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은 살상이 난무하고 죄가 되는지도 모른 채 대량의 살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살육의 도성에서 교회는 죄인들이 죄를 대신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와 용서룰 비는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의 황폐된 병든 심령을 치유하기 위해 예수님의 복음의 빛을 우리는 비춰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사랑하는 사회적 연대의식을 확산시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한 극한 범죄인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이라는 사실만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의식을 헤치고 바로 심어줘야 합니다. 생명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나님뿐이시며, 그래서 생명은 신성하고 존귀하다는 의식을 이끌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고 오늘 성서의 본문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 외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함으로 인간에 대한 그 지극하신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율법으로 구원할 수 없는 세계를 십자가상의 은혜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법은 다른 사람을 죽이지만, 은혜는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원리야말로 하나님의 새로운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이 은혜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생명을 얻는 믿음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얻은 구원하심으로 참생명을 얻는 교훈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은혜로 얻은 생명임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