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전주곡 마21:1-11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지막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호산나, 즉 \"우리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치며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때 만큼 곤혹스러운 때는 없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동상이몽이었습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모든 백성들이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모여와 예수님을 환영하는 대소동을 빚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깜짝 놀랐고, 로마의 총독부도 갑자기 어떤 정치적인 소요가 일어나지 않을까 잔뜩 긴장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계엄령을 선포해도 될만 한 큰 소요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소동이 당사자인 예수님의 마음과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너무나 달랐습니다. 정말 이것은 코미디도 보통 코미디가 아닙니다. 참으로 역사적인 대 희극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정복자였던 로마에 대한 혁명과 징벌을 바라는 무리의 과격한 기대와는 달리, 또 개선장군이 군마를 타고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나귀새끼를 타신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한 폭의 코미디극처럼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웃기자고 이 일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생각하시며 심각해지기 까지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행위는 이미 죽음을 결단하고 그 죽음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가 자의적으로 행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자신을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죽이려고 모함했던 유대 당국자들의 결정적인 음모와 살해당하심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당국자들에게도 일단 도마 위에 오른 생선과 같이 위기일발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반백성들의 화려한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이렇게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이미 스스로가 준비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버리는 권세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고, 다시 얻을 권세는 자신의 부활을 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스스로가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서 지나간 날 다윗처럼 탁월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로마로부터의 억압에서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보다 본질적인 그들의 영혼이 먼저 구원받기를 원했고, 그들은 단순히 육체적인 구원만을 원했습니다. 정치적인 해방만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자기 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의 메시아관은 본질적으로 아주 잘 못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관이 본질적으로 잘 못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자신의 욕구와 기대에서 벗어나게 되자 오히려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려했습니다. 그리고 모함을 하고 그 일을 구체적으로 계획을 하게 되니 이것이 곧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고난주간인 이 주간 금요일에 이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날에도 이렇게 똑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던지며 못 박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마음, 즉 그 분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분의 뜻과 맞지 않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이렇게 엉뚱한 일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나 천국은 하나님과 뜻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비본질적인 것은 잠시 있다가 곧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너무 세상적인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보다 더 크고 많으니까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몸집만 크게 불려놓았으니 바늘귀 같은 천국 문을 통과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 같은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 같지 않고는....
우리는 비록 이 세상, 즉 곧 사라지게 될 비본질적인 세상에 살고 있지만 본질적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만 치우친 부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더 많이 치우치는 하나님 나라의 부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했던 그 때의 군중들 속에 자신도 끼어있지 않다는 보장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마 21: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예수님은 그 삶 자체가 자신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현하는 삶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각본대로만 움직이는 배우와 같습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하여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이것은 예수님께서 마귀, 즉 사단을 쫓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마귀가 들어 올 틈도 없고 설상 있다고 할지라도 그 마귀는 말씀 앞에서는 존재할 수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곧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예의 말씀은 수도 없이 많지만 하나만 더 말씀을 드린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결국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멀리 있는 이 로마 백부장의 하인이 죽을병에서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예수님의 삶 자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사는 것,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그러므로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형통합니다. 진정으로 성공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말씀대로 살면 죽어도 다시 삽니다. 소망이 넘칩니다. 삶 자체가 천국입니다.
■저는 어제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설교자로서의 행복입니다.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행복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은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며 예수님처럼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습니다. 행하려는 준비를 가지고 성경을 펼쳐보십시오. 행하려는 준비를 가지고 말씀을 들으십시오. ■문제는 행하지 않으려는데 있지 행함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려는 데는 큰 산도 그 앞에서 티끌 같아 평지가 됩니다. 그러나 행하지 않으려는 마음에는 티끌도 큰 산 같은 장애물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은 항상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 믿음의 사람에게는 항상 가까이 있습니다. 1)출 애급 당시에 이스라엘이 수르광야에 이르렀는데 백성들은 삼일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 기진맥진했습니다. 마라라고 하는 우물곁에 까지 왔지만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이라는 내일과 미래의 소망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마실 물이었습니다.
이 때 안타까운 그들을 바라보며 모세는 하나님께 애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감동을 해 주셨습니다. 그 샘 곁에 있는 이름도 없는 “나무의 가지를 우물에 던져라!” 모세는 말씀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자 쓴물이 갑자기 단물로 변하면서 해독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2)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을 바치기 까지 말씀대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에게 이삭대신 수양을 준비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가까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이렇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시는 것은 사실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 자신은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기위하여 하신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자살행위였지만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본다면 이것은 다시 사는 생명과 부활로 나아가는 개선장군의 행위였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호산나”는 죽음의 노래가 아닌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승리의 전주곡이었습니다. 짧은 눈으로 보면 죽음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이것은 바로 자신도 우리 모두도 살리는 부활을 향한 승리의 전주곡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의 죽음은 공포가 없는 희망이 있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끝이 아닌 영원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은 죽음 너머에 있는 진정한 삶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순간을 넘어 영원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불행을 넘어 행복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실패를 넘어 성공의 삶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넘어 기쁨과 환희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즉 죽음을 뻔히 알면서도 로마 총독부와 유대종교의 당국자들이 득실거리는 예루살렘 심장부를 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알면서도 무덤을 향하셨습니다. 이처럼 무덤을 이기려면 무덤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을 향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덤이 터지고 열립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삶에 승리의 전주곡을 결단코 울릴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긴 사람들은 예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즉 하나님과의 뜻이 일치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생명의 십자가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로의 행진은 죽음이 아닌 부활과 승리의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죽음과 슬픔과 불행을 넘어 생명과 기쁨과 행복을 보아야 승리의 전주곡을 힘차게 울릴 수 있습니다.
|
|